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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마른 자를 위한 복음 (요 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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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목마른 자를 위한 복음
       (The Good News for the Thirsty)
성경 :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유대인의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지켜오던 오순절 날에 약속의 성령께서 교회 위에 강력하게 강림하셨습니다. 
  지상 교회는 이날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면서 보혜사 성령님과의 동행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은 과거의 역사적 이벤트로 기념하는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앞으로 계속되어야 하는 주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장차 이루어질 성령의 넘치는 사역에 대해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갈급해하는 자들에게 ‘내게로 와서 마시라’ 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날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7일간의 초막절기가 끝나고 제 8일째 성회로 모이는 날을 가리킵니다(레 23:36). 이 명절 기간 7일 동안 제사장들은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까지 행진하여 제단에 붓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는 비를 내려주시고 풍성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상징적 행위로 행하여졌습니다. 
  제사장이 이끄는 행렬이 새벽에 실로암못으로 내려가 거기서 황금 주전자에 물을 가득 떠서 아침 제사를 드릴 때 성전으로 돌아와 그 물을 제단 서편 굴뚝에 붓고, 이때 성전 찬양대에서 큰 소리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척 인상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8일째 되는 날에는 초막을 거두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조상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환호하며 절기를 보낸 백성들에게는 절기의 끝 날은 ‘큰 날’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같은 축제의 날에 예수께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목마른 자를 위한 좋은 소식’ 입니다.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갈급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위대한 축복이 되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심 (적용적해석: 생수의 근원 예수)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물이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초막절 절기동안 매일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 서편에 붓는 행사를 즐기던 군중들을 향해 ‘내가 바로 생수의 근원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초막절의 물 깃는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어 생수를 공급해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초막절 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당신 자신이 광야에서 물을 낸 그 반석의 실체로서, 사람들의 현재적인 영적 갈증을 해결해주며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해 주는 영적 생수 되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명절 끝 날에 명절의 의식과 관련하여 이러한 생수의 강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은 당시 무리들에게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되십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당신 자신이 생수의 근원임을 자신 있게 외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서서’ 외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가르칠 때 앉아서 가르쳤고, 주님도 여러 경우 앉아서 가르치셨는데, 여기 ‘서서’ 외치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소식은 참으로 중요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구를 보더라도 온 지구 표면이 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은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 밑에 상당한 양의 지하수가 흐르고 있어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중에도 물이 있습니다. 구름과 함께 수증기가 있어서 때를 따라 비나 눈으로 땅 위에 내려옵니다. 지구 전체가 물로 에워싸여 있어서 지구의 온도를 조절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몸에서 물이 빠져버리면 박물관의 미이라처럼 조그맣게 쪼그라들고 맙니다. 몸속의 물은 혈액순환, 소화활동 등 몸의 모든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물은 곧 생명입니다.

  대우주와 몸에 물이 필수적이듯이 우리의 영혼에도 물은 절대적입니다. 물은 우리의 영혼을 조정해줍니다. 몸이 갈증을 느낄 때에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처럼, 영혼이 갈증을 느낄 때 우리는 반드시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중국의 모택동이 전세계의 공산주의를 주도해나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유럽에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회의가 끝난 후 회의장을 청소하다가 모택동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종이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누가 이 대 우주를 만들었는지, 이 우주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지, 내 존재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누가 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만약 그가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참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있어서 미궁에 빠져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갈증을 느끼고 있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는 생명의 물되신 예수님께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생명의 물로서 우리의 영혼을 갈하지 않게 하십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사는 우리는 목마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2. 목마른 자는 와서 마시라 하심 (적용적해석: 갈증의 해결자 예수)
  
