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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려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딤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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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딤후 1:1-7)


인간의 힘의 끝이 곧 하나님의 능력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은 어떤 고난과 절망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날 변화의 시작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인들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러 나왔기에 점점 더 많은 논쟁만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무수한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나왔던 사람들은 다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왔던 하나님 안에서 해결 받으리라는 이 한 마음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날 거룩한 변화에 대해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의 모든 생활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크게 믿어야 됩니다.  항상 확실하게 믿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감동이 되게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깨어서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믿음을 붙잡아야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 그 믿음을 크게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약해지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하나님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가 환경에 짓눌려서 지배를 받는 한 결코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하는 믿음,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때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장애가 없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장애가 없으면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없습니다.  모세는 40년 고난의 인생을 거쳐서 홍해를 가르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된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성령의 권능을 붙들고 일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계획하십시오.  하나님께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일을 저지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신앙이란 없는 중에 있게 하심을 믿는 창조적인 신앙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는 만능의 신앙입니다.  절망에서 일어서는 소망의 신앙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수많은 낙망 속에서 결국 미국 최고의 대통령이 되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난관에도 성경을 펴들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세요.  그러면 그대의 천국 가는 길은 늘 펴져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의 항상 맑은 것만은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가 잔잔한 날이 없듯이 늘 파도와 폭풍이 밀려오고 밀려갑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갈 길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길 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를 쓸 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시각각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따라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썼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배신 때문에, 사명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주변의 측근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가는 극심한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과 11절을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마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디도와 그레스게 같은 사람은 사명 때문에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사도 바울 곁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누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의 상황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시절의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디모데후서를 읽어보면 우리를 감격스럽게 만드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많은 고통의 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디모데를 염려했습니다.  복음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진실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삯군과 선한 목자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삯군이라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이익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떼와 복음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묻는 종입니다.  저는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종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아무리 큰 어려움과 감당하기 힘든 짐이 있다고 할지라도 매 순간 순간마다 영원과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나온 제 삶을 돌이켜볼 때 영적으로 기도와 말씀으로 가장 충만할 때는 제 자신에 대한 관심은 다 사라져버리고 영혼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가슴에 불타 있을 때, 그때가 가장 영적으로 충만했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시들해졌을 때에는 온통 미래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와 근심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제 경험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여러분의 경험이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가슴에 불타 오르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너무 소심했습니다.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했습니다.  게다가 육체적으로도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위장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 쓰라"는 권면을 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정입니다.  열정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디모데에게는 이런 열정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사람 치고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는 예레미야는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마음 가운데 복음을 향한 불붙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치는 그런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의 모습을 사도행전 18장 5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가 주도권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를 이끌어갔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그의 열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시대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열정과 열심을 무시합니다.  열정과 열심을 왜곡합니다.  특별히 말씀 없는 열심, 기쁨 없는 열심, 균형감각이 없는 열심이 세상을 사로잡을 때 사람들은 그 열심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조건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열심은 조롱 받을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잘못된 열심이라면 그것이 올바른 열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가 되어야지, 열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방식의 접근은 옳지 않습니다.

불타는 건물에 아이가 갇혀서 구조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소리를 질러댑니다.  "사람 좀 살려주세요. 우리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소리 소리를 지를 때, 그 어떤 사람도 "저 아주머니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문제야", "저 아주머니는 너무 광적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열심이 없다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생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마음에 열정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기독교가 생명이라고 한다면 생명은 무엇일까요?  이 '생명'에 대하여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기가 돌게 만드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어린아이는 다른 모든 것에는 둔감하다가 장난감을 쳐다보면 그냥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무관심하다가 아이스크림을 보면 그냥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 이야기만 하면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은 돈입니다.

