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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이름 예수 (롬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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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름 예수 (롬 10:1-13)


박지성 선수의 열심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주장자격이 있습니다. 볼을 잡고 몇십미터를 혼자 드리블해 상대수비수를 제치고 그 멋진슛을 날려서 통쾌한 골이 될 때 박지성 선수 참으로 훌륭하다 싶습니다. 그 열심, 지치지 않는 그 열정, 참 대단합니다. 

박지성 선수도 그런데 또 하나 칭찬하라면 이영표선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넘어져도 또 일어나서 꼭 오뚜기 같습니다. 그 선수들의 열심을 보면 저 선수들이 그런 자리에 온것은 그냥 온것이 아닙니다. 축구에 대한 사랑, 나라에 대하 애국심 저 열정과 열심히 저들을 그 자리에 세워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어떤일을 해도 열심히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남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열심, 열정이라는 것,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보더라도 다윗왕의 열심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모든 필요한 물질들을 모으는데 대단한 열심입니다. 자기가 가진것들을 다 내놓을 정도의 열심과 열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장막에 모시어 들일 때 너무 좋아서 춤을 추는데 바지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바울의 열심은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미친개처럼 유럽을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고, 결혼도 하지 않고 너무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복음에 미쳐서 복음을 증거한 이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잘못된 열심에 노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전에 그는 율법에 열심히였던 젊은이였습니다. 좋은학벌 출신이고 가말리아학파에 수제자로서 그는 율법에 열심히였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잡아죽이는 것이 그의 사명이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그는 먼길을 달려가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넣을려고 하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겁니다. 그리고는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낸 열심이 잘못된 열심이였구나. 그릇된 열심히였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회복하게 되고 그는 바른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는 세계 선교사역의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이 없는 사람은 안타깝습니다. 마치 꺼져가는 엔진과 같고 고장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올바른 지식에 열심이여야 합니다. 방향이 올바라야합니다. 어떤 지역에 어떤집을 찾아가다 보니까 잘못찾아가서 고생한적이 여러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집과는 정 반대의 길로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장래가 나서 부목사님과 교회교우들이 출발을 했습니다.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장래식장인줄 알고 부르나케 운전해서 가봤더니 거기가 아니더랍니다. 다른 장래식장인데 전화로 잘못듣고 엉뚱한 장래식장을 간 겁니다. 고생만 싣컷하고 예식에 참여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보다 중요한것은 올바른 지식입니다. 

2절 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게 유대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자기 동족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내 민족 유대민족이 구원받을수만 있다면 그것이 그의 기도제목의 천번째입니다. 그러나 하나 안타까운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열심은 있는데 잘못된 열심입니다. 그릇된 열심입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를 세우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자기 공로나 자기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나아가려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으려 하니까 이게 안되는 겁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 정신은 망각해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율법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좋은데 율법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했습니다. 

그 본 정신 사랑과 인애의 정신은 왜곡해 버리고 그들이 위선자가 다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수많은 조항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나중엔 어느정도까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은 그런다고 합니다. 지금도 안식일에 시위치를 올리는것도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하면 안되니까 사람을 사서 다른사람에게 시킨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것도 일입니다. 자기는 못누릅니다. 다른사람을 불러다가 누르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지나친 것입니까. 율법에 대한 열심은 있는데 자기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리아에 보면 안티오네스에피파네스라는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는데 돼지머리를 가져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려놨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돼지머리를, 또 돼지고기를 제일 싫어합니다. 한 제사장을 잡아다놓고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합니다. 먹을 리가 없습니다.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이고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 고문을 하고 협박을 하고 매를 때리고 그래도 안먹습니다. 나중에 회의를 합니다. 한 병사가 와서 제사장이여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이것은 돼지고기가 아니고 소고기입니다. 소고기를 먹는척만 하십시오. 그래도 못먹겠다는 겁니다. 나는 소고기를 먹더라도 남들은 내가 돼지고기를 먹은지 알것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먹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그는 나는 율법을 위해 죽노라 소리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장렬한 순교같지만 다르게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돼지고기를 먹는게 얼마나 중요해서 자신의 생명을 값없이 던져버리는 겁니다. 돼지고기 안먹는다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확대해석했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니까 이 사도바울은 마음이 너무나 안타까운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놀라운 구원의 길을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소개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4절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다시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킨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인간들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앞에 의로와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앞에 의로워질수가 없었습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앞에 옳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칭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떤 자기의 조건 때문에 공로나 업적이나 선행으로 하나님앞에 옳다 인정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로와 지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유대인들은 자꾸 어려운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구원받는 길은 멀리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오겠느냐. 저 무저갱 땅속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끌어 올리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있고 내 입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믿고 구원받는 길이 멀리있지 않고 가장 가깝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믿음의 말씀 복음이 여기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영접하고 이 말씀을 믿으면 구원의 길이 열리는데 내 동족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것을 거부하고 증거하는 사도바울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 아름다운 구원의 길을 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종교적 열심만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열심은 있습니다.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고 성가대도 하고 봉사도하고 막 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것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열심이 왜 위험한 지 아십니까? 

