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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하는 공동체 (룻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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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는 공동체 (룻 4:13-17)


저는 구약과 룻기에 관한 책들을 약 여남은 권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대부분 '룻기는 룻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사기'가 룻기의 바로 앞에 있는데, 룻기 1장 1절은 '사사들의 치리하는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룻기의 기록 시기가 사사 시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 앞에 있는 사사기를 보면 계속 반복되는 실수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살 만하게 하시면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일으켜 징계하시면 다시 '아이구, 죽겠다'면서 하나님께로 나오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켜서 또 회복시켜 주시는 내용이 사사기에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수없이 반복되는 배도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사사기를 읽어보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암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자기 소견대로 했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룻기 다음에는 '사무엘 상․하'가 자리하면서 이상적인 왕 다윗이 들어서고 단일 군주제로써 아마 이스라엘과 유다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기록이 있습니다마는, 룻기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룻기는 혼란스러운 역사와 조금 질서가 잡힌 역사를 잇는 연결고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사기와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배도와 불신앙으로 가득하고 혼란스러운 책 뒤에 나오는, 어떻게 보면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고 쓰레기 더미 위에 피어난 꽃과 같은 향기를 발하고 있는 책이 룻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이방(모압) 여인 룻이 그의 굳건한 믿음 때문에 여호와의, 메시아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오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룻기를 읽으면서 저와 여러분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룻기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축복하는 공동체'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I. 룻기의 구조 

룻기는 아주 재미있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4막으로 된 연극'이라고 구조를 밝힌 적도 있습니다. 1장, 2장, 3장, 4장이 각각 한 막씩이고 한 막이 각각 세 장으로 된, 그래서 4막 12장의 연극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본문 속에서 룻의 믿음은 기본이고 룻기 전체에 흐르는 축복하는 분위기에 대해서 같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4장은 굉장히 복스럽고 아름답고 화기애애하고 기쁨이 넘치는 장면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4장 13절에,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여인들이 몰려와서 나오미에게는 손자가 되지만 아들과 같다고 하면서,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대가 끓어질 뻔 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구나.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너의 자부, 룻이 낳은 아들이라. 노년에 너를 봉양할 자가 태어났다"고 축복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낳았는데도 나오미가 낳았다고 하면서 이름을 '오벳'이라고 짓고 있습니다. 원래 룻이라는 이름은 '동반자'라는 아주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보아스'는 '아주 위력이 있는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오벳'은 '섬기는 자(봉양자)'라는 말입니다.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었는데,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자기 본토 친척 친정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이름은 '불성실하다' 또는 '불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제 1 막 : 죽음과 공허함 

