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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물이 찢어질 때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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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이 찢어질 때 (눅 5:1-11)
   
  최근 TV 프로그램 중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다큐가 있었습니다. ‘영화 같은 나의 인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집이자 농장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를 할 즈음에 그는 영화 두 편을 완성하고 쉬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에서 시작해서 감독 제작자로 변신한 사람입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둘 다 히트했지요. 저는 그 다큐를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습니다.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도 일평생 해오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고 셋째는 일을 마치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업적에 대해서 말할 때 ‘성취해 봤더니 별 거 없더라, 허무하더라.’ 이런 말하기를 좋아하지요. ‘별거 아니더라.’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허무주의 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 우리가 우리 인생의 결과에 대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보람을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방향 설정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랬겠지요. 아니면 욕심을 많이 부렸기 때문에 그랬겠지요.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지요. 우리가 정당하게 fair하게 살고 일했다면 왜 우리의 결과에 대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사도바울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경주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적어도 신앙인으로 살면서 우리의 수고에 대하여, 우리의 일에 대하여 이후에 후회함이 없이 나는 참 감사하다, 나는 참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얻기는 얻었는데 그 일로 인해서 또 다른 기대하지 못했던 손실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의지에 의한 것도 자기 뜻에 의한 것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를 많이 잡았어요. 고기를 많이 잡은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써 그물이 찢어졌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했는데 그물이 튼튼하지를 못해서 예수님이 예비하신 것을 다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는 표현처럼 그물이 찢어졌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많이 잡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하지만 입이 찢어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았다고 해서 입이 찢어졌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물이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만약 성경에 그물 이야기가 여기에만 나온다면 그냥 하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아주 비슷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그때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서 잡은 고기가 많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같은 누가복음은 아니지만 마치 누가와 요한이 호흡을 맞춰서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사건, 요한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사건을 각각 기록하면서 누가의 기록에는 삼년 반 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는데 잡은 고기는 많았지만 그물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삼년 반이 지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도 비슷한 사건이 생겼는데 그때는 잡은 고기가 많았지만 그물이 질기고 단단해서 찢어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면 이다음부터는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물은 찢어져서는 안됩니다. 찢어진다면 그것은 그물로써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물은 질겨야 됩니다. 그래야 그물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물은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생이 험하다보니까 또 인간의 영혼이 약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중에도 사람의 영혼이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신이 뜻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달라, 달라, 주십시오, 라고, 달라고만 요구하고 또 그것을 얻으면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보다도 더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이후를 내다보시고 그것을 주시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가는 아주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하늘은 비행기와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 두 번째 하늘은 우주 공간, 그리고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신비한 세계를 말하는데 사도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서 신비한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경험을 한 다음에 그의 육신에 가시가 생겼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과거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죽든가 미치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지만 육신에 가시가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계시와 은혜, 이것은 좋은 것인데 그것을 많이 받은 결과로써 뭔가 장애가 생기고 이 장애가 사도바울을 일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까지는 없애주지를 않았습니다.

