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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가야 할 길 (창 35: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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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길 (창 35:27-29)


‘스캇 팩(Scott Peck)’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며 상담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지은 저서 중에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이란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뉴욕타임지가 선정한 장수 베스트셀러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완성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신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길은 곧 끝나고 맙니다.  아직도 더 갈 수 있는 여행을 이쯤에서 그만 둘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갈 것 인가의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는 이런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야할 길을 너무 일찍 그만 두지는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 삶에 누구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수용하고, 이기며 우리의 남은 생을 힘 있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인생은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 없고, 어렵다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매일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란 삶을 돌아보며 가지 않는 길에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있을 때나 절망의 벼랑 끝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길을 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연수만큼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과연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본문을 통해 2가지의 길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죽음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족장들의 가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이삭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삭의 이야기를 전하고, 특히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이삭은 부모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자녀가 없던 가정에 이삭으로 인해 큰 즐거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부모와 사랑과 울타리 안에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이삭이 장성했을 때 우리와 같이 혼인을 하여 리브가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두 사람은 부모를 떠나 서로 하나가 되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갑니다.  그들의 가정에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쌍둥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야곱과 에서라는 이름의 자녀들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릅니다.  이제 이삭도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와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경은 그의 가는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그는 180세를 살았습니다.  

창세기의 시대는 오늘과 달리 장수하던 때인지라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나이가 많아 늙었고, 기운도 점점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선적으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삭은 우리처럼 이 땅에 태어나 한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바로 죽음의 길입니다.  아이로 태어나 어른이 되고, 노년이 되더니 마침내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이삭과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성경은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다른 성경에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3:1-2)  믿음의 사람 다윗은 죽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왕상2:1-2)

이것이 인생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모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에 예외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옛날 사람이나 현대 사람이나, 권력자나 지배자나, 심지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가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길로 가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이 한자의 죽을 '사(死)'자를 이렇게 풀었습니다.  제일 위에 한 일 ‘一’자가 있고, 왼쪽에 저녁을 가리키는 '석(夕)’자와 칼을 가리키는 '비(匕)'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어느 날 캄캄한 밤에 갑자기 날아온 비수를 맞는 것입니다.  낮에 칼이 날아오면 어느 정도 피할 여유가 있겠지만, 밤이라서 동서남북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릅니다.  죽음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비수같이 날아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늙었다고 빨리 죽는 것이 아니고, 젊었다고 나중에 가지 않습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근대한국 불교의 대선사인 경허(鏡虛)스님의 '무비공(無鼻孔)'이란 설법이 있습니다.  '무비공'은 문자 그대로 '콧구멍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콧구멍에 있음을 말했습니다.  사람이 콧구멍으로 숨을 쉴 수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요, 코로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키지 못하면 죽은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만약 콧구멍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숨을 쉬지 못하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경허스님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깨닫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성경에서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2:22)  죽음도, 생명도 모두 코끝에 달려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자기 코끝에 인생을 의지하고 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선명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저주와 두려움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죽음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멀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죽음을 삶과 멀리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묘지가 산골 깊은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곳을 의도적으로 방치합니다.  사람들도 웬만해서는 공동묘지를 잘 찾지 않습니다.  가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서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묘지가 마을에 있습니다.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일 공동묘지를 지나 출근을 하고, 학교도 가고, 공동묘지를 보면서 하루의 삶을 시작하고 끝냅니다.  교회뒷마당에 묘지가 있는 곳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교회마당에 묻고, 드나들 때마다 찾습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삽니다.

죽음은 멀리한다고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두렵고, 생각하면 끔찍하고, 죽음이후를 장담하지 못하기에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죽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 삶의 모든 것은 죽음부터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길로 가는 인생이기에 죽음부터 알아야 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죽음부터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자인 맹자 어머니의 지혜로운 교육을 말합니다.  맹모는 처음 맹자를 데리고 장의사 옆에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매일 장의사 흉내를 내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시장으로 이사를 갔더니 장사꾼 흉내를 내고 다닙니다.  그것도 아닌 거 같아 이제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자 비로소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모삼천지교’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현명한 맹모가 왜 처음부터 학교 옆으로 이사하지 않고, 장의사와 시장 옆으로 옮겨 다녔겠느냐는 것입니다.  맹모는 아들에게 제일 먼저 죽음부터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터로 이사해 삶의 현장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감으로써 삶과 죽음을 체험한 사람만이 참된 교육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39:4-5)  

염세적인 의미가 아니라 바르고 참된 인생을 위해 우리는 죽음부터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죽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알면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삽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라면, 죽음을 알고, 죽음을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알 때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아는 것이 믿음의 통로입니다.  죽음을 알면 신앙도 갖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생명의 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는 길을 죽음의 길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는 길, 생명의 길을 말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사는 길, 영생을 강조합니다.  이삭은 모든 인간이 가는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삭은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조'는 물론 아버지나 조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먼저 가 있는 백성들과 함께 했다, 합류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도 먼저 간 사람들과 다른 곳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곳을 '더 나은 본향, 혹은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그곳은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이고, 그곳은 사망과 죽음이 없는 곳이고, 그곳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미 가 있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이 들어간 곳입니다.  이삭은 이제 그곳으로 들어가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길로만 가지 않았고,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갔습니다.  바로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짓고 영생을 상실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도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단절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죽음을 알면서 영생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길이 없을까 찾고 또 찾으며 찾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영생의 길은 없었습니다.  죽음의 길은 알아도, 영생의 길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영생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으면 생명과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죽음과 사망의 길을 가는 인생들에게 생명과 영생의 길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믿으면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분이 돌아가신 곳을 '골고다'라고 말합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왜 골고다가 해골인지 여러 학설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곳이 예루살렘 변방에 위치한 곳으로서 실제 공동묘지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죽은 자들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고 해골과 뼈만 남은 곳이기에 '골고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곳이 처음 사람이었던 아담의 유골이 발견된 곳이라서 '골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곳의 지형이 해골과 흡사해서 '골고다'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맞는 지 잘 모릅니다.  그곳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사는 유대인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해골을 의미하는 골고다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돌아가신 골고다는 우리 모든 인생에 너무도 소중한 의미를 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 시간 한번 머릿속에 골고다의 십자가를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 해골들이 널려있습니다.  그 해골의 정수리에 십자가가 꽂혔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손과 발에서, 옆구리에서 하염없이 보배로운 피가 흘렀습니다.   주님의 피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십자가를 타고 해골에 흘러들어갑니다.  그러자 해골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보혈의 기운을 받은 해골들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사람을 살립니다.  죽은 송장과 같은 나를 살립니다.  보혈에 능력이 있습니다.  보혈로 살아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피가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영생의 길을 갑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살아나고, 저기에서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죽음의 길을 지나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가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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