오늘 이야기의 발단은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유대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주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신앙인의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다스리던 시대에 베들레헴 지역에 살았던 그는 그곳에 흉년이 들자 모압 땅으로 갔어요.  이 모압은 동편에 있는 땅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가까스로 구원을 받은 후에 술에 취한 가운데 그의 두 딸과 동침해서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입니다.  아주 올바르지 못하고 불명예스러운 가문의 수장들이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들어올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같이 여김을 받았는데, 엘리멜렉이 그 모압 땅에 가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1장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엘리멜렉의 아내가 되는 나오미가 남편을 잃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방 땅에서 이방 여인들을 두 아들의 며느리들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 아들들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허탈함과 암울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룻기 1장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모압에 거한지 10년 후에 나오미는 '베들레헴 땅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이제 흉년이 지나가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 소문을 접한 나오미는 이제 짐을 싸들고 베들레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나섭니다. 같이 따라온 두 며느리를 향하여, 나오미는 1장 8절과 9절을 통해 이렇게 축복합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방 여인들, 모압 족속에서 얻은 두 며느리에게 "이제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친정으로 가서 거기서 새로이 남편을 얻어서 여생을 편안히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울면서 입을 맞추고 그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남편도 없고 낳을 아들도 없다. 지금 남편을 얻어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 아들이 클 때까지 너희들이 기다리겠느냐?"하며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둘째 며느리는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첫째 며느리 룻은, 동반자 룻은 16절과 17절에 유명한 그의 신앙 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동반자예요. 어머니가 가는 그곳에 자기도 가겠다고 합니다. 죽음 이외에는 어머니와 자기를 갈라놓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요지부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룻을 볼 때,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고 본토로 가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 여인이었지만 어찌 이 놀라운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참 놀랍습니다. 아마 나오미와 그의 남편이 죽고 아들마저 앞서 보낸 후 고난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홀로된 이방인 며느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 자기 고향으로 돌아 왔어요. 19절 이후에 보니까, "아! 나오미가 돌아온다. 나오미가 돌아온다"며 온 동네가 떠들썩해서 나와 가지고 나오미를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며느리 룻도 왔단다" 하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나오미는 자기의 심령 깊숙이에 있는 아픔을 얘기합니다, "나를 나오미(기쁨)라 하지 말라.  차라리 나를 마라(고통, 괴로움)라 하라.  왜냐 하면 내가 이방 땅에서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으므로 남편도 잃게 되고 두 아들 마저 잃게 되었다.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라." 자기의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을 말하며 차라리 '마라'라고 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오미와 룻을 이 조그만 공동체 전체가 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1장은 남자들은 다 죽고 두 여인만 남아있는 이 가문의 암울한 모습이 있습니다.  죽음과 상실감과 공허감만 남아있는, 정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 뿐 아니라 소망이 없고 낙심과 주저앉음 밖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제 2 막 : 추수하는 들에서 보아스를 만나는 룻 
 
그런데 2장에서는 시어머니를 따라온 룻이 이제 보리를 베는 들판에 가서 보리 이삭을 줍겠다고 나섭니다. 때가 보리를 베는 추수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가서 보리 이삭을 줍던 룻은, 나오미가 시집 온 엘리멜렉 가문의 먼 친척, 그리고 아주 유력하다고 했으니 부자이기도 하고 신앙심도 좋았던 것 같은 보아스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뒤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쨌든 일하면서 보니까, 일꾼들도 보아스를 축복하고 그 보아스도 일꾼들을 축복합니다. 보아스도 이미 룻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어요. 와서 "저 소녀가 누구냐?" 하니까 "여차여차한 나오미의 며느리 룻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의 며느리 룻을 보아스가 2장 12절의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2장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룻을 위로하고 축복하고 있는 보아스를 발견합니다. 자기 종들에게 "일부러라도 다 걷지 말고 뒤에 뿌리라"고 하면서 그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많이 거두어서 집에 갔더니, 그 시어머니가 "네가 누구 밭에서 일을 했느냐?  누가 너를 만났느냐?"고 묻습니다. 보아스를 만났다고 하니까 "여차여차해서 보아스는 우리 가문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나오미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통하여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고 축복한 나오미는 보아스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도 20절을 통하여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보아스를 위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3. 제 3 막 : 타작 마당의 보아스에게 룻을 보내는 나오미 

