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의 아들 여호수아 (출 33:11)

  • 잡초 잡초
  • 2114
  • 0

첨부 1


눈의 아들 여호수아 (출 33:11)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국가관이 잘못되어 있고 안보의식마저 형편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기성세대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한 정부의 조치는 적절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한.ㆍ중ㆍ일 회담에서 우리는 전쟁을 겁내지도 않고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천안함 조사에 참여했던 21개 주요 국가와 유럽연합(EU),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등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에 의한 결과 발표에 대해 소위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도올 김용옥 교수는 0.0001%도 설득이 안 된다며 정부는 천안함 사태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야당 소속의 한 광역 단체장 후보는 사태초기에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후보는 최초 조사 결과가 매우 부실하여 많은 의혹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한 언론 조사에서 20대 젊은이들의 47.8%가 북한 소행이라는 조사결과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소위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 가져 온 결과입니다. 
미국 9·11테러 직후 프랑스에서는 CIA의 자작극이라는 내용의 '무시무시한 사기극'이라는 책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좌파 성향의 '리베라시옹 지(紙)'나 좌파 지식인들까지도 휴지 같은 주장이라고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미국 국회는 천안함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국제합동 조사결과에 대해 의원 결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국인 우리나라 국회는 발의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나라 군인들의 기강이 옛날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 청년들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호수아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인데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고 했습니다. 

Ⅰ. 청년 여호수아입니다. 

1) 전쟁에서 승리한 청년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3절에 『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때는 여호수아가 청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과 젊은이들이 전쟁을 겁을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신앙 있는 장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가관이 뚜렷하고 주적개념이 확고한 장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승리의 비결은 배후에 모세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출 17:10-13). 
우리 부모들은 전쟁을 겁내지 않는데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전쟁을 겁을 내면 안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산에 오른 청년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2절에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시편 73편 28절에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훌륭한 신앙의 스승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받은 복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수아를 가리켜 모세의 종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한 관계는 결코 아닙니다. 

3) 회막을 사랑하는 청년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에 『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회막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곳은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출애굽기 29장 42-43절에 『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고 했습니다. 

회막은 오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각인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성도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어른이 되고 우리의 사회적 역량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Ⅱ. 후계자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에 『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 이어서 여호수아의 이름은 성경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모세의 후계자로 나타납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여호수아의 보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긍정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 앞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타났습니다. 

1)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는 여호수아입니다. 
민수기 11장 28절에 『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웠더니 하나님의 신(성령)이 그들 모두에게 임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은 장막에 나오지 않았는데 저들에게도 신이 임하여 동일한 예언을 했습니다(민 11:26). 

이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저들이 성령으로 하는 예언을 금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하는 말입니다. 민수기 11장 29절에 『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린아이 같이 자신의 주장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아니했습니다. 

2) 영의 사람 여호수아입니다. 
민수기 27장 18절에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대신 여호수아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a man in whom is the spirit)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군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신이 아마새를 감동시켜 다윗을 돕게 했습니다(대상 12:18). 여호와의 신이 스가랴를 감동시켜 자신의 뜻을 백성들 앞에 고지토록 했습니다(대하 24:20).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을 받은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찢었습니다. 삼손의 복은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한 것입니다(삿 14:5-6).
사무엘상 10장 26절에 『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그와 함께 갔어도 』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 『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고 했습니다. 

에스라 1장 5절에 『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딤후 3:16). 따라서 성경을 믿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Ⅲ.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1장 5절에 『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휘권을 승계 받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가나안 정복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대명을 수행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중단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명을 받은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했습니다(수 1:6). 

1)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여호수아 1장 7-8절에 『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수 1:9)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즉, 여호수아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106절에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2) 여호수아는 부지런한 아침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3장 1절에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생활의 특징적인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아침시간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습관적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들을 성결케 하고 준비했습니다(수 3:1-6).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움직였습니다(수 6:12-14). 아간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수 7:16). 그리고 실패한 아이성을 다시 빼앗기 위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행동하였습니다(수 8:10). 
이러한 여호수아의 생활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것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것은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가 절대로 업적을 남길 수 없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영적으로 큰 감화를 끼친 인물은 새벽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찍이 일어나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 제자를 찾아오신 시간도 새벽이었습니다(요 21:4). 

시편 88편 13절에 『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했습니다(시 143:8). 
민수기 16장 5절에 『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욥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 아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백성이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왔습니다(눅 21:38).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마 21:18). 

3) 여호수아는 타인의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 7장 6-7절에 『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철벽금성 여리고성을 함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에서 대패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수 7:5). 이것은 아간의 죄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아간이 범한 죄의 특징은 탐심의 죄입니다. 물질로 말미암은 죄였습니다. 그 결과 전(全) 이스라엘의 연대적인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이스라엘 전체의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늘의 목자상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교회를 어둡게 하는 세력은 세속화와 이단과 핍박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죄를 멀리하고, 죄를 미워하며, 죄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4) 여호수아는 지사충성(至死忠誠)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 13장 1절에 『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늙어 죽을 때까지 충성한 지도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하나님만 섬길 것을 약속받았습니다(수 24:16).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수 24: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갈 1:10).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고 사람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배하는 그 기쁨, 드리는 그 기쁨, 봉사하는 그 기쁨, 희생하는 그 기쁨, 순교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故) 한상동 목사님은 예수님이 33살 청년기에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청년의 기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독수리의 기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30-31절에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03편 5절에 『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살아 있는 노인일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이 매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의 절대 절명의 호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카멜레온 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준 마음은 변함이 없고 한번 한 약속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멋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의 마지막에 떠나는 자와 남은 자가 피차 신앙고백으로 인사하는 여호수아의 작별을 기대합니다. 그냥 힘겹게 숨을 몰아쉬다가 죽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자손 앞에, 교회 앞에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여력을 남겨 둡시다. 자신의 신앙고백의 증표를 교회 앞에 기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