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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3) : 믿음은 한계를 뛰어넘는다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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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3) : 믿음은 한계를 뛰어넘는다 (히 11:17-19)

1. 오늘은 기미독립선언 8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것은 독립선언서에 실린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월1일에 서울을 비롯한 평양, 선천, 원산, 의주 등 12개 처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모두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3월4일 전국적인 운동으로 파급되었는데, 대체로 교회나 기독교학교가 있는 곳에서는 그 기관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많은 성도가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고, 옥사하였고, 교회들이 불탔습니다. 무엇이 그분들로 목숨걸고 만세운동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분인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를 판사가 심문한 내용을 보면 이러합니다. 조사는 요즘말로 전도사쯤 됩니다.

재판장: 누가 피고에게 선동하였는가?
김태련: 내 땅 내어 달라고 하는데 무슨 피고인가? 하나님이 시켰다. 
‘하나님이 시켜서 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런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 두려움을 뛰어넘고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2. 오늘 성경말씀에서 그런 단순한 믿음, 순수한 믿음을 가진 분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생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돋보이게 해준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간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채 믿음으로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모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믿음의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 얻은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아들이 10명이 있어도 그 중에 한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해도 그 어떤 부모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25년간 기도하며 기다리며 기대하여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더 큰 믿음으로, 더 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더 큰 믿음을, 더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지하에서 캐낸 철광석은 그것 자체로는 쓸모없습니다. 돌과 온갖 불순물이 뒤섞인 철광석을 1500도나 되는 뜨거운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시뻘건 쇳물이 나옵니다. 이게 선철입니다. 이것을 다시 전기로에 집어넣으면 무쇠같은 연철이 됩니다. 이것으로 호미나 칼, 도끼를 만듭니다. 무쇠는 철광석보다 훨씬 비쌉니다. 연철을 다시 압연기에 통과시키면 강판이 됩니다. 특수강판은 무쇠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쌉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도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더 비싼 사람, 가치있는 사람, 존귀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철광석같은 싸구려가 아닌, 특수강판처럼 값비싼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고 또 단련하고, 한계에 봉착하게 하고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게 하십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사건을 읽을 때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외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지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믿는 믿음, 이것이 바로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죽으면 없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없는 것을 하나님은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십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는 믿음,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 어쩌면 우리 스스로 정한 한계를 뛰어넘기를 원하십니다.

벼룩은 최대 2m까지 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벼룩을 병에 담아 뚜껑을 덮어놓으면 몇 차례 점프를 시도하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한계를 정합니다. 뛰어봐야 내 능력은 10㎝구나! 그때 다시 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이때야말로 높이 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지만 벼룩은 더 이상 뛸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실패하면, 스스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포기해버립니다.
다이어트를 몇 번 실패하면, 난 절대로 다이어트 못한다고 스스로 한계를 정합니다. 전도 행사 때, 몇 번 초청해보아도 실패하면 ‘난 전도 못해’ 라며 스스로 전도를 포기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 시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할래야 할 수 없는 것, 안되는 것, 그래서 포기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내 배에서 난 자식이지만, 내가 감당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자식이 여러분의 한계입니다.
‘남편하고는 대화가 안돼.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을 길이 없어.’
부부생활의 한계에 봉착한 분들입니다.
연세가 드시면 체력의 한계를 느낍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가난의 한계를 못 벗어난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한계를 탓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듣고서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4.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그의 믿음을 좀 더 상세히 봅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아마 그의 전부와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25년 동안 기다려서 얻은 외아들이기에 아마 아브라함은 자신보다, 자기 아내보다 외아들 이삭을 더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이기에 하나님께서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보다 더 귀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너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의 전부이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 어떤 좋은 것도 하나님과는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전부이십니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 아브라함에게는 한계이지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아들 이삭과 둘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삭의 등에 번제로 쓸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때, 아버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네 아들아, 네가 제물이란다.’ 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셨단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셨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다. 하나님이 전부(everything)이시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한계에 봉착해 있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여러분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셨다.’ 

하나 더 있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약속의 아들입니다.

18절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이삭은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갈 후손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직 청소년인데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대를 잇기도 전에 그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면 “이삭이 너의 대를 이을 것이라‘ 는 하나님의 약속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바쳤습니다. 약속이 끝장 날 것 같은데도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수많은 축복의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번성하고 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고 붙들어주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몸이 몹시 쇠약해져가도,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수십년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도 이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실패, 또 실패, 계속 실패를 하여도 이 약속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5. 요즈음 갑자기 뜨는 기업 중에 유진그룹이 있습니다. 서울 증권을 인수했고, 로젠택배를 인수했고, 로또 복권 사업자로 선정되었고, 하이마트를 인수했습니다. 유진기업은 본업이 레미콘 사업이요, 아스콘 제조가 주 사업인데, 이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1위입니다. 사장은 유경선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그 어떤 복도 없는 사람이고, 그렇다고 딱히 누구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가 한계지 하고 주저앉는데, 자신은 조금만 더 가보자고 자신을 채찍하면서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가려고 했더니, 한계라고 생각한 것이 한계가 아님을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끝인 줄 알았는데 가보니 끝이 아니고, 품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품어보니까 품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미리 한계를 정하고, 거기가 한계라고 하며 멈추어 서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 한계를 뛰어넘는 지혜를 철인 3종 경기를 하면서 얻게 되었답니다. 수영 1.5km를 한 후, 이어서 사이클 40km를 달리고, 계속하여 마라톤 10km를 달려 골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기입니다. 정말 그만 두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파열할 것 같은 순간이 수없이 온답니다. 그 때마다, 한 걸음만 더 뛰어보자고, 한번만 더 페달을 밟아 보자고, 한번만 더 팔을 저어 헤엄쳐 보자고, 그 한 번 더 해보자는 그 순간, 한계는 이내 더 이상 한계가 아님을 수없이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하나는, 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세를 잃지 말자.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라고 할 때, 한계는 더 이상 한계가 아니다.

모세는 홍해의 한계를 믿음으로 뛰어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시편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육체의 한계, 환경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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