그런데 3장에 가니까 나오미가 이제 뭔가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룻에게 "목욕도 깨끗하게 하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가서 여차여차해라.  내가 이제 너에게 평안함을 주고 가정을 꾸리게 하고 남편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권 속에서는 조금 생경한 내용입니다마는 조금 그 구약적인 배경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약에는 결혼의 대표적인 모델로 세 가지가 나타나 있는데, 첫 째는 야곱의 경우입니다. 야곱은 오늘날로 하면 연애대장이었어요. 그래서 예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돌진하는 것입니다. 장인어른에게 가서 달라고도 하고, 뭐든지 하겠다고도 하고, 여하튼 못 말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점잖고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장가도 못 갈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다 챙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택했는데, 중매결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룻기에 나오는 룻의 경우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어요. 즉, 시어머니가 일을 꾸미고 룻이 노적가리 마당에 가서 보아스에게 가서 프로포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프로포즈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문란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도 룻에게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서 동네 사람이 다 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고 팔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 사상을 우리나라가 채용한다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토지는 여호와의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꾸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에 들어가서 제비를 뽑아서 가문대로 땅을 차지했지마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예외적으로 가문이 기운다든지 경제적으로 어렵다든지 할 때에는 사고 팔 수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완전히 등기이전이 되는 사고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50년마다 희년이 돌아오는 '희년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희년까지 남아있는 기간 동안 그 땅에서 날 수 있는 소출을 계산해서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그 땅을 사용할 수 있지마는 아무리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희년이 돌아오면 다시 다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속한다' 혹은 '땅을 무른다'고 하는데, 영어로는 'redeem'이라고 합니다.  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죄의 포로 된 우리를 구속했다는 사상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가문의 남자들이 다 죽게 되어 이제 며느리나 여자들만 남게 되면 그 가문의 가까운 순서대로 남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자기 형이 죽게 되면 그 아우가, 혹은 동생이 죽게 되면 그 형이 그 미망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을 형이나 동생의 이름으로 호적함으로써 그 형이나 동생의 자산을 잇도록 하고, 그래서 계속 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적인 용어로 '역연혼(Levirate marriage)'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 하나인 보아스와 룻을 맺어주려고 하는 시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이 속에 있고, 그 시어머니의 말을 끝까지 순종해서 프로포즈하는 룻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아스가 이제는 그 일을 철저하고 주도면밀하게 하려고 합니다. 보아스는 아주 경우가 바른 사람이에요. "나보다도 더 가까운 친척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에게 먼저 얘기를 해서 그 사람이 한다거나 안 한다거나 가부간의 결정이 있으면 그 다음에 내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그 얘기를 듣고는 "됐다.  그가 이 일을 이룰 때까지는 쉬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확신하게 됩니다.  

4. 제 4 막 : 생명과 충만함 

4장을 보니까,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그 사람이 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장로들을 다 모아 놓고서 이제 얘기합니다, "네가 여차여차하니까 네가 룻과 결혼해서 그 아들을 낳게 되면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그 아들을 주고 그 가문을 잇게 하고 상속하게 해야 한다."  처음에는 하겠다고 하던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것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지 모르니 나는 못 하겠다"고 합니다. 상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럼 됐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장로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보아스가 "룻과 결혼해서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게 하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그러자 장로들이 이러한 결정을 한 보아스를 보고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4장 11절과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게 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백성과 장로들이 이러한 결정을 한 보아스와 또 그와 결혼하게 된 룻, 그 가정을 축복하고 있어요. 룻이 라헬과 레아처럼 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어요. 여러분,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는 다말의 시아버지였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이었던 것 같은 다말은 이 집안의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유다와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렇게 메시아 가문에 들어온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즉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대를 이었다는 얘기는 말꼬리가 될 수도 있고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당연히 축복하고 있어요, "다말이 유다를 통해서 낳은 그 베레스의 집안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로 그 집안에 보아스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로 오늘 4장 13절부터 17절까지의 이야기가 이 축복의 클라이맥스입니다.  14절이 그 클라이맥스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남의 집 얘기지만 놀랍게 축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II. 본문 묵상 

룻기는 룻의 요지부동한 신앙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가문에 들어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축복하는 공동체'라는 제목을 정하면서 나오미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축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좌절과 상실감 속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속에서 축복하고 있는 나오미를 발견하고, 이 상황 속에서 나타난 나오미의 모습을 통해 다섯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우리 그리스도인은 축복(복의 통로)이며 교회는 축복하는 공동체입니다. 

첫 째, 우리는 축복의 근원이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정체감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입니까? 룻기 4장을 보니까, 축복하고 축복했을 때 그 모든 축복들이 결국에는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놀랍고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구약 전체를 통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축복하는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께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 그를 부르신 목적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른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되도록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과 같다고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바로 그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있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아멘!!  확실합니다.  

