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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하라, 다시 말하노니 행복하라! (요 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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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라, 다시 말하노니 행복하라!  (요 4:5-42) 


1. 행복하십니까?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이며 현재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George E. Vaillant)가 지은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버드대학교 연구팀이 1930년대 말에 하버드 대학교를 입학한 사람 268명, 일반 서민 남성 456명, 그리고 IQ 145 이상의 여성 천재 90명 등, 총 814명을 70여 년간 추적하여 얻은 답을 정리한 것입니다. 연구 대상자들은 대부분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연구자들은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토록 행복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것으로 이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즉 평생을 행복하게 산 사람들을 살펴보니 그들의 삶에는 어떤 법칙이 있더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연구 결과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책은 어떤 것이 행복의 조건이며,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행복의 조건 몇 가지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과 사회를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태도. 둘째 자신들이 늙어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셋째 항상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넷째 유머 감각이 뛰어나며 인생을 즐기는 태도. 다섯째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는 태도. 여섯째 친밀한 친구들이 많은 것(pp, 418~419 요약).” 이런 것들이 그들이 행복하게 산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의 조건들이 여러분과는 다소 동떨어진 남의 이야기로 들리신다면, 다음은 어떻습니까?

어느 철학자가 행복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 상당히 공감이 가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조금 부족한 재산”, “약간 부족한 외모”,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승율 30%”, “절반의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마다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느끼거나 혹은 기대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건강을 잃었거나 병원에 입원하여 계신 분들이나 그 가족들은 건강이 행복의 조건일 것이고, 돈 문제로 어렵거나 혹은 빚 독촉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돈이 행복의 조건일 것입니다. 열심히 대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고득점이 행복의 조건이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한 청년들은 취직이 행복의 조건이며, 나이든 청년들은 결혼이 행복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상황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즉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행복의 조건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행복의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죠.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인데, 그것은 한 불행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 행복을 찾는 사람들

1) 행복 전도사 예수님!

예수님은 30세쯤에 나사렛을 떠나 유대지방으로 가셨고, 요단강가 베다니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유대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셨고,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 후, 갈릴리 일원에서 제자를 불러 모으신 후 그 제자들과 함께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거기서 성전 청결 사건을 행하셨는데, 그때가 약 1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예수님은 주로 유대 사회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는데, 그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 첫해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일어난 사건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첫 1년의 시작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그 첫 1년과 유대 중심 사역의 끝이요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시고 다시 갈릴리로 가시던 예수님은 통상 왕래하던 길이 아닌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이 길은 사마리아인들과의 인종적인 갈등 때문에 유대인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이었으며, 게다가 그 길이 아주 험한 산길인데다 가파른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길을 이용하셔서 갈릴리로 가시던 길에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잠시 멈추셨습니다. 그 시간은 낮 12시경이었고, 아침부터 산길을 걸어오셨는지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가 고팠고 또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고, 그 동안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동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그 우물가로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는 정말 이야기 거리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시간에 우물가로 물 길으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여인이 그 시간에 물 길으러 왔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이고, 사람들을 피하여 아무도 없는 시간에 우물가로 온 여인이 거기서 같은 동네 사람이나 동네 아낙이 아닌 유대인인 한 남자를 만날 가능성 역시 아주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광고 보셨죠? 한 청년이 헤드폰으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길거리를 걸어가다 갑자기 멈칫하며 놀랍니다. 

