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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1) : 마가의 성령세례 (막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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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1) : 마가의 성령세례 (막 1:1-15)


지난 주는 교회력을 따라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사도행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 이후로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계속 주일마다 선포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력을 따르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뻐함으로 절기를 지켰던 의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곧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을 이스라엘 백성은 지킴으로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해마다 반복하며 즐거워함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누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시면 ‘성령세례(1)’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 시간 동안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로써 올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강론할 예정입니다. 

현대의 교회 중에서 성령파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많이 알고 계시는 순복음교회가 오순절파입니다. 보통 성령세례를 거듭남, 중생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오순절파는 예수를 처음으로 믿을 때, 즉 예수를 영접하여 처음 구원을 얻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 임하는 성령세례를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를 믿어서는 신자로써 온전한 삶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신자는 강력한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오순절파는 말합니다.

그래서 오순절파에서 장로교파 신자들을 보면 대체로 그저 성령이 임한 신자로 살 뿐이고, 자기들처럼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통하여 능력있게 사는 신자들은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가리켜 ‘순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교회는 여러 교단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의 교단들이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의 오순절파의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름으로는 각기 다른 교단의 이름을 표방하지만 그 속의 내용은 순복음파와 별 다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거의 많은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마다 강조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일대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야만 비로소 거듭난 신자로서 온전하게 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회를 통하거나 아니면 기도원집회에 참여함을 통하여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여 신자들을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괜찮다고 하는 신자들은 이런 경험을 하나씩은 갖고 있고, 그런 경험을 간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신자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 교파의 자기들이 갖고 있는 교리로써의 가르침 보다는 오순절파의 성령체험을 거의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순절파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생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성령체험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데 이런 대표적인 현상이 방언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는 그가 하는 방언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입증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에 비하여 개혁파의 성령세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생하는 순간 자연스레 성령세례를 받는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이 자아 속에 들어오고 성령께서 하늘 나라의 통치권을 가지고 자아 속 곳곳을 빠짐없이 통치하는 상태를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즉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그의 인격으로 우리 자신을 점차 변화시켜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내가 주인이 되어 살다가 이제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주인으로 통치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오순절파와 개혁파의 성령세례가 서로 차이점이 있지만 성령세례를 중생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남’이라는 뜻도 갖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는 ‘위로부터 남’, ‘하늘로부터의 출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물론 중생이라는 단어가 쓰인 문장에서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근본적인 의미는 ‘다시 난다’는 것 보다는 ‘위로부터 난다’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이러한 중생을 보통 교인들은 개인의 인격변화와 같이 생각합니다. 즉 악한 일만 일삼다가 새롭게 변화되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사람의 변화가 곧 중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불량한 사람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선량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곧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의 변화, 개인 존재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생은 성경에서 갖는 중심적인 의미는 존재의 변화 보다는 신분의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신분의 변화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소개할 때 요한복음 3장은 그의 신분을 제일 먼저 말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즉 그의 신분을 바리새인, 유대인, 지도자(공회원)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분을 가진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는 어머니의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거듭남의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사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아무리 구약의 신분으로 엘리트라 하더라도 그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랬을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개과천선하여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말이 아니라, 종에서 아들로 다시 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물론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남과 영으로 남의 차이를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의 구성요소로 육과 영으로 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영’이라는 말 자체가 신분을 뜻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영이 임하여도 절대로 아들의 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영은 모세에게 임한 영이어서 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세례는 ‘귀화하는 것과 같다’라고도 했습니다. 즉 세상 나라에 백성으로 살다가 이제 세례를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있고,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하나님 나라에 가입하는 것이라고 하면, 성경에는 구약의 나라에 가입하는 세례와 신약의 나라에 가입하는 세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 가입하는 세례는 종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 가입하는 세례는 아들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유대인으로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종에 불과합니다. 종이 아무리 뛰어나고, 주인의 말을 충성스럽게 잘 듣는다고 하여도 아들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종의 신분으로는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나야만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분을 가진 자가 새 사람이요, 새 백성이 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성령세례는 존재론에 근거한 신학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흠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상대적으로 인간은 비천하고 흠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여, 인간이 신의 절대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라고 하는 개념도 도덕적인 면에서 풀어버린 것입니다. 신분으로서의 의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 왜 성령세례를 주시는가? 성령은 우리 개인 안에 들어와 우리 자신을 구석구석 살펴서 흠이 없는 모양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 우리를 변화시켜 신의 존재에 가깝게 만드는 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은 일차적으로 일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가는 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후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로 하시므로 첫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의 영이 경영하며 완성해가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여 우리가 갑자기 없던 힘이 생기고 슈퍼맨이 된 것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우리 안에 죄의 부분으로 차츰 제거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영입니다.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도 일의 영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팔과 다리의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하는 일이 서로 다르지만 사람의 한 몸을 위하여 일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도 각기 다릅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다르듯이 성령의 은사도 각기 다르게 각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성령의 은사를 갖고 일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 성령세례의 체험을 간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성령이 임하는 순간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하여 진동으로 임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마루바닥에서 약 20센치 이상 앉은 자세로 뛰었다고 성령체험을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신을 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는 상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거의 기절 상태까지 간 것을 자랑합니다. 또한 성령의 불덩어리가 정수리에서부터 발바닥에 이르도록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그런 뜨거움을 느꼈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럼 성령의 이러한 체험이 도대체 하나님 나라에 어떤 보탬이 되겠습니까? 성령은 신분을 갖고 일하게 하는 영인데, 부들부들 떤 것이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기절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슨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체험보다 더 영험한 것이 있습니다. 무당이 더 신접현상을 경험합니다. 무당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가 춤을 춥니다. 보지 않아서 믿지 않는 분들이 여기 계시겠지만 이거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신자들이 성령세례의 간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더 놀라운 경험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성령세례에 대하여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성령세례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둘째로 성령세례는 일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신분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주시는 영입니다.