잘못된 열심은 그 열심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가고 내가 그 열심 때문에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남을 실족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6.25때 그런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공산당이 내려와서 지주계급은 다 죽일 놈들이고 고통당하던 소작인들만 우대하고 소작인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빨간 완장하나채우고 청년연맹이라고 만들어가지고 가서 너희가 인민재판하라 그러니까 지주계급이고 동네어른이고 다 잡아다가 재판하고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동굴속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들에게 열심은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중에 얼마나 통회의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오늘 바울이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알고보니까 유대인들의 그릇된 열심이 너무나 안타까운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는 길이 있다는 겁니다. 구원의 진리 길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얻는길의 첫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겁니다. 9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에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그리스도를 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겁니다. 예수가 바로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이 주라는 표현은 원어로 보면 퀴리오스입니다. 퀴리오스라는 말은 인간이 누군가에게 붙일수있는 최고의 존칭입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이 신처럼 여기는 황제에게 퀴리오스라는 말을 붙입니다.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에게 퀴리오스라는 말을 붙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절대자를 존경하는 말이 퀴리오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 퀴리오스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을 올리수 있는 최고의 절대자로 그분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황제보다도 더 위대한 분으로 자리에 그분을 모셔들이는 겁니다. 내 생에 제일 높은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그분앞에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겁니다. 

이 퀴리오스라는 말은 주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내 생명의 주인이시고 내 마음의 주인이시고 내 가정의 주인, 내 직장의 주인 내 기업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 되신 그분앞에 여쭤보고 그분의 명령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랑해라하면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이 용서하라면 용서해야합니다. 그게 진짜 주를 모시는 겁니다. 쉽게 점검이 됩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말입니다. 정말 그분을 내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주인이시다. 나의 주라는 고백 쉬운고백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바로 구원을 받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구원받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사신것을 믿어야 합니다. 9절 후반절에 보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자리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믿는것은 다 헛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전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2천년전 일회적으로 부활했을뿐만아니라 그분은 지금도 부활의 주님으로 살아계신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번 부활하셨다가 다시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현존하시는 지금 나와함께하시고 지금 살아역사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으로 예수님은 내 심령속에 임재해계시고 나와 동행해주시고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돕고계시는 살아계신 예수님 그분을 고백하는 것, 이게 진짜 신앙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이 신앙을 회복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 그 능력의 주님 그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것보다도 그분은 내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십니다. 

세 번째는 마음으로만 믿을뿐 아니라 우리입술로 고백하야 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입으로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속에만 놓고 우물우물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가 내 주인이라고 내 구주이시라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모두 씻어 깨끗케 하셨다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내 주로 시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그게 전도입니다. 전도하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증거하는거 보니까 예수믿는 사람이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자꾸 숨깁니다. 은밀하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합니다.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챤임을 드러낼 수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다른사람에게 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입술로 고백하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들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아버지앞에서 너희를 안다고 시인할 것이다. 너희가 사람들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앞에서 너희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입을 열어서 예수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는 입으로 시인하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는 구원에 이른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는 사람들이 받을 복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오늘 성경에 2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11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것은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을 인용한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주춧돌을 반석을 시온에 두리니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저가 누굽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오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천국문앞에 섰을때 나는 당연히 천국갈줄 알았는데 지옥의 사자가 와서 지옥으로 끌고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는 믿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떤사람이 KTX를 탔는데 기분좋게 KTX에 앉아서 영화도보고 가고 있는데 차장이 와서 차표검사를 합니다. 아저씨는 KTX표가 아니고 비둘기호입니다. 다음역에서 내리셔서 다른기차를 타셔야합니다.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짐들고 거기서 내려서 KTX보다 훨씬 못한 비둘기호를 타야된다니 그 부끄러움입니다. 

예전에 누군가 그런이야기를 합니다. 기분좋게 슈펴 이마트에 가서 한 15만원어치 한달치 필요한 물품을 다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드를 내 놓았더니 이 카드는 못쓰는 카드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가지고 있는 카드 다 내놓아도 안되더랍니다. 잔금이 부족하고 지난번에 회비를 못내서 금지된 카드고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러구 끝나면 괜찮은데 이 물건들을 제자리에 다 갖다놓고 나와야 한답니다.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땅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엄청난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믿는자들은 말입니다. 그 놀라운 부유와 축복을 성경은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받을 두 번째 축복, 12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그를 부르는 예수를 부르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처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부요함을 주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요한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니까 그분은 그를 부르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공동번역을 보니까 그분을 부르는 자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요한 분이시고 풍성한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주시고 물질의 복을 주시고 명예의 복을 주시고 이 땅의 모든 삶을 보호해주시고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환영을 받으시는 그는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실줄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요한 분이시고 축복하는 분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믿는 다는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기쁨인가를 우리가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은 혹 잘못된 열심은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주여 열심은 있는데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열심히였지만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그 존귀하신 이름 그 능력의 이름 위대한 이름을 온전히 부르며 그분을 여러분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시고 그분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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