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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를 기회로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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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시 23:1-6)


우리 교회에 오신 여러분, 특별히 오늘 처음으로 교회를 방문하신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중에서 3명의 전설적인 길치, 즉 길을 잘 찾지 못하고 헤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분은 오랫동안 이 병과 씨름하는 중인데, 백마마을의 진입로를 1년째 헷갈리고 있습니다. 최근 이 증세가 대단히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분은 청소년들을 주로 만나는 분인데, 본인이 들어갔던 건물에서 다시 나오면 모든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리는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길치의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이 분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집인 일산동구청 건너편의 오피스텔에서 교회까지 무려 4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작동을 하지 못해서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결국 그 네비게이션은 주인으로부터 처참하게 버림을 받고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지요.

길치들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뭔지 아십니까?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인생에 어떤 위기를 겪어보셨습니까? 

몇 년 전에 휴가를 즐길 때였습니다. 저녁에 숙소에서 쉬다가 서랍장에 성경책과 함께 낯선 불교경전도 있었습니다. 서랍 안에 예수님과 부처님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호기심에 불경을 펴서 서문을 보았습니다. 보통 책의 서문에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단히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메모를 했습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외에는 어느 누구나 무엇을 의지할 수 없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자신 뿐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아함경이라는 경전은 내 자신을 믿고 남을 믿지 말라고 한다. 무량수경은 네 스스로를 알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는 철저히 인간이 주체를 확립할 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불교경전을 읽는 것이 은혜로웠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불교 경전의 핵심을 보고 나니까 성경의 복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지요. 

불교는 사람이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을 합니다. 위기를 돌파하는 힘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요. 인생의 수없이 많은 위기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돌파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은 가장 잘 알려진 성경말씀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양을 치던 목동에서 한 나라의 임금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 다윗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언제 이 시를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잘 이해하려면 그의 전 생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롤러코스터같은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 마다 다윗은 유명한 이 고백을 되새김질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최근에 ‘위기’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국제적으로는 그리스의 재정위기로 인해서 어떤 여파가 생길지 많은 이들이 걱정합니다. 국내적으로는 부동산침체 위기와 남북관계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생태계를 염려하는 이들은 희귀동물이 무분별한 개발로 멸종위기에 직면했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 새로운 위기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성장을 하기 위해서 경영의 중요한 부분으로 위기관리 crisis management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잘 관리할 필요성은 기업만이 아니지요. 작게는 한 개인의 인생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요청됩니다. 분명한 것은 인생은 위기의 연속이기에, 위기를 잘 관리하는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런데 흔하게 사용되는 위기라는 단어의 원뜻을 아십니까? 보통 위기를 위험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위기(危機)는 위태함과 기회를 합한 단어입니다. 즉 위기는 위태함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위기를 나타내는 영어단어 crisis의 어원을 살피면 그 본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위기라는 말은 헬라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왔는데 이것은 병이 회복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분기점을 가리키는 의학용어입니다. 즉 위기는 죽음과 회복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를 경험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극심한 고통이 닥치는 인생의 위기를 ‘존재가 오그라드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정말 존재가 오그러드는 것 같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은 위기를 위험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기회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얼마 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친구 ‘A’가 죽었다는 부음이었지요. 이제 겨우 30대 중반에,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과 아내만을 남겨두고, 그 친구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밤샘작업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과로로 인해서 저의 친구는 허공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위기의 갈림길에서 친구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존재가 오그라드는 것 같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넘어지고 있습니까? 다른 종교를 비롯해서 많은 세상의 지혜서는 위기탈출의 열쇠는 인간 스스로에게 달려있다고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도움은 우리의 능력 바깥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위기를 위태함이 아닌 기회로 바꾸어내는 능력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연약함을 평생토록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의 위기를 책임지십니다. 다윗의 처음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고백을 뒤집어 읽으면 “나는 연약한 양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양들을 키워본 다윗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렇게 고백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니 마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양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구나.”  

시인은 자기 자신을 힘이 센 사자나 곰이 아닌, 광야의 양에 비유합니다. 생존의 문제로 늘 고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힘이 센 사자입니까, 연약한 양입니까?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비난, 허세, 흥분, 폭력성은 강자의 전유물이며 굽신거림, 수치심, 강박관념, 우울증은 약자의 전형적인 반응이죠. 그러나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폴 트루니에가 말하듯이, 저는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누구나 죄에 빠져 있고 패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단지 똑같은 위기들을 접하게 될 때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이처럼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연약한자라고 고백하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면 많은 인생들이 사자가 되고 곰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상추농사로 100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농장경영인 류근모씨의 <상추CEO>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농업 선배들, 그리고 자신에게 유기농법을 배우러 왔던 이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신을 망쳤는지 지켜봤답니다. 다들 농사가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을 팔려서 망하더란 것이지요. 정치에 열중하다가, 방송을 하다가, 공짜를 바라다가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삼천포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잠시 외도를 했던 그가 어떤 다짐을 한지 아십니까?

"아, 내가 초심을 잃었구나. 내 본분을 망각했구나. 나는 농사꾼이다.