바울의 예를 들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별로 생기가 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만 이야기하면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생명은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1절 말씀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서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는 좀 무식해져야 합니다.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단이라든지, 잘못된 열심을 부리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열심이 틀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향한 올바른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우리 식으로 표현해 볼까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노라."
내 가슴을 연다는 겁니다.  한 번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열정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고 있는데 당신은 왜 죽어 있느냐?"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 안에 생명이 있다면 예수님의 심장으로 뛰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해서 뛰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심장이 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디모데에게는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확신에 찬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디모데후서 1장에서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격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격려는 '담대하게 만드는 힘, 생명을 주는 힘, 세워주는 힘,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나쁜 일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독사 같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주의 백성들은 격려해야 합니다.  무력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입니다.  초라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 위해서 그를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에는 그를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를 원하노라."  저는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의 격려의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격려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웃과 성도를 격려해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본문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자신감이 생깁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것으로 꾸민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보석으로 꾸민다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난하시거나 비아냥거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배은망덕한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 장면에서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믿는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는다.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  그 사랑으로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좌절합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자살합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도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랑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대화를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접촉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피부접촉이 너무 없어서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가장 더러운 것을 만지셨습니다.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실 때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진흙을 침으로 이겨서 친히 손으로 발라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격려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격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고의 격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당한 예수님의 상처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나 때문에 당한 예수님의 슬픔에 찬 얼굴을 쳐다보십시오.  나 때문에 받아야만 했던 채찍 맞은 그 상처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피와 살이 엉켜 있는 손바닥을 한번 보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나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십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빠질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보면 디모데를 향하여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디모데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저는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격려 받을 수 있고, 격려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웃과 성도를 격려해야 합니까?
둘째로, 숨겨진 장점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디모데는 기질상 우울질이었습니다.  우울질의 특징은 쉽게 좌절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보다는 약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혼자서 고민하는 그런 형입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잘 우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남자가 우는 것에 대해서 보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그 눈물이 약함의 상징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믿음의 진실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보시겠습니다.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은 사건을 놓고 일반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사도 바울이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장점을 드러내 줄 줄 아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디모데는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6장 1절에 보면 디모데의 집안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디모데는 국제결혼을 통해서 태어났던 혼혈아였습니다.  정통 유대교인들은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통적인 유대인들이 바라보았을 때 디모데의 어머니는 배교 비슷하게 나갔던 여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했던 디모데가 자기 집안 이야기에서는 수치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본문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 말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가문에 대해서 인정해 준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있는 디모데에게 믿음의 가문임을 확인해 주었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 감독인 래기 잭슨이라는 훌륭한 감독이 있습니다.  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훌륭한 감독의 자질입니까?"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감독이란 선수 각자가 자기 자신의 실력보다 더 훌륭한 선수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격려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숨겨진 장점들을 보고 인정해 줌으로써 더 이상 좌절 가운데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드는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주의 일을 감당하게 만들 수 있는 격려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웃과 성도를 격려해야 합니까?
세 번째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격려는 없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약함과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앞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현실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그의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디모데에게 능력을 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죽었던 것을 살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 자체가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약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약함을 바라보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실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은 약함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인격의 부족함을 놓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치열한 기도, 우리의 생명을 거는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있는 한 어느 누구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최대의 격려는 기도입니다.

기도로 민족을 살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과 32절에 보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망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 한 사람의 뜨거운 기도 때문입니다.  모세의 생명을 건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생명을 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형제의 약함과 부족함 앞에서 농담이나 비난을 던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던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향한 뜨거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메마르니까 모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왜 죽습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주여,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태도를 가지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사업을 놓고, 직장을 놓고 울어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이 밤낮 절망감에 빠져있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뜨거운 기도가 영혼을 살릴 줄 믿습니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기도는 은사에 불을 지르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작은 은사가 있을 때 그 사람을 붙들고 기도하면 큰 은사로 변화될 것입니다.  무력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놓고 기도하면 큰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로 사람을 살리고 기도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good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best로 일하게 만드는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사랑의 불이 꺼졌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에 불이 꺼졌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모든 불은 처음부터 큰 불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작은 불씨에서부터 큰 불이 시작이 됩니다.  사랑의 불이 꺼졌다, 교회에 불이 꺼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 안에 그 불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나로부터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면 살아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위대한 영적 방화범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거룩한 불을 지르고 다녀야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죽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업체가 죽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의 불길이 불바다를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말미암아 주변을 강하게 만들고 거룩한 불을 붙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을 호흡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곳입니다.  살맛이 없던 사람들이 와서 살맛을 얻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기의 바람을 맞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이곳 하나님의 집에서 성령의 능력을 탐내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스도의 권능을 붙드십시오.  그래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는 아름다운 격려자가 되십시오.

오늘 본문의 16절에 보면 오네시보로의 집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있던 힘까지도 빼앗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있던 희망까지도 뭉개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힘든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든 세상입니다.  힘든 세상을 힘들다고 말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어렵다고 말하면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격려의 말 한 마디로 인하여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혼자 걸어가면 길을 만들지만 함께 걸어가면 역사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격려자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함으로서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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