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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사람 (갈 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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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사람 (갈 2:19-21)

보석상을 하던 한 장로님이 병이 들어 죽음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게도 안 되고 걱정만 쌓여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서 천국을 보게 되었는데 평소 설교로만 듣던 벽옥, 녹 보석, 홍보석, 남보석, 옥수, 홍마노, 황옥, 녹옥, 담황 옥, 비취옥, 청옥, 자정 등의 보석이 즐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금은 아예 발로 밟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보석상을 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귀한 보석들을 다 본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장로님이 갑자기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서 사람들과의 문제를 다 풀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동안 속 썩이고 자기 고집대로 했던 일 다 용서하라고....목사님이 용서 할 일이 어디 있냐고 제가 잘못한 일이라고 서로 좋게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평소에 아무 말도 안 듣던 고집불통의 장로님이 어떻게 회개를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꿈에서 본 이야기를 자세하게 늘어놓으면서 빨리 천국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심각하게 묻습니다."장로님, 정말 천국이 있고 거기에 그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더란 말이죠? 장로님 먼저 가 계세요. 저도 곧 따라 가겠습니다"그랬더니 장로님이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이"왜요? 목사님도 보석상 하시게요?"하더랍니다.

사람이 가지는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본능 속에 감춰진 욕망이라는 것은 아무도 쉽게 제어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한 가지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위해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그 목적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중에[리차드 리버]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윤리생활을 말하면서 하나님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소위 믿는 사람들의 세 가지 유형의 인간 실존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스스로 행동합니다. 항상 내가 무엇인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생각대로 결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의식의 존재가 있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의 전체 속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이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무와 율법을 잘 지켜가려고 하고 그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바른 의식으로 살아가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며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항상 응답하는 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았고 분에 넘치는 신세를 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나는 늘 부족하고 형편없는데 받은 사랑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한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살아가는 곧 오직 응답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쪽입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신앙생활해오면서 혹은 예수를 믿노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는데 과연 그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만으로 예수 믿는 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처럼 살아보겠다고 결심도 곧잘 하고 예수를 본받아야겠다고 구제도 하고 전도도합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의 의미일까요? 이 모두가 맞는 일이고 또한 다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만 가지고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걸 알고야 예수를 따를 수도 있는 것이요, 본받을 수도 있는 것이며 존경하고 사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경험이 없이는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십자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십자가에 대한 자기 체험이 없는 사람은 말씀 속에서 그 신비의 체험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냉정하게 판단해 봅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같이 먹고 자고 했습니다만 엄격히 말하면 오순절 성령 받을 때까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봐야 됩니다. 그때까지는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아니 좀 더 관대하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까지도 인정해 준다합시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배우고자 따르고 본받고자 흉내를 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비로운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아주 신비로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신비로운 체험은 실제적인 내 육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속에서 먼저 일어나고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그 십자가의 신비로운 체험이란 무엇입니까? 먼저는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에  문제가 있고요,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쳐다볼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더라도 이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요 내 대신 죽은 증표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데 그가 대신 죽었습니다.'그래서 아직 나는 살아있으나 의미상으로 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 확실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보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버러지 같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그것으로 충분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에 감격할 수 있고 그 사랑을 알 때에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신학적 정리를 해줍니다."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때로 보면 두고두고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늘 생각하기를'너 두고 보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그리고'내가 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다'생각해 보십시오. 두고 할 말뿐만 아니라 사실은 지금당장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이지 우리 자신을 보면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서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얼마나 못 돼먹은 사람입니까? 교만하기 짝이 없고, 무지하기 그지없고, 인격이 파탄 날대로 파탄 난 지경으로 죽어야 마땅했던 하찮은 인간이었는데 피를 흘리는 대가를 치루면서 살려 놓으신 후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들의 행위나 인간됨을 보고 그 평가에 따라 살리고 죽이셨더라면 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세요. 나의 존재는 나의 인물도 아니요 나의 능력도 아니며, 나의 지능도 아닙니다. 그 까짓것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가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줄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생각해야합니다.'나는 벌써 죽었다.'사도바울이 고전 15장말에서 말하는"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새롭게 나의 죽음을 확인한다는 말입니다.'아, 오늘도 나는 죽은 존재구나!'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는 것입니다.[마틴 루터]는 이것을 받아서 좀 더 깊은 말씀을 합니다."나는 매일 세례를 받는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는 고백의 표식이거든요. 그래서 루터는 날마다 새롭게 세례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입니다만 정말 힘든 것이 자기를 이기는 일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그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싸움의 방법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마음을 비우세요."그럽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웠다고 큰소리 뻥뻥 치지만 나중에 보면 비우기는커녕 다른 욕심들이 더 가득 차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실제로 남보고는 비우라고 하지만 자기는 안 비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이기는 일이 내 자신의 의지로 가능하냐 하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봐야 됩니다."나는 이미 죽었다."할 때 더 무슨 욕심과 욕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를 쳐다본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A. W. 토저]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의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 했습니다. 첫째는 한 방향만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보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는 이제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는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고 피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중심해서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는 이야기가 맞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평생 선한 일을 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내 몸을 내어 헌신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뿐이지 내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도 공로도 없습니다.

갈 5장 2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바로 그 마음, 그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자기 의미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운명까지도 결정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정리해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속에 내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골 3장에서 말합니다."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만약 오늘 여러분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무한한 자유와 용기와 능력이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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