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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살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행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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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행 3:1-16)
 

오늘 상고할 사도행전 3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 통해서 일어난 기적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는 교회가 막 태동된 때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 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것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곧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에 기도를 드렸는데, 이를 요즘 시간으로 말하면 각각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에 해당합니다. 

두 사도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 문의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미문(美門)이라고 일컫는 문을 지날 때였습니다. 미문 곁에 앉았던 걸인이 두 사도를 보고 구걸했습니다. 가엽게도 그 걸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였습니다. 그는 제 발로는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곳까지 메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걸인이 구걸하는 것을 본 두 사도는 걸음을 멈추고 섰습니다. 그 걸인을 주목하고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두 사도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니, 사도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두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 날, 두 사도는 이 이적을 보고 놀라는 백성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것과 그의 이름으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하게 되었다고 증거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를 살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 째로,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다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고로 다리 골절상을 입고 기브스를 해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저의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걸인과 같이, 전혀 걸을 수가 없다면 단지 외출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맙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가는 극히 사적인 일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그 불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전 미문 곁의 이 걸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므로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팡이나 걷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기구 따위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성전 미문까지 온 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신세입니다. 앉은뱅이가 제 힘으로 서거나 걷거나 뛸 수 없듯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으로 완전 무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디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 주셨으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인식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피조물들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해나 달이나 별들을 숭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체를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고대로부터 인류에게 보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이같은 인간들의 실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우상 숭배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신론자들은 말하기를 “신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과학 지식을 하나님을 부인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달나라를 다녀오고 화성에 우주선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죄와 허물로 영이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재간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하신 로마서 3장 10절로 11절의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들은 영적 앉은뱅이여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이 세상에는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선행은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위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죄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성경은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말씀합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자행합니다. 악을 행하되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행합니다. 이는 자연인은 날 때부터 타락한 본성을 지닌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3절 이하에는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대부분 사람의 본성을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자기 속에 있는 천성을 깨달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완전한 차원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유교도 비슷합니다. 공자는 교육을 통해서 타고 난 선한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완전히 어긋납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 역시 본질적으로 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땅의 것만 추구합니다.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돈을 구걸하는 데만 힘썼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은과 금은 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성취와 세상 지혜와 쾌락 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며 사는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홍수에 의해 멸망했듯이, 말세의 인류는 불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한 세상이 되었을지라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로 사람의 상태는 똑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구원이 절실한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성도들은 세상적인 방법에 의존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미문 곁의 앉은뱅이 걸인이 손을 내밀어 구걸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두 사도가 세상적인 수단, 방법,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근거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과 잠잘 집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요, 이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은과 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은과 금에 얽매여 살지 않았습니다. 걸인이 구걸했을 때, 두 사도는 수중에 한 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뿐 아니라, 사도들은 하나같이 세상 재물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두 벌 옷도 갖지 않았으며, 전대를 차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만 대접을 받습니다. 어느 코미디언의 말과 같이,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부자만 대접받고 출세한 사람들이 특권을 독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직장과 사업을 포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가 되고 성공할 기회를 자진해서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으로 보면 두 사도는 패배자 취급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했던 사도들의 삶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이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떡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줄 알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떡에 의존해서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신 후 주리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몇 끼나 굶어 보았습니까? 고통 중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굶주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이나 스무날도 아니고 무려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셨으니, 광야에 널려 있는 돌멩이들이 다 떡덩이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말에 대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신 말씀을 “사람이 떡으로도 산다”는 뜻이 아니라, “떡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떡이 없어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 동안을 곡물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습니다. 또 그들은 샘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을 올바로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은과 금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룩하였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위 무속적 기복 신앙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진리를 흐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번영 신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주장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 믿으면서도 가난하게 살고 성공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잘못 믿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사탄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번영 신학 앞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설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떡을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은 떡을 얻어먹고 배가 부르면 주님을 떠나갈 것입니다.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계속 주님을 섬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은 직장 생활도 하지 말고 사업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으로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조건을 중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순수한 히브리인의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율법을 철저히 지켜 행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자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자 지금까지 소중히 여기고 자랑하고 의지하던 것들이 더럽고 하찮은 배설물과 같이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가 물질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더라도 물질에 의존해서 살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앉은뱅이 된 사람들을 향하여 베드로와 요한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힘입어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걸인은 기대로 인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도가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까지 지켜야 할 보화가 있을까요? 온 천하를 다 얻을지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닙니다. 교회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지키느라 순교의 제물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난날 영적으로 앉은뱅이 되었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신생(新生)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 영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대로,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구제 불능의 인간성이 새롭게 변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나자 귀신에게서 놓여났으며 주님을 위해 일평생 헌신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죤 뉴톤은 노예 상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었고 수많은 은혜로운 찬송가를 작사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본디 소문난 깡패였으나 예수 믿고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돈만 아는 수전노였으나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는 선량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살하려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이 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3:8). 이천년 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오늘도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거듭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의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죄와 구습에 눌린 자를 자유케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하신 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미문 곁의 걸인은 자유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미문까지 오는 데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했을 때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와 마귀의 사슬에 매인 인생들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인해 죄의 멍에에서 해방되었고 영적 무능이 해결되었습니다. 미문 곁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 된 성도들은 선을 행할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세상일을 위해서만 살던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며, 주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에게 거룩한 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 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딜 가든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들은 구걸하는 걸인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무언가 줄 것이 있기에, 또 기꺼이 그 사람을 도와 줄 용의가 있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 앉은뱅이 상태에 있는 불신 이웃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보배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해 주어 저들도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날 두 사도가 행한 기적을 본 많은 사람이 두 사도의 증언을 듣기 위해 솔로몬 행각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1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로 인해 자기들이 영광을 받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자기들의 경건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였고,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 받은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팔레스틴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요,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헐몬산의 눈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와서는 요단강으로 흘러나갑니다. 그 결과 갈릴리 호수의 물은 사시사철 맑고 깨끗하여 온갖 물고기가 서식하는 생명의 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해는 요단강을 비롯한 여러 지류에서 받기만 합니다. 한 번 사해에 흘러 들어온 물은 더 이상 다른 데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 결과, 사해는 염도가 너무나 높아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또한 받은 은혜를 가지고 헌신하고 나누어줌으로 늘 참신하고 넉넉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했습니다. 두 사도를 통해서 역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던 두 사도와 같이, 성도님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 앉은뱅이 상태에 있는 불신 영혼들을 일으켜 생명의 길로 인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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