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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24) : 엠마오 (눅 24:13-17,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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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4) : 엠마오 (눅 24:13-17,30-35)


1979년 12월 11일 이미 추워가기 시작한 북 유럽 오슬로 공항에 인도 의상 사리를 걸치고 샌들을 신은 키 작은 여인 마더 테레사는 인간이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인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노벨 수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수상 소감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중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꼭 세 달전 9월에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고해 신부 마이클 반 데르 피트(Michael van der Peet)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신부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지금 침묵과 공허함만이 가득합니다. 저는 눈을 뜨고도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귀를 열어 듣고자 하나 (그분의 음성을)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하고자 혀를 움직이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믿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 마음 깊은 곳 거기엔 온통 공허와 어둠뿐입니다. 제안에는 해답 없는 의문이 너무나 많이 살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 마더 테레스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진짜 그녀의 모습일까요?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승리 로운 삶을 사는 성자에게도 깊은 회의와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마더 테레사의 불신앙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정직한 내면과 치열한 하나님의 임재를 탐색하는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영성가들은 이런 경험을 <영혼의 어둔 밤>(dark night of the soul)이라고 말합니다. 진지한 성도들은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이런 어둔 밤을 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밤길을 어떻게 잘 지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해 떨어진 예루살렘 성을 뒤로 하고 엠마오 길을 걷는 예수님의 두 제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고 기록합니다. 문제는 누가가 언급한 엠마오가 오늘의 어떤 장소이냐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후보지는 네 곳이나 되어 그 불확실성의 문제로 성지 순례지에서 빠지지만 가장 유력한 곳으로 두 곳을 꼽습니다. 한 곳은 성경의 증언처럼 예루살렘 북서쪽 25리내에 위치한 지금 ‘쿠베이베’(Qubeibeh)라는 곳(전승에 의하면 글로바의 집이 여기에 있었음)이고, 또 한 곳은 오늘의 라트룬 언덕에 위치한 니코폴리스(Nicopolis)라는 곳인데 고대부터 이곳은 엠마오와 발음이 유사한 암마우스(Ammaous/아랍명,Amwas)라고 불리웠던 곳입니다. 

여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곳 엠마오로 두 제자는 신앙의 낙심 자가 되어 해지는 저녁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에는 깊은 회의의 어둠이 깔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 그 누구에게도 이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서 엠마오 길의 레슨은 무엇이겠습니까?

1. 성도의 여정에도 ‘영혼의 어둔 밤’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레슨입니다.

요한16:32에 보면 예수님은 일찍 이런 영혼의 밤길이 자신과 제자들 앞에도 기다리고 있음을 예언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정확하게 이 예언대로 지금 믿음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을 접고 각각 흩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눅24:18에는 이 제자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글로바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아들 시므온이었는데 그는 그의 종형 야보고보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 제2대 감독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이 두 사람은 12제자 중에는 들지 못했으나 중요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 모든 희망을 등진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그들은 얼굴에 ‘슬픈 빛’을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었다고 기록합니다. 모든 의욕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한 걸음을 믿음으로 옮기는 것조차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까? 미소와 찬양을 잃어버린 것이 꽤 오래 된 분들이 계시지 않은가요? 기도의 응답도 없고 과연 하나님은 계시기나 한 것인가? 란 물음이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그런 ‘메마르고 고독한 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성도의 여정에 이런 밤길이 있어야 할까요? 영성가들은 대체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초기 신앙에는 감미로움이 넘치고 하나님의 위로와 임재의 체험이 넘쳐난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영적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초기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중기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이런 하나님의 부재의 체험과 싸워야 하는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야 말로 진지한 영적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나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도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운 느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때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대면해야 할 시간이란 말입니다. 물론 위로의 느낌도 찬양의 감동도 없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실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인가요? 엠마오 길의 또 하나의 레슨은 무엇입니까?


2. 영혼의 어둔 밤길에도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레슨입니다.