  인생이 험하고 또 이 세상에 악한 일이 많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일이 많이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마저도 우리가 감당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달라, 고기를 잡게 해 달라, 성공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잘하지만 주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을 받은 다음에 그물이 찢어지는, 영혼이 찢어지고 뭔가 우리 삶에 장애가 발생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엔조이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교회 성도님이 저를 초청해서 상담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작년에 아주 큰 사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상당히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시름 놓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랍니다. ‘밤에 자주 깨고 왜 불안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마귀의 시험인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동안 사업하면서 생긴 긴장이 집사님의 영혼의 마음의 그물을 찢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삶의 환경은 더 편안해지지요. 세상은 살기가 더 좋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더 약해져갑니다. 사람이 과거처럼 인생의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을 강건하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그만큼 편안해 지고 있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인생이 편안해지는 만큼 우리의 영혼은 더 연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을 하는 데도 그물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건강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쓰고 또 많이 알고 있지만 정신적인 건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그것은 미친 사람들 얘기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마는 그건 소위 미친 사람이나 갖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감기가 들 수 있다면 왜 사람의 마음도 감기가 들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몸이 탈이 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람의 마음도 탈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몸의 질병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마음의 병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부끄러워한다든가 아니면 내가 문제가 있어서 내게 뭔가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런 일로 자신을 탓해버릇하면 안됩니다. 그건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매년 시력검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제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기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얘기를 하면 아주 화를 내면서 ‘네가 어두운 데서 책을 읽어서 그렇다’ 어두운데서 읽든 밝은데서 읽든 읽는 게 고마운 것이지 어두운데서 읽는다고, 그렇다면 밝은 TV를 볼까요? 사실 어두운데서 책을 봐서 그런 것이 아니고 눈이 나빠지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사람의 눈이 왜 나빠지는지? 몽골 사람들은 시력이 2.5가 되는 사람도 있답니다.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산이 없는 들판에서 평생을 살기 때문인 것이고 우리처럼 좁은 공간, 실내,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눈이 나빠지는 것은 탓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눈이 나빠지는 것을 탓한다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안경 쓴 사람들을 탓해야 되는데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눈이 나빠지는 것이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든 그런 것이 없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다고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은 옳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강하면 좋지만 강해지기 위해서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되는데 이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강해질 수 있는 기회, 이것이 거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더 편해지기를 원하고 더 잘살기를 원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강건해지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든가 적당히 그것을 섞어야지 환경은 좋아지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강하고 담대하기를 원하는 것은 이건 기회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가면서 수명이 길어지고 환경은 좋아지고 삶은 편해지지만 사람은 점점 더 약해집니다. 사람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지고 실망이나 상처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약해집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은 강한 음식, 소화를 시켜야 되는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요즘에는 가공된 음식 소화하기 쉬운 것을 자주 먹기 때문에 소화기관, 얼굴, 턱의 모습까지 달라진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현상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과 베드로와 야고보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을 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수선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찢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 전세계적으로 점점 더 필요한 직업이 바로 찢어진 그물을 기워주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상담, 치유, 화해, 용서, 사랑, 그리고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점점 더 필요한 직종이 이런 것입니다. 찢어진 그물을 기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용서하게 하고 치유 받고 그리고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는 이것은 성직뿐만이 아니고 사람의 영혼, 사람의 내면세계에 대한 돕는 사람들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소원을 이루는 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라고 생각합니다. ‘설마 소원을 이룰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소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원을 이룬 다음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소원을 가지면 안됩니다.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소원에 있어서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들어주십니다.

  두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튼튼한 그물을 준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셔도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성공을 주셨는데 그 성공이 우리를 타락하게 한다든가, 우리에게 재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든가, 방탕하게 한다든가, 가족이 서로 다투게 한다든가,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물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늘 제게 하시는 말씀처럼 ‘살펴가면서 일해라, 건강도 돌봐가면서 일해라.’ 정말로 맞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왜 속히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시지 않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속도는 우리와 다릅니다. 속히 이루어주시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체할 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든 기쁨이든 그것을 들어주시는 데 있어서 당신의 속도와 스케줄을 갖고 계십니다.

  'Oceans 11'이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이것은 열 한 명의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돈을 번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돈을 버느냐는 묻지 마세요. 아무튼 돈을 벌었어요. 그 속편 'Oceans 12'를 보면 전편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열 한명 중에서 그 돈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심지어 빚을 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한 번 한탕하자고 하는 내용입니다. Easy come, easy go,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인생의 베테랑 또 어른,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은 베드로 같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사건이 있은 후 삼년 반 후에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똑같은 사건이 생겼는데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배의 우편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았어요.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베드로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고기잡이 하면서 시간을 보낸 게 아니에요. 신앙을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신앙을 배운 결과로써 이젠 다른 일을 해도 과거와는 뭔가 달라진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내면적으로 강건해지고 지혜로워지고 뭔가 성숙해서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았을 때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장입니다. 이것이 진짜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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