방송이나 강의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생은 약자입니다. 그러나 연약함의 고백을 평생토록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윗의 앞선 왕이었던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위기관리에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본 것 아닙니까? 약한 자이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왕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넘보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손길은 사라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는 자신의 이성과 능력을 맹신하는 자에게는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책임지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양입니다.”

평생 이 고백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시다. 인생의 위기는 기회로 바뀝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이름에 생명을 거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과 3절에는 왜 부족함이 없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고백은 인생의 두 가지 위기가 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배고플 때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심”은 경제적 위기가 해결되었다는 말이지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것은 영적인 위기가 극복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위기의 대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문제가 위기로 다가오곤 합니다.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이기에 인간의 위기는 몸과 관련된 것이든지 영혼과 관련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귀가 솔깃합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지금 양들은 뉴질랜드의 풍요로운 풀밭이 아닌 해발 900m의 고산지대, 광야의 척박한 땅에 있습니다. 생존자체가 위기인데 어찌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는 거죠?

그럼 다윗의 삶은 아무런 위기가 없는 평탄한 인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험악한 인생 그 자체였지요. 미치광이가 된 사울왕에게 쫓기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군에게 쫓기면서 배고픔과 창칼의 위협 그리고 영혼의 피폐함의 위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는 4절의 고백은 그야말로 다윗의 생애를 제대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보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시편 3:2)

그렇다면 다윗의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고백은 위기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결코 좌절은 없다는 것을 결심입니다. 포기는 내 사전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싸늘한 현실 앞에서 다윗은 어떻게 부족함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3절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을 위기에서 승리하게끔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소년시절 경험한 그 이름의 능력은 이런 고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뒹굽니다. 하늘의 독수리는 시체를 뜯을  때를 기다립니다. 그때 적군의 거인장수가 조국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놀리면서 하나님을 저주합니다. “피래미들아. 덤벼라. 맞짱을 뜨자. 하나님을 믿는 찌질이들 덤벼라.”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장수 앞에서 한마디로 쫄았습니다. 그때 소년 다윗이 비장한 각오로 “아니 왜들 가만히 있는 겁니까? 내가 나가리다.” 큰형님이 뒤통수를 치면서 까불지 말라고 했건만 누군가 벌써 왕에게 지원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한 골리앗을 돌팔매를 가지고 맞서겠다는 다윗의 싸움은 이미 끝난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다윗은 승리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돌팔매질을 잘해서요? 아닙니다. 싸움을 하기에 앞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여러분, 그렇습니다. 위기 앞에서 좌절하고 있습니까?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위기를 맞서 싸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지금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한 상황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줍니까?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 이름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을 가로막는 골리앗은 쓰러집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그 이름 앞에 사라지고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세 번째 법칙! 영원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도리어 새로운 창조적 기회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이 이 시를 쓰면서 생각한 원수는 누구였을까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죽이려고 한 미치광이 사울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울은 임금인 자신보다 더 인기가 많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대를 삼 천명이나 뽑고 직접 인솔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3000명 추격(삼상 24:2)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지요. 

한번은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사울을 피해서 어느 광야의 굴 깊은 곳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추격에 지친 사울이 잠시 쉬려고 바로 그 굴속으로 혼자 들어온 것이지요.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며 다윗의 참모들이 말합니다. 

“다윗 선생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결행하십시오.” 

그러나 가만히 듣던 다윗은 잠든 사울의 겉옷자락만 베고 물러납니다.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왕을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왕에게 복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최악의 위기상황을 최고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데도 실행하지 않은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한다는 믿음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사실 다윗은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죄앞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꿰뚫어본 원수의 정체는 바로 죄와 죽음의 세력이었습니다. 다윗은 죄와 죽음이야말로 진정 인생의 원수임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미리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29-33) 

다윗은 부활을 알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썩어 없어질 인생의 위기를 썩어 없어질 육체의 가치관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나라-부활의 가치관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을 죽여서 똑같은 소인배가 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나라의 용서와 화해를 선포하며 더 멋진 창조적인 기회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멋진 위기탈출의 모습입니까? 영원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기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한 원수 앞에서 나를 위해서 차려주신 잔칫상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이라는 원수 앞에서 베풀어주신 잔칫상을 보십시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상을 베푸셨습니다. 

“마시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려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이며, 먹으라!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 

바로 그 상에서 주님의 피와 몸을 나눠 먹은 저와 여러분은 죄와 죽음을 이기는 복을 경험하였습니다. 부활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는 기쁨과 환희로 외칩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한신대 학장을 지내신 고 김정준 박사는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폐결핵 4기로 죽어가던 자리에서 "나는 주님의 것이외다."라는 시를 남깁니다.
 
목사님은 어느 봄날 어떻게 들어왔는지 방안에 들어온 나비가 창문에 갇혀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갈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 갇혀 있는 나비를 두 손가락으로 잡아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그리고 나비와 같이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는 요양소 4병동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절망할 자리에 서있는 나비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살 수 있다는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존재가 오그라드는 위기의 자리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외다.”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사나 죽으나 영원하신 주님의 것이라는 이 진솔한 고백은 인생의 위기를 이겨낸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위기의 연속인 굴곡진 인생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이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고백은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인 139편의 구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디에 거하든지 평생토록 반드시 동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하시겠습니까?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원하신다면, 다윗의 결론을 여러분의 결론으로 작정하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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