본문 15-16절을 보십시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그들과 가까이 이르러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주님은 분명히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다시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영어에는 이런 경우를 가르쳐 ‘눈이 열리는 체험’(eye-opening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기도하는 순간이 아니라 일상의 식탁에서 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랍게 합니다. 기적은 기도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는 식탁에서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교회당서만 아니라 우리 집에서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사실 한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교회당에서 예배할 때만 기도할 때만 일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좁게 이해한 적이 많았습니다.(성과 속을 나누는 이원론의 영향으로) 그러나 이제 개혁자들은 일상의 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중세기의 전통적인 성화가 아닌 일상의 정물이나 자연을 그릴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소위 17세기 화란파(Dutch School)화가들을 통해 일터의 하나님, 가정에서의 하나님이 증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속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입니다.

유명한 렘브란트도 이 <엠마오에서의 식사>라는 그림을 통해 이 식탁에서 눈이 열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하인이 음식을 서브하는 순간 눈이 열린 두 제자가 각각 놀라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카라바지오의 그림은 더 인상적입니다. 수염도 없는 평범한 청년 예수님, 그러나 그분을 예수님으로 알아차린 두 제자의 놀라움의 인상이 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예배의 자리에서만 아니라 식탁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후 청교도들은 그들의 식탁 벽에 이런 인상 깊은 글자판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식탁의 손님이시고 모든 대화를 듣는 분이시다”(Christ is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the silent listener to every conversation) 이 달의 추천도서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라”에 보면 인도 땅 마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회를 방문한 저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거기서 모든 봉사자들은 요리, 청소, 식사 준비, 배식, 세탁, 환자 돌봄등 모든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일과 함께 기도에 더욱 열심이었음이 그를 감동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루에 여섯 번씩 일을 멈추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기도가 일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일과 기도가 분리되지 않았고 일속에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레슨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를 만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제발 눈을 뜨고 나를 보라. 네가 걷는 길에서도 네가 밥먹는 식탁에서도 너는 나를 만날 수 있다고.”


3. 이 어두운 밤길은 소명의 새벽길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레슨입니다.

소위 모든 신앙의 체험은 결코 영속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삶의 변화입니다. 식탁에서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의 시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본문 31절을 자상하게 읽어보면 예수님은 얼마 후에 자신의 모습을 다시 감추십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느니라” 만일 부활한 예수님의 현존이 그들의 시야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이 이상한 현상에만 집중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그들에겐 그분이 살아계신 분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어떻게 하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시 그들이 받은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그분을 증거해야 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32-33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고 (33)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다음 절에 보면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사셨다고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의 절망의 황혼(sunset)은 그들에게 부활의 황홀한 새벽(sunrise)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엠마오가 아닌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라>는 책을 쓴 메리 포플린(Mary Poplin)은 개신교 신자였지만 그녀의 나이 40대 초반 대학 교수로 예수님을 만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미국 텍사스에서 인도 캘카타의 마더 테레사가 일하는 곳으로 2달간의 자원봉사자로 떠납니다. 맬콤 머거리지라는 기독교 작가의 책을 읽다가 마더 테레사가 일하는 인도의 사랑의 선교회는 단순히 사회사업 센터가 아니라 “복음을 살아가는 곳”이란 말이 그녀를 자극하고 도전한 것입니다. 그때는 마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두 해전이었습니다. 

두 달간의 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가는 메리에게 86세의 마더 테레사는 미소를 머금고 메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세요.”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먼 곳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가 훨씬 쉽지요. 그러나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리에 가정에 일터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져 오세요. 그곳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니까요. 당신에게 보고자 하는 눈이 있다면 세계 도처에서 캘커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부디 당신의 캘카타를 찾아 가십시오.” 

메리는 자기 고향 미국 텍사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캘카타는 마더 테레사에게 명한 곳이었지 자기의 사역지는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가득 찬 대학 캠퍼스가 바로 그녀의 엠마오요, 캘카타인 것을 발견하고 대학교실로 되돌아갑니다. 이제는 막연히 대학 교수가 아닌 섬겨야 할 상처받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그들의 손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잡아 주기로 결심하면서 말입니다. 그녀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녀는 살아계신 주님을 보게 되었고 그녀를 기다리는 젊은 영혼들을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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