헤드폰에서 갑자기 “아들~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광고는 뭐라고 말합니까? MP3로 노래를 듣는 중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확률은 몇 %? 예, 0.000001%! 이 광고는 하루 한 끼 정도는 온 가족이 밥상에서 만나자는 카피 문구를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광고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이 광고처럼 팔레스타인의 땡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물 길러 우물가로 오는 시간 개념 없는 여자도 드물고, 그 시간 사마리아 동네의 우물가에 유대인 남자가 앉아 있을 확률은 더더욱 드물고,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시죠? 말을 먼저 건넨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막 길을 오전 내내 걸으셨기 때문에 무척 목이 말랐던 예수님은 마침 물 길으러 온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여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부끄럽사와요’하지 않고 당돌한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아니, 보아하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여러분, 이 여인이 당돌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인의 이러한 당돌한 반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형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고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의 당돌해 보이는 질문이 가능했던 것이죠. 아무튼 아무도 없어야 할 시간에 우물가에 앉아있는 남자, 그것도 유대인 남자! 그래서 놀랍기도 하고 또 당황하기도 하여 그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뭔가 사연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과 한 유대인 남자의 너무나 뜻밖의 만남에 대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도 아닌 ‘제3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3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주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줄 수 있소!’ 그러자 여인은 “생수라고요? 여기 이 우물물 말고 생수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주실 수 있다는 그 생수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여인은 그 생수가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이렇게 남의 눈을 피하여 땡볕이 내려쬐는 대낮에 우물가를 찾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하면서 “그 생수를 제게 주십시오.”라고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들은 예수님은 대뜸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 이야기를 꺼내셨을까요? 우물물은 집안의 생활용수와 식수가 떨어지면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으로 퍼 올리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는 우물에서 얻는 것도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생수를 마시려면 먼저 그 마음, 그 내면, 그 영혼의 갈증을 느껴야 합니다. 즉 자신이 가진 문제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이 생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러분, 이 여인은 현재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合法的이고 正常的인 婚姻의 관계로서의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이며,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보입니까? 문제 많고 부정한 여인으로 보입니까? 쉽게 단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중에 만난 한 목사님께서 아랍 지역에서 온 무슬림 여인에게 이 본문의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그 무슬림 여인의 첫 마디가 “참 불쌍한 여자!”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인이 주도적으로 남자를 버리고 바꾸고 해서 여섯 번째 남자까지 이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는 남성 우위 사회였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갈아치운 것이 아니라, 남편들이 그녀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남자들에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버림 받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서 언제 어떻게 다시 버림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남자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지금의 행복이 평생 이어지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지금 살고 있는 남자에게 버림을 받지 않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문제의 해결은 더 깊은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중심에, 그녀의 영혼에 주님이 없다는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의 치부를 건드린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됩니까? 참 행복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 행복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참 생수, 진정한 행복, 그녀가 그렇게 갈망하는 바로 그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녀의 문제의 핵심을 건드렸습니다. ‘내가 말하는 생수는 마시는 물이 아니다. 그 생수는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영혼의 갈증을 느껴야 한다. 네가 정말 행복해지기 원한다면 너의 내면의 문제, 영적인 목마름을 깨달아야 한다.’ 바로 이런 뜻으로 예수님은 그녀에게 남편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주님의 말을 들은 여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전 처음 만난 유대인 남자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리 자기 동네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라도, 낯선 유대인 남자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자신의 비밀을 훤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예수님이 선지자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자,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20). 왜 예배에 대해서 물었을까요? 그것은 여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반쪽짜리 유대인일지라도 그녀는 ‘사람의 문제, 인생의 문제, 내면의 문제, 영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문제를 깨달은 그녀는 ‘저도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하면서 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예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이 말하는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나, 유대인이 주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가 아닌, “참 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는 사실 내면의 문제, 영적인 문제이고, 그 문제를 푸는 길은 예배인 것이 맞다마는, 그 예배는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 참된 예배라야 한다. 참된 예배는 메시야인 나로 말미암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너의 문제는 영혼의 문제이다. 그 문제는 나를 알지 못하면 결코 풀 수 없다. 따라서 네가 나를 메시아로 믿을 때 너의 모든 문제를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여인이 자신의 문제의 근원을 알고, 그것을 위하여 생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 생수를 주시는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여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시원한 얼음냉수나, 저 수 백 미터 깊은 데서 퍼 올린 암반수를 마신 것 같은 시원함이 그 여인 속에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사람들, 마치 자신의 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져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경험을 한 사람들, 하늘이 달라 보이고, 길가의 가로수들이 춤추고, 새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들리는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28절에 보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자기가 생수를 마셨다고요! 참 행복을 찾았다고요!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제 후배 목사님의 먼 친척 누님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떠나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은 그런 남편을 잊지 못해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집 가까이로 이사를 가서 멀리서라도 그 남편을 바라보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보라고 해야 할 지, 지나친 집착이라고 해야 할 지 …. 그런 이 분에게 주님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되자, 그 분은 자신의 문제는 남편도 그 남편의 사랑도 아닌 예수님을 몰랐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곧바로 다른 데로 이사를 했고, 그 이후 주님과 교회 일에 충성하면서 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구하고 바라는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참 행복은 오직 예수님 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정말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저는 또 다시 여러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니 정말 행복하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느끼는 행복은 진짜 행복입니까?

