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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에서' 교회와 '밖으로' 교회 (행 8:1-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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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교회와 '밖으로' 교회 (행 8:1-4, 13:1-3)
  

제가 한 십여 년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LA근교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현대식 대형교회의 시조라 할 만큼 잘 알려진 교회였는데, 특히 예배당 건물이 소문에 듣던 것 이상으로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그 화려한 공간 안에는 빈자리들이 너무 많아서 겨우 반을 채웠을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주일예배의 설교라는 것도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라는 주제로 일관되었는데, 마치 무슨 '자기 개발'에 대한 세미나 비슷했고 '복음'의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유명한 교회의 주일예배는 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그저 '썰렁한' 분위기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처음에 시작될 때에는 '폭발적'인 부흥을 하던 소위 '대형교회'도 나중에는 그야말로 '용두사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들 중에서 첫 교회는 물론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그 예루살렘교회에 이어서 두 번째로 유명해진 교회가 안디옥교회인데, 이것은 소아시아 지역 비시디아의 안디옥이 아니라 수리아의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졌던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유대인 평신도들이 처음으로 헬라인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함으로써 세워지게 된 교회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교회는 아무래도 유대주의적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보수적이면서도 폐쇄적인 면까지도 있었지만, 안디옥교회는 복음이 훨씬 더 개방적으로 전파되었고 바로 그 안디옥교회 교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교회들 사이에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모든 신약 교회들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는 정말 뜻밖에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급속히 쇠퇴하게 된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마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라는 말씀처럼 부흥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제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하며 기다려왔던 '총회선교 30주년기념 감사선교대회'를 맞이하게 된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교회를 무슨 이유로 부흥시켜 주실 수밖에 없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안에서 나누기만 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쓰실 이유가 없는 까닭에 절로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부터 4절의 말씀에 "1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기록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첫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사실상 최초의 '대형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순절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단 하루 만에 '믿는 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는'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부흥을 이룬 교회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초창기에는 아무도 그런 예루살렘교회가 곧 쇠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만뜻밖에도 예루살렘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맙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직후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무서운 박해가 계속되었던 까닭에 예루살렘교회 교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일이기도 했습니다.
즉 비록 핍박은 당하더라도 '흩어지지는' 않도록 하나님께서 뜻하셨더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섭리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신약의 첫 교회요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섬기고 있던 교회를 그토록 빨리 흩어지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 '3천 명 교세'를 이룬 예루살렘교회는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중심의 신앙을 배우고 익혔으며, "서로 교제하는" 성도 간의 교통이 활발했고, "떡을 떼는" 은혜로운 성찬예식도 매주일 시행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개인 경건생활 역시 뜨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확고부동하게 세워갔으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등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받는'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교회 부흥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니, 아마 예루살렘교회의 모든 사도들은 아주 신이 나서 사역하고 있었을 것이며 모든 교인들은 자기네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일로를 달리면서 그야말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존속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루살렘교회를 계속 발전시켜서 명실 공히 힘 있는 모교회로 쓰시면 여러 모로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루살렘교회를 그처럼 빨리 쇠퇴하게 만드셨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처럼 '완벽하게 보이는' 예루살렘교회에는 실제적으로 결정적인 '결핍 사항'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교회의 창립멤버들은 소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오순절의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에 힘썼던 "일백이십 명"의 무리 즉 저 유명한 '120문도'였습니다.
그 중에 사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평신도들도 예수님의 승천까지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명령 곧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至上)명령'이라고 부르고 있듯이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된 신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인용했던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 47절까지에 기록된 예루살렘교회의 '왕성한 활동' 중에서 이 '선교'에 대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가장 활발했던 사업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구제'였습니다.
