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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사 5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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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사 55:6-13)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Gloria)”을 추구하는 일입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욥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고 하였습니다(욥 11:7-8). 하나님께서도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1. 신앙과 현실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입니다(엡 1:17). 그런데 때때로 성경의 약속과 상반된 현실에 부딪칠 때 마음에 갈등과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1)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한 특권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하나님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구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 특권입니다(롬 8:15).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7-8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약 1:5).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1:22).

2) 기도의 능력과 응답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신앙생활에 호흡과 같다고 말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내용도 이와 같은 기도의 삶을 특징짓고 있습니다(마 6:9-13). 성도가 생명이 위경에 처하거나 어떤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결사적인 기도를 합니다. 구약의 히스기야 왕은 중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십오 년이나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왕하 20:1-6). 오늘날도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를 합니다. 의학적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 주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도 신유의 은사가 특별한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아서 병이 나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3)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입니다.

야고보서 5:14-15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고, 믿음의 기도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 약속이 지켜지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병자가 있을 때 교회는 이를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해서 낫는 사람도 있지만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죽고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도 죽습니다. 무조건 기도가 만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 낙심을 하기도 합니다. 

2.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너무나 심오해서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11:33). 본문 말씀 9절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자기 기준의 신앙을 가집니다.

야고보서 4:13-14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내일 일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무능한 인간이 자기 생각대로 모든 계획을 다 세워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다 결부시키곤 합니다. 발람이 모압 왕 바락의 요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길을 가면서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허락받았다고 자신하였습니다(민 22:7-20).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신앙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약 4:15). 

2) 기대가 어긋났을 때 실망을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의 응답이 확실했습니다(약 5:17). 그는 ‘불의 사자’로 불릴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행사한 사람입니다(왕상 18:30-40). 그렇지만 엘리야도 자기의 기대가 어긋날 때 실의에 빠져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왕상19:4). 하나님의 약속대로라면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건재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칼날에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왕상 19:10). 성경은 우리가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약 4:3).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할 때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선한목적으로 구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고 이때 낙심하게 됩니다.

3) 신앙의 진위(眞僞)가 나타납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진위가 연단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7). 평소에는 신앙고백이나 열정적인 헌신이 돋보이는 사람도 환난이 오고 역경에 처하게 되면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만찬 석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죽는 데까지 같이 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달아났습니다(마 26:69-75). 욥의 가정에 재앙을 만나 재물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 그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욥 2:9-10). 환난과 시험은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드러나게 합니다.

3.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입니다.

믿음이 좋거나 기도의 은사가 많은 사람들 중에도 숨겨둔 상처를 간직한 채 평생 동안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 고통 속에서 남이 알지 못하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하게 합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40년간 광야 여행의 힘든 과정을 다 거치고도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요단강 동편 모압 땅의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강 건너 여리고 평원과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눈으로 보면서 자기도 그 땅을 밟아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신 3:23-28). 모세는 그의 평생을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전적으로 복종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가나안 입국의 소망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좌절되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저가 못다 이룬 가나안시대의 환상이 여호수아에게 넘어 갔지만 불평 없이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2)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남이 모르는 상처와 아픔이 있었습니다. 밧세바의 일로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가 낳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베옷을 입은 채 일주일동안 금식하며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단장을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민망히 여긴 신하들이 아이가 살았을 때는 그토록 슬퍼하고 울더니 죽은 다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그때 금식한 것은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까 생각해서 그랬고 지금은 죽었으니 금식한들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삼하 12:22-23).

3) 다른 차원의 기도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도록 신체적인 악조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7).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이것을 자기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기도가 거부당하고 그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바울은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하셨습니다(9절). 

그것은 사실입니다(딤전 1:12-13).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자를 통해서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9절). 그 가시의 아픔이 있어서 자기의 인격이 겸손을 유지하고 평생 동안 하나님의 능력이 제게 머물게 되는 원리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가시를 안고 사는 것이 결코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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