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충성의 8대 원리 (삼하 23:13-17)

  • 잡초 잡초
  • 552
  • 0

첨부 1


충성의 8대 원리 (삼하 23:13-17) 


(요약) 다윗의 세 용사의 충성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충성이란 함께 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 것이다. 충성은 소원을 이루어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충성은 말씀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간직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충성은 작은 일조차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충성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충성은 그분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는 것이다. 충성은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그만 두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충성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이 시간 “세 용사로 본 충성의 8대 원리”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싶습니까? 우리는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실 때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칭찬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큰 상까지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충성스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만이 충성! 그러는 것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충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따라서 합니다. 충성! 거수 경례의 충성만이 아니라 진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럼 충성이 무엇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세 용사가 나옵니다. 그들의 이름은 요셉밧세벳(8절)?엘르아살(9절)과 삼마(11절)입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충성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줍니다. 
그럼 충성이란 무엇일까요?

1. 충성은 함께 하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13절에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그랬습니다. 원래 아둘람 굴은 세상에서 상처 받고 환난 당한 자들이 모여오는 피난처였습니다. 그래서 아둘람이라는 뜻이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쟁터의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 왔다는 것은 다윗을 위해 목숨 건 각오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세 사람은 다윗과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각오했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떠나지 않는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스러웠던 여호수아의 충성됨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출33:11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죽는 데도 함께 가겠다고 한 것도 충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진시황의 무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죽어서도 왕을 떠나지 않기를 희망했습니다. 이처럼 충성이란 함께 하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문에서도 충(忠)이란 마음심 위에 가운데 중입니다.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2. 충성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15절에 “다윗이 소원하여” 그랬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소원을 알고 반응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에서 1,2km 떨어진 곳으로 물이 깊고 시원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이 물을 먹고 자랐을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격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말라 이 우물 생각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 블레셋에 점령당해 더구나 군 진영이 거기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때 다윗의 으뜸가는 세 용사들은 다윗의 그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싶어 길을 나섰습니다. 

이처럼 충성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 얼마나 애타실까? 하나님 얼마나 원하실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고 시원하게 해드릴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잠25:13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충성된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민12:6-8에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충성은 말씀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그 말은 지금 당장 물을 먹겠다는 뜻도 아니고 부하들에게 당장 물을 떠오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어떤 대장이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고향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고 자기의 부하들을 적진에 보내겠습니까? 그런데 세 용사는 다윗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담았다가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이처럼 충성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듣지 않고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듣습니다. 충성된 선지자 사무엘도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충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충성된 신하는 주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지 않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마음에 담고 잊지 않는 것이 충성입니다. 

4. 충성은 작은 일조차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큰 일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고향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시 다윗이 물이 없어 죽어가는 처지도 아닙니다. 단지 시원한 고향의 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명의 부하들은 그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주인의 소원을 이루어드리자고 나섰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충성은 큰일만이 아니라 작은 일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이니 작은 일이라고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다가 성공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어느 동네에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까지 깨끗이 닦아놓았습니다. 아무리 머슴이어도 남자 머슴이 요강까지 닦지는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오산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독립운동가요 교회의 장로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큰일만 아니라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5. 충성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세 명의 용사는 다윗의 말을 듣고 물을 구하러 떠났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 왕복 100리 길인데 물을 얻기 위해서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다윗이 허락하겠습니까? 

이처럼 충성은 말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떠들며 일합니다. “나 합니다. 보아주세요.” 하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였으니 이 땅에서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소리치며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6. 충성은 그분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으면 능력이 몇 배가 된다고 합니다. 얇은 2mm 베니어합판을 접착제로 두 겹으로 붙이면 하중을 8배나 더 견딘다고 합니다. 세 개를 합하면 무려 15배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세 용사는 나름대로 다들 능력 있는 용사입니다. 요셉밧세벳은 800명이나 되는 적을 물리친 장수였습니다. 엘르아살은 불레셋과 전쟁할 때에 손이 칼에 붙기까지 적을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삼마는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사람들이 다 도망을 쳤지만 홀로 남아서 적을 막아낸 장수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훌륭한 영웅들이었지만 자기 공만 세우려 하지 않고 무엇이 다윗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합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진정 충성된 사람은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면 그 길을 택합니다. 나 혼자보다 함께 함이 더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나의 기득권도 기꺼이 포기합니다. 무엇이든지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못했어도 다른 사람이 주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7. 충성은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그만 두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면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물을 길으러 갔을 때 출발부터 돌아올 때까지 적군과 계속적인 충돌만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진을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웠겠지만 물을 길은 후 뚫고 나오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독 안의 쥐와 같이 되었으니 수천 명의 적군이 그들을 에워쌌을 것입니다. 가로막는 장애물과 창칼이며 날아오는 화살과 쫓아오는 병거, 그래도 그들은 그 일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다윗 왕을 위해 물병을 놓치지 않으려고 움켜 쥔체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이들의 승리는 자신들이 무술이 아니라 왕을 향한 충심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어떤 난관에서도 그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 따라 상황 따라 변하는 반짝 충성은 충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칡을 볼 때마다 정몽주와 이방원을 떠올리면서 단심가와 하여가를 읊조립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 사이에서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두 사람의 시조를 아시죠? 

먼저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를 들어봅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다음은 이방원의 하여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면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없어야 합니다. 

미국 서부에서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나귀와 같이 묶어 놓는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말이 콧방귀를 뀌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나귀를 끌고 다닙니다. 나귀를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며칠 뒤에는 말이 지칠 대로 지쳐서 나귀가 말을 끌고 옵니다. 처음에는 말이 나귀를 우습게보지만 나중에는 나귀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당나귀의 인내심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충성한다면서 망아지처럼 하면 안 됩니다. 별 일 없을 때는 혼자 충성을 다하는 것같이 소리치다가 진짜 충성할 일에는 뒤로 숨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은 기분 따라 감정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이란 순경이든지 역경이든지 변함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엡6:2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8. 충성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 용사는 가장 소중한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 물을 감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며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귀한 목숨을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깝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자랑 같지만 저는 일생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충성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마음은 물질도 청춘도 생명도 하나님 앞에 아깝지 않습니다. 아깝다면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자기 신에게 충성하려고 갠지스 강에 자녀를 수장시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강둑에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선교사는 이를 만류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한참 후 그 여인은 둘 중에 건강한 아이는 물에 빠뜨리고 약하고 병든 아이만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당신들은 당신의 신에게 병들고 약한 것을 드리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님은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답니다. 이교도들도 자기 신에게 이러한데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몸과 마음과 재물과 목숨 드려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본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충성이란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주님의 마음을 존중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고, 나타내지 않고 조용히 행하며, 그리고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하든지 기뻐하고 지속적이며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충성된 세 용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