우선 초창기의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집이나 밭을 팔아서 통째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등 '큰 헌금'을 바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헌금의 대부분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구제사업에 다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구제 활동이 얼마나 규모가 크고 일이 복잡했는지는 바로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대로 사도들이 교회 내에서 "공궤" 즉 구제사업을 "일삼아" 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교회의 경상비 보고서는 온갖 종류의 '구제헌금' 항목들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 바로 그 때문에 '일곱 집사'를 선출하여 그 일을 대신 맡기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구제란 교회가 해야 할 선행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고 특히 예루살렘교회에는 가난한 교인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 필요성도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루살렘교회가 오직 구제에만 거의 전력을 쏟아 붓다시피 하는 가운데 선교에는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선 이방 지역에 대한 배타감부터 확실하게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고넬료 같은 이방인을 전도할 때에 사도 베드로조차 저 유명한 '보자기의 환상'이라는 특별계시를 받고 나서야 겨우 그의 마음이 열리게 될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처럼 '안에서 자기네들끼리만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도록' 제자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시려는 구속사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께 있어서 예루살렘교회란 이 시점에 와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판단과 결정은 처음에 읽었던 본문 4절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교회가 '보내어서' 선교를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아예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셔서' 이방 지역에서 전도하게 만드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안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물론 '구원받는 신자'들을 찾고 모으는 것이지만, 일단 그렇게 모이고 나면 이제부터는 자기네들끼리 '성도 교제'와 '사랑의 봉사'를 주고받는 일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제'라는 것은 꼭 교회에 모이지 않아도 오히려 세상의 사교단체나 문화모임을 통해서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저는 어느 교회의 장로님께서 자기네 교회는 경상비의 반을 구제에 쓴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쁜 일'은 결코 아니지만, 만약 구제가 교회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무엇이 있으셨겠습니까?
목사 대신에 사회사업 전공자들만 있으면 될 것이고 교회 대신에 온갖 자선단체들만 세워지면 오히려 더 잘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무슨 '사회사업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령 단체'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자선사업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도와 선교의 일꾼'이 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선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바로 '자기네들끼리 안에서 나누어 먹기만 하는' 교회이며, 저 유명한 예루살렘교회가 바로 그 때문에 그처럼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던 사실을 꼭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밖으로 보내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하여 계속 부흥시켜 주시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첫 신약교회라는 명예를 누리고서도 단 한 명의 선교사도 파송하지 못한 가운데 '흩어지고' 있을 때에, 그 대신에 저 멀리 북쪽 수리아의 이방 지역에 훨씬 늦게 세워진 안디옥교회가 첫 선교사를 파송하는 영광스러운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19절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20절에 나오는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도 바로 19절에 나오는 '흩어진 예루살렘교회 교인들'로부터 전도를 받은 자들로서 구브로와 구레네에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따라왔습니다.
즉 안디옥교회는 '헬라인 교인'들이 주축 멤버가 된 첫 '이방인 교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교회로 파송하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 당시 이미 대부분의 교인들은 흩어지고 말았지만 사도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로 앞의 10장에 기록된 '고넬료 전도'와 '베드로의 보자기 환상'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들 역시 전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막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나바는 그 사이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그 즈음에는 자기 고향인 다소에 가 있던 바울을 불러서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일 년 동안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양적 부흥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정도로 놀라운 질적 성장까지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안디옥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뿐 아니라 그 외에도 여러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함께 사역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하던" 중에 성령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공적 예배를 드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즉 안디옥교회의 사역자들은 금식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던 중에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보다 로마제국의 중심 국가들에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고 헬라 문화와 각 나라 민족들이 많이 섞여 살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던 예루살렘교회와는 달리 세계를 훨씬 더 넓게 보고 빨리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네 안디옥교회가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신 사명에 있어서 아주 유리한 조건을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자체 성장에만 몰두하지 아니하고 자기 교회 밖으로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확장시키는 일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고, 그래서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행한 이 첫 선교사 파송은 선교야말로 '교회가 반드시 공적으로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기에 앞서 우선 기도로 준비했을 뿐 아니라 또한 안수식을 통하여 그들을 공식 선교사로 임명하는 순서 역시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나중에 14장 26과 27절에 나타나는 대로 제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 안디옥교회 앞에서 그들의 