37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은 친히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는 ‘갈증의 해결자’ 이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수많은 군중을 향해 이 말씀을 외치신 것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목마름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내면의 목마름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육체의 갈증을 쉽게 느낍니다. 조금만 목마르면 물이나 각종 음료로 갈증을 해소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체적 존재일 뿐 아니라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육체 못지않게 갈증을 느낍니다. 이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은혜의 결핍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인데,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야만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영혼의 갈증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히포의 주교였던 교부 어거스틴의 말대로,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간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공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영적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써 단절되었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그 회복된 관계를 통해 ‘내면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갈증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생활은 예전 생활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고 편리합니다. 사람의 수명도 한 세기 전에 비해 두 배로 연장되었고, 과거의 불치병들이 하나 둘씩 현대의학으로 점령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많은 두려움, 더 큰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전쟁 직후의 어려운 때보다 지금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정신의 갈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갈증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처럼 돈으로 갈증을 없애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을 구하기 위해 중남미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금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구해 그 안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옛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지식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식 때문에 정신 세계에 이상이 생기고 더 큰 고민이 생기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권력으로 정신적 갈증을 면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인간의 갈증을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갈증을 가져옵니다. 

  누가 현대인들의 영적 갈증을 풀어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향하여 담대히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의 품 안에 안길 때에 우리의 갈증이 해소될 수 있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어집니다. 

  어느 마을에 큰 공장과 작은 공장이 서로 담을 사이에 놓고 마주 있었습니다. 큰 공장에는 모든 것이 풍부했습니다. 일거리도 많았고 직원들도 건장했습니다. 또 공장을 움직이는 동력도 남아돌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공장은 여러 가지로 어려웠습니다. 일감도 적었고 일꾼들도 초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동력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고심하던 작은 공장의 사장은 결심을 하고 큰 공장의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애로점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자기 공장과 큰 공장 사이에 놓여 있는 담을 헐고 큰 공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와 자기 공장의 기계에 벨트 하나만 연결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족한 동력을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공장 사장은 그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작은 공장도 훌륭한 공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큰 공장과의 연결은 작은 공장의 사장과 전 직원들에게 큰 기쁨, 큰 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힘만을 의지하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공장 사장이 큰 공장 사장에게 찾아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담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줄을 연결시킬 때, 우리는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거 광야시절 백성에게 물을 내었던 그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고, 나사렛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고대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정작 초막절의 주인공이신 분은 제쳐놓은 채 자기들끼리만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행사들이 예수님 중심이 되기보다 어느덧 사람 중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이고,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은 우리의 대속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중심의 예배나 모임들은 일시적으로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런 모임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깊은 영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시간 손을 벌려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절).  이것은 초청의 말씀인 동시에 믿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으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갈증의 해결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 55:1=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3. 믿는 자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옴 (적용적해석: 갈증의 해결 방법, 성령)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목말라하는 자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 할 좋은 소식은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39절을 보면 이 생수의 강은 예수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곧 성령께서 그 사람의 속에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성령을 파송하십니다. 
  39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가 예수께서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및 승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구속 사역을 다 마치시고 승천하신 것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곧 보혜사 성령께서 믿는 자속에 거처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 속에 거처를 정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물론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지만, 소수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시대의 성령의 임재는 그 사람의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특정인을 감동케 하시고 능력을 주시기도 하셨지만 그것이 영속적인 내주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의 사역과 활동은 특정 인물이나 특정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믿는 자 누구에게나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에 성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성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시대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신 시대입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구약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오직 예수 신앙으로 살기로 결심할 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마음속에 내주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깨닫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 때에도 성령께서는 같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되셔서 우리를 목마르지 않도록 하십니다.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경험은 어떠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이런 삶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 해답은 바로 주님의 말씀 중 ‘마시라’와 ‘믿는 자’의 동사 시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의 시제는 모두 현재형인데, 이것은 ‘반복’과 ‘계속’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시되 한 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계속 마시는 것이며,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 고백한 이후에도 계속적이고도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상태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속적인 성령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라도 신앙을 지탱하기 힘듭니다. 주님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께 전인격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일 오전 오후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밤, 금요밤 예배와 매일의 새벽기도회 참여는 ‘생수의 강’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 투자라 할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목마른 자입니까?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넘쳐 나오는 ‘축복의 삶’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목마른 자를 위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 목말라 나오는 자에게 예수께서 갈증을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 그리고 와서 마시는 자에게 성령께서 생수의 강을 흘러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체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거룩한 생수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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