여러분, 바로의 학정에서 가장 작은 민족, 보잘것없는 민족 히브리 민족을 모세의 손을 통해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보잘것없고 가장 연약하고 수도 적은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열방의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을 보면, 모세를 통하여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원래 백성의 죄를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축복하는 기능이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나 민족을 부르신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온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이 복을 받도록 하는 복의 통로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축도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제사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 때에 그 축복을 비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사장에게만 이 축복권이 제한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레위 족속에게만 하나님을 섬기는 권한이 축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이스라엘을, 히브리 민족 전체가 온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이것이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이들에게는 이것이 다 축복권으로 주어졌다고 신약성경에 다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10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인 제사장론'이라는 것이 그냥 론(論)이나 신학적인 원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축복하는 공동체인 것이에요. 온 열방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10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 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왕 같은 제사장단(Kingly Priesthood)'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고로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교회는 축복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복을 얻도록 하는 통로가 되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복을 비는 자들입니다. 원래 이 복을 빈다는 '바라크'라는 히브리말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7장 7절에,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복을 줄 수 있어요. 우리가 뭔데 복을 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지위로 우리를 불러 주셨어요. 우리는 이미 다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리고 그 복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즉 구원이 최대 최고의 복입니다(비교. 로마서 8:32). 우리는 이미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극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축복해야합니다. 

두 번째,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어려워서 어찌 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축복할 수 있고 또 축복해야만 합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했어요? 나오미가 남편도 잃고 이제 며느리 둘만 남았을 때, '며느리라도 데리고 가야, 일할 수 있는 노동인력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1장 8절과 9절을 보면, 그들에게 복을 빕니다, "친정에 가서 남편을 얻어 편안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룻은 그 말을 듣고서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고 했습니다.  

2장에서도 이제 나오미가 "누구를 만났느냐?"고 하니까 보아스를 만났다고 해요. 나오미는 "너에게 은혜를 베푼 그를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를 원한다"고 복을 빌었어요. 그러나 그때 나오미는 복을 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룻의 믿음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지마는, 복을 빌 수 없는 상황에서 복을 빈 나오미로 인하여 이 암울했던 두 여인의 앞날이 하나님께서 복을 놀랍고 넘치게 부어 주시는 날들로 바뀐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먼저 생각하고 시어머니는 자기 며느리를 먼저 생각하고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나오미는 축복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축복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자녀들을 축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감사하며 축복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남편을 축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를 축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고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께서 너에게 얼굴을 비추사 은혜 베푸실 줄을 내가 믿는다"고 축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목사님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성도님 모두의 가족의 이름을 부르면서 축복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성도들이 서로의 가정과 자녀와 사업을 위하여 축복하는 공동체 되시길 바랍니다. 

  
3. 그 축복은 하나님의 섭리로 환경과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일단 축복을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그러면 그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섭리하셔서 그 환경을 바꾸시는 줄 믿습니다. 이 룻기를 보세요. 그 암울했던 나오미와 룻에게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보아스라는 건장한 남편을 얻게 하시고 아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4장을 보세요. 죽음과 허탈감 속에서 시작했던 1장의 스토리가 4장에서는 생명이 회복되고 기쁨이 넘치고 충만함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할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환경을 바꿔 주시는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6장 28절을 보면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하라고 했어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도 축복하라고 했거늘 하물며 원수지간도 아닌 우리가 어찌 서로 축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공동체는 서로 축복하고, 우리 공동체를 뛰어넘어서 이방인들까지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조그만 간증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제가 어렵게 미국유학을 갔었을 때 일입니다. 별로 많이 준비하여 가지 못했습니다. 컴퓨터도 사고 몇 군데 필요한 곳에 쓰니까 가져간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차가 필요한데도 차를 못 사고 있었는데, 마침 필요한데 한미 전도대회에서 제가 통역으로 도와드렸던 분이 찾아 오셔서 중고차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런 중에 목회를 하게 되어서 목회하러 돌아다니니까 차가 견디지 못하고 2년만에 차가 죽어버렸어요. 변속기가 망가졌습니다.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대부를 해 주어서 차를 사게 되었습니다. 차를 잘 아시는 목사님 한 분에게 부탁을 해서 차를 샀는데 사자마자 고장이 났어요. 일주일 동안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고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낙심을 하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이제는 대리점의 서비스 센터에 맡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목사가 아는 것은 우리 인간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분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 차도 만든 데에다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리점에 갖다 맡겼습니다. 