사역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사의 첫 선교 활동은 자기 혼자서 무슨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하는 개인플레이가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께서 교회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지시하셔서 발동되고 시행된 완벽한 팀플레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교회가 그처럼 선교만 한다고 해서 구제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상 안디옥교회는 구제사업에 있어서도 예루살렘교회보다 더 수준이 높았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11장 27절부터 30절에 보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서 "유대에 사는 형제들" 즉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이 안디옥교회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그 유대인 신자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전달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구제'라 해도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루살렘교회의 구제사업은 자기네 교회 '안에서' 나누어 주기에만 바빴지만, 안디옥교회의 구제사업은 '밖으로' 다른 교회에 보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밖으로' 선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구제헌금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귀중한 생명의 복음까지 '멀리'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교회는 안에서 멈추어 버리고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밖으로 또 밖으로 내보내는 교회가 되었을 때, 초대교회사에서 그 두 교회의 위상은 서로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초대교회의 모교회로서의 지위와 권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실제적인 힘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오히려 이방 지역의 후배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사에 의하면 그 이후에 예루살렘교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당시 요단강 건너편 지역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후 135년에 소수의 교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는 되었지만 그때는 예루살렘교회라는 존재 자체가 초대기독교사에서 모든 의미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랜 후였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초창기에 가지고 있던 그 영적 주도권을 차츰 넘겨받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부로서 '하나님의 짐을 진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주후 107년 경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순전한 떡으로서 바쳐지기를 원한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로마로 끌려갔던 유명한 순교자 익나티우스 역시 바로 이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처럼 많은 사도들이 지키고 있었던 예루살렘교회는 복음을 태동시킨 교회로서의 역할로만 끝나고 말았지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던 안디옥교회는 소아시아 지역과 마게도냐와 로마제국 산하의 각 도시에서 택자들을 불러 모으고 교회들을 우후죽순처럼 세우는 선교활동의 기지로서 엄청난 입지를 굳히며 크게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작을 때부터 그 눈이 오직 세계선교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비록 단 한 명이라도 선교사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었으면 절대로 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그 순간부터 선교 사역을 시작하고 추진해 나가야만 정말 더 큰 교회, 하나님께서 더욱 높이 들어 쓰시는 존귀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향교회 역시 바로 그와 같은 오늘의 '안디옥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경향교회는 여기 강서에 큰 성전을 짓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아직 초라한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에 이미 경향선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첫 해에 497명이었던 선교회 후원회원들이 지금은 7,200명으로 급성장했습니다.
  
1982년에 첫 해외선교사 1명을 파송했었지만 지금은 총 102명의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 약할 때부터 그처럼 세계 선교에 힘을 쏟은 결과 지금에 와서는 세계 각국에 183개의 선교지 교회들을 세우고 16,606명의 교인들을 모으게 되었으며 20개 곳의 고려신학교 분교들을 통하여 433명의 현지인 신학생들을 양육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경향교회 자체의 폭발적인 부흥까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누어 주는 교회'를 진정 기뻐하시며 앞으로 더 힘 있게 쓰실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안으로 '장자 기업의 축복'을 받는 족족 '세계를 받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에 전력 투자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오대양 육대주를 품는 선교의 모교회로 더 높고 크게 세워나가는 감격스러운 사명에 더욱 힘을 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작년 연말에 '2009년의 경향교회 10대 뉴스'를 선정할 때 경향문화사의 어느 직원이 제게 최종 선택을 부탁하면서 "올해에는 선교에 관한 소식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니까 정말 우리 교회의 주요 뉴스들의 태반이 다 선교지의 소식들이나 선교 사역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주요 뉴스에 선교에 관한 소식이 많게 된 것은 아주 잘 된 일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10대 뉴스' 중에 5개를 선교 소식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경향교회의 한 해 사역을 통하여 선교에 관한 큰 열매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경향교회의 역사에 선교에 대한 굵직굵직한 족적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기왕이면 우리 교회가 비단 '교회 10대 뉴스의 반'뿐 아니라 '교회 경상비 예산의 반'까지도 선교 사업에 쓸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서로 나누어 먹기에 바쁜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소용 가치가 없는 까닭에 아무리 처음에는 '폭발적인 대형교회'가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용두사미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약한 교회를 도와주고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의 식물을 물 위에 던질' 줄 아는 '밖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더 많이 쓰시기 위하여 더 크게 부흥시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 '총회선교30주년기념 감사선교대회'야말로 경향교회가 받은 그런 놀라운 축복의 결과를 실제로 목도하고 체험하는, 실로 감격스럽고도 기쁜 잔치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선교하는 교회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진정한 의미의 '큰 교회'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수적으로도 진짜 '대형교회'로 성장하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는 가운데 앞으로도 계속하여 '보내는 자'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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