“행복전도사”로 유명한 J 교수를 아십니까? “행복하소서!” 하면서 방송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강연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그녀는 사실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모 사찰의 주지와 신도들이 ‘주민등록법 위반’, ‘재물 손괴 및 절도죄’, ‘공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J교수를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그러자 J교수는 그 사찰의 주지를 ‘사기죄’로 맞고소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맞고소 과정에서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 주지와 유부녀인 J교수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사업 관계로 지난 2001년부터 만나 친해졌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사귀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후 약 6년여 동안 부부처럼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N일보사는 그들의 부부생활을 담은 영상까지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J교수는 법당 건축을 위하여 수억 원을 시주했고, 주지는 사찰의 건물과 토지를 J교수 소유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아직 法庭 攻防이 계속 되는 사건이라 어떻게 말 할 수는 없으나, 행복 전도사를 자처하던 그녀는 남들에게 “행복하소서!”라고 외쳤을지언정 정작 자신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녀의 행복은 가짜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행복도 假裝된 것은 아닙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얻은 행복은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주시는 분임을 깨달은 순간, 자기 속에서 ‘생수의 샘 행복의 샘’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한 여인은 곧바로 물을 길어 갈려고 가져왔던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아무리 물을 마시고 마셔도, 음식이나 다른 것으로 배를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녀 역시 그러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충만하게 되고 넘쳐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과거가 달라졌습니까? 그녀가 은혜 받은 순간에 집에 있던 남자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을까요? 세상의 것, 인간의 것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시원한지, 왜 이렇게 즐거운지, 왜 이렇게 행복한지 …. 그래서 그녀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여러분 제가 누군지,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시죠? 그런데, 우리 마을사람도 아니고 더더구나 우리 동족인 사마리아 사람도 아닌데다가, 우리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고 섞일 수 없는 유대인 한 분이 저기 마을 입구 우물가에 계신데, 그 분이 나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나의 사랑의 목마름, 행복에의 목마름, 삶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가 보세요. 그 분은 여러분에게도 틀림없이 행복을 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간절하게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알리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지금 그녀가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에 짓눌린 모습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것이나, 사람의 것이나, 이 땅의 것, 사람에 따라 다르고, 형편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행복의 조건이 아닌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께서 주시는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맛본 사람은 다 이 여인처럼 됩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진정한 행복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며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손석우가 작사 작곡하고 감리교 목사님의 딸로 가수 활동을 한 송민도가 1950년대에 부른 “나 하나의 사랑”이라는 노래입니다. 여러분, 이 노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혼자 행복한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즉 나 혼자 예수를 가지고, 나 혼자 예수를 사랑하면서, 나 혼자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맛본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행복 전도사가 되어서 행복을 전했습니다.

이 여인처럼,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여러분은 행복 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그녀의 불행, 그래서 다들 손가락질을 했었는데, 갑자기 그 여인이 자신의 비밀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사람들을 피하면서 살아서 낮에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던 여인이 너무나 달라진 모습으로, 행복에 가득 찬 얼굴로, ‘여러분 제가 행복해 보이지 않으세요? 저처럼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분을 제가 만났습니다. 얼른 마을 밖 우물가로 가 보세요. 여러분도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행복해지실거예요.’라고 말하자 도무지 궁금해서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가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로 삼삼오오 나갔습니다(30). 

그런데요, 처음에는 여인의 변화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서 예수님께로 간 ‘수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3일 동안 말씀을 들은 뒤, 그들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들도 진정한 행복을 찾은 것이지요. 그래서 42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우리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 그의 말씀을 들어보니 당신 말대로 그 분은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메시야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우리도 그 분 때문에 행복해졌어. 당신이 발견한 그 행복을 우리도 찾았단 말이야!’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만약 여러분 역시 이 여인처럼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여러분도 이 여인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잠잠하다면 아직 여러분은 행복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몰라서, 맛보지 못해서 침묵하지 맛본 사람은 결코 침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행복하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이 ‘산다는 것이 다 그렇고 그렇지, 행복이 별 건가?’라면서 사는 것이나, 가짜 행복을 진짜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거나, 혹은 행복하지 않으면서 행복한 것처럼 가장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참 행복을 발견하고 그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여 행복전도사로 살았듯이, 그 여인 때문에 수가 성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았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행복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주신 행복이 너무 크고 강하고 놀라워서, 그 행복 때문에 세상의 어려움, 인생의 질고, 육신의 질병과 고통마저도 이겨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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