옆에서 그 목사님은 머리를 긁으시면서 굉장히 못마땅하신 듯이 보시고, 제 생각을 만용으로 생각하셨어요. 왜냐하면 그 공장에서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도 한 시간에 65불을 청구하는데, 여섯 시간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자기들도 모른답니다.  여하튼 조그만 꼬리표 하나만 받고 맡겼어요. 

맡기고 와서는 여기까지 보내셨는데 주님이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제 딸이 "아빠 엄마, 내가 축도할 게"하더라 구요. 축도가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한 것 같아요.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실 축도는 목사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제사장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에게 축도권이, 목사에게 축도권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축복권이 있는 줄 믿습니다. 

축도해 주겠다고 하기에 조금 잘 못 깨달은 것 같지만 한 번 하라고 했더니 축복 기도를 해주더라구요. 딸이 축복 기도를 해 주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서 축복할 때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을 위해서 축복해 줄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일주일 동안 너무나 시달렸었기 때문에 딸의 축복기도(?)를 받고 그냥 자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거의 30년 동안에 처음 있었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공부한 곳은 뉴 올린즈(New Orleans) 신학교였었는데, 그 뉴 올린즈가 항구도시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지면이 해수면보다 다 낮습니다. 그래서 도로를 만들어도 밑에 물이 많으니까 제대로 되지 않고 울퉁불퉁해서 타이어도 자주 갈아야 합니다. 여하튼 평소에도 아주 강력한 펌프로 물을 계속 품어내야 지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어요. 30년 만에 처음이랍니다. 저는 하나도 모르고 그냥 잤습니다. 제가 있었던 신학교는 그 도시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도 일층은 다 잠겼어요.  제가 아침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 난리는 안 보이고 `아! 내 차!' 하고 차 생각만 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허겁지겁 가 봤는데 거기는 더 많이 잠겼어요. 차 계기판 위 유리까지 완전히 잠겨버렸어요. 

차를 고치려다가 완전히 죽여 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대리점은 큰 곳이기 때문에 그 대리점에서 든 보험 덕에 그 조그만 표 하나 가지고 완전히 처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살 때 지불했던 돈보다 1000불을 더 받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부족한 우리들의 축복기도를 들으시고 환경도 바꾸시고 사람의 마음도 녹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4. 그 축복은 마침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네 번째, 그 축복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를 축복하고, 나오미가 보아스를 축복하고, 보아스가 룻을 축복하고, 결국은 그 축복이 나오미에게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서로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장로들이 축복하고, 백성들이 축복하고, 여인들이 축복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나오미가 축복하기를 즐기더니 그 축복이 자기에게로 돌아온 것처럼 백성들이 축복하기를 즐기더니, 장로들이 축복하기를 즐기더니, 베들레헴에서 우리 주님께서 나시고 그 동네가 메시아의 동네가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5. 그 축복은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이루는 중요한 시발점이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우리가 축복하는 작은 행동이 나에게만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이루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벳이 누구라고 했어요? 다윗의 아비, 이새의 아비였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구속의 역사의 반열에 룻도, 보아스도, 나오미도, 이 베들레헴의 작은 공동체도 함께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작은 축복 속에 나와 내 가문이 복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가 복을 받고 교회가 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쓰임 받는 은혜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축복하는 공동체입니다. 축복합시다. 하나님께서 그 복을 여러분에게 다시 돌려주시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놀랍고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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