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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 신앙 (마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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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신앙 (마 16;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마16;1-4)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말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여러분, 표적을 구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잘 못하는 것입니까? 

 1.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사람이 숨을 쉬는 것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안 되는 것처럼, 숨 쉬는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祈禱)가 다른 말로 하면 ‘표적’을 구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는 기도는 사람마다 제목이 다르고, 또   환경이 변할 때마다 제목이 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같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여기서 역사하심을 보여 주십시오’ 하는 것 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Here & Now'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기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가 우리들이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표적입니다.  

‘고영순 원장’님을 모시고 간증을 듣고, 침을 맞았습니다. 침을 맞으려고 많은 분들이 애를  쓴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의 증거를 체험하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표적이 많이  드러나는, 많은 믿음의 증거를 가지신 저와 여러분들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2.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번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시며 믿음을 불어 넣어주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불신앙의 이방인들에게도 확실히 보여주십니다. 출애굽 할 때의 10가지 기적이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들이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적’입니다. 이 엄청난 표적을 이스라엘사람만이 아니라 애굽사람들까지 그 10가지 기적과 홍해의 기적을 자기 몸으로, 자기 목숨으로 체험을 하였습니다.   

또 기드온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사사로 부르셨는지, 그 부르심을 확신하기 위하여 양털을 놓은 것도 유명한 일입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삿6;37-40) 

하나님께서는 양털을 놓는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기드온 에게만 표적을 경험하게 하셨나요?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표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아니요.  우리들도  이미 수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려서 현대의학도 포기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 기적적으로 완치되는 간증은 하도 자주 들어서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간증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눈을 끄는 간증이 될려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전국  교회를 돌면서 간증을 합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또 살아서 천국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도 있지요.  우리 교회에 2번이나 오셨던 ‘구순연 집사’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는 것을(大傳기도원, 고영순 원장) 바로 이번에 우리는 직접 보았고, 만나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거짓말입니까? 다 속임수 인가요? 아니지요.   모두 다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 번 당신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우리 자신들에게도 표적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이미 여러 번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간증할 것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내가 바로 애굽 사람들이고, 내가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10가지 기적을 애굽 사람들도 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신을 섬겼고, 여호와신앙으로 바꾸지 않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3끼 식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로 하루를 보내는... 그런 넘치는   기적을 보았고 경험했지만... 그들은 철저히 불신자로 남았습니다.  몰라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보고도, 직접 체험을 하고서도 안 믿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고집스러울까요? 왜 이렇게 변화가 더딜까요? 세상이 여전히 더 좋은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보다는 계속 내 고집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표적(標的)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아(自我)가 문제입니다.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또 다른 표적을 보여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신앙, 순종하는 신앙으로 바꾸어져야 하겠습니다. 

 3. 불순종을 넘어서 대적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표적 앞에서 순종을 하느냐, 아니면 여전히 고집스럽게 세상에 미련을 가지느냐 를 넘어서.. 표적을 경험하고서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이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마음은  첫째,  겸손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미 예수님조차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인정을 해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고,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느냐, 바알세불이 되느냐 하는 것이 누구에게 달렸나요? 나에게 달렸습니다. 내 맘 입니다. 내가 결정을 내립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왕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진짜 그리스도이시더라도 내가 인정할 때까지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조차 자기의 판단 아래로 두는 이런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도 이런 뿌리 깊은 교만이 있습니다.  많은 설교를 듣고, 많은 경험을 하고, 수많은 증거를 보았는데도 그 마음이 순종하기를 주저합니다.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도전을 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이런 교만한 마음입니다.
 
왜 사람들이 순종하기를 그렇게 싫어할까요?  둘째로, 이런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한 마음이라서 그렇습니다.  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죽이려고 눈이 벌갰을까요?  그것은 이미 그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기득권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자기가 가진 것들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들 손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자기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마음이 ‘절대로’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서’ 가진 것을 더 많게 하려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랬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초기에 종교적인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던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 있는 신앙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이러한 것들이 형식주의에 빠져 스스로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가장 극심하게 핍박을 했던 자들이 되었고 그들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살고자 했으나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결국 유전과 형식에 매여 사단의 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 가진 것을 절대로 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탐욕의 마음입니다. 

성도여러분, 교만한 마음,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의 마음은 표적을 보고 이런 말을 하게 합니다.  (마9;33,34)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또한 교만한 마음,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의 마음은 이런 말을 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11;20-24)  

탐욕으로 가득한 마음은 회개를 거부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며, 심판을 초래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커다란 부끄러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함부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심판하시기전에 이미 일흔 번씩 일곱 번 이상의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적이나. 표적을 경험하지 못해서, 표적이 부족해서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면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나요?  

①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 합시다.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셔서 많은 기적과 이적과 증거를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②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많은 표적을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이제부터는 순종하겠습니다. 복종 하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애굽 사람들처럼,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  

③ 교만한 마음, 탐욕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주의해서 보아야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마 16:4) 라고 기록을 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표적,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최후의 표적인 ‘요나의 표적’을 보았고,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을 이미 믿고서 교회 다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증거들을 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표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신 말씀처럼,  이제는 사람들이 믿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표적입니다. 우리를 보면 불신 이방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구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증인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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