이렇게 성령세례의 의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선을 그은 다음에 오늘 마가복음을 통해서 성령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국을 말하는 마가복음의 성령세례를 먼저 본 다음에 다른 복음서의 성령세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오늘 마가복음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이 마가복음의 주제절이이라고 여러 번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시작입니까? 우리 말 성경에는 ‘기록된 것과 같이’가 3절 끝 부분에 나오지만 실제 원문에는 이 말이 2절 처음에 나옵니다. 즉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은 시작이라고 본문은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구약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 옛 출애굽이 아니라 새 출애굽으로 세우는 나라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로 그 새 출애굽의 나라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마가복음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선지자 이사야는 새 출애굽의 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전령이 먼저 와서 알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와 같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에 와서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무어라고 증거했습니까?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 오시는데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요단강에서 물 세례를 받게 하여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마치 엘리야의 사역과 같아서 그는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엘리야 선지자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나라가 되었을 때,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들과 결투를 벌여 승리함으로 자기 백성을 여호와에게로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물세례를 통하여 준비케 하였고 돌이키도록 하였습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새 일, 새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는 말 속에 나타났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옛 세계를 멸하고 새 세계가 열렸을 때 첫 생명의 잎사귀를 물어온 것이 바로 비둘기였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일은 이제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의 시작입니까? 성령이 임한 후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의 물이 갈라지고 그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옴을 통하여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애굽 바로 왕의 종으로부터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물세례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 임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진동입니까? 아닙니다. 입신입니까? 아닙니다. 방언입니까?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존재의 변화를 말한 것인가요? 아니지요. 성령이 임하니까 과거에 악당이었다는 자가 이제 선량한 시민이 되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임한 성령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땅의 신분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분으로 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으로 남과 영으로 남의 차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마치 홍해의 세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바로 왕의 종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나게 한 세례였습니다. 그리하였어도 하나님의 종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세례가 하늘로부터 임하면 종으로부터 벗어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 나는 것으로부터 거듭남은 하나님께로부터 남입니다. 니고데모는 육정으로 난 자였습니다. 이런 니고데모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시키고 아버지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럼 그 일은 어떤 일입니까? 바로 그 다음 문장에 나옵니다. 12-13절에 말하는 내용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실 일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이제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사탄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듯이 이제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증인입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왕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풀어내고 사단의 권세를 정복해 가는 일이 바로 성령이 임한 교회 공동체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 과거에는 악한 사람이었다가 이제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했습니까? 도둑질만 하고 부모의 속만 썩이다가 이제 하나님 만나서 아주 착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모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주님의 증인들은 주님이 걸으신 길에 동행했습니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모든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신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일에 성령을 받은 증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들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사도들도 그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제 정리하자면 성령이 임하므로 우리의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변화도 아니요, 존재의 변화도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 살다가 이제 의의 종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들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노릇은 아들처럼 일을 하면 됩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이루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그 새로 남에 대하여, 즉 거듭남에 대하여 처음에 기술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낳고, 낳고, 낳고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남이 나타났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나심을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바로 이것이 새로운 출생이었습니다. 성령으로 남이 예수님의 출생이었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출생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마가복음에서는 마귀의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신 후로부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모든 가르치심과 그의 일이 바로 아들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아들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증거가 바로 그의 일을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 하는 것은 반드시 체험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아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하신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도록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을 통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성령세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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