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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을 위한 분투 (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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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위한 분투 (빌 1:29)


연어는 회기본성, 즉 자기의 모천을 본성적으로 기억하여 돌아오게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가 돌아가야 할 목적지이기 때문에 열렬히 회기 한다. 이렇듯 우리가 인생을 살 때에 목표가 있지 않으면, 고생이 있을지는 모르나 고난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고통을 가리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 안 에서 정해진 목표라면 그 고난은 고스란히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된다. 그것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 때문이다. 

사도가 미결수의 몸으로 옥에 갇혀서 본문의 고백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눈물의 편지를 쓸 수 가 없었을 것이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몸부림친 결과로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자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뜻을 향하려 하면 거세게 반항한다. 우리가 예수께 속한 사람임을, 우리의 삶의 목표가 예수 안에 있음을 뚜렷이 할 때, 세상은 많은 반감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다. 

그런데 여기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던 것처럼, 신자의 삶에는 희생이 따른다. 은혜 안에는 반드시 목표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혜에 따른 소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는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단지 은혜가 떨어져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다분히 자기중심적 갈구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으로 은혜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이다. 그것이 목표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매함으로 인해, 혹은 자기중심적 사랑이 우세하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으로 인해 그 은혜는 금방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올바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부패하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 받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계획이 있다.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섬길 수 있는 섬겨야 하는 사명을 주신다. 그 사명이 바로 목표가 된다. 그 사명과 주신 목적은 수시로 발전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에서 집사로,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진전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큰 자가 아니더라도, 당신께 충성되게 사는 종에게 더욱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큰 사명들이 맡겨지는 것이다. 받은 바 은혜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은, 자신을 존귀하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당장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하게 살았을 때에, 결국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요긴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한편, 이렇게 은혜는 소명을, 소명은 목표를 가져다주는 가운데 많은 고난을 만나게 된다. 마치 헤엄을 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매우 힘들듯이 목표를 따라 살려고 할 때 엄청난 저항을 만나게 된다. 이 저항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반대편에서 오는 저항이다.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유혹의 역사가 있다. 바로 역방향에서 오는 고난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역방향에서 밀려오는 고난을 감당해야 했다. 이같이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는 고난을 만나보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은혜가 큰 만큼 소명도 확실하여 그 목표대로 살려고 분투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이세상의 세력들과 내안의 부패하는 역사의 힘은 크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오히려 은혜를 받지 못한 때보다 외로움이 크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외로움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은 모두 이렇게 역방향으로 부터의 엄청난 고난, 시련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같은 방향으로 나와 함께 가는데도 그것이 고난이 되는 때가 있다. 흘러가는 강물에 배를 띄우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강물이 너무 느리면 빨리 가고자하는 배를 가로막게 되듯이 말이다. 본문의 사도가 소명을 받고 생명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며 열심히 일하려 했으나, 육체의 부족함으로 인한 저항을 느꼈던 것도 마찬가지의 것이다. 또한 말씀을 열어보이고자 하는 소명은 있으나 아는 것이 너무 없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가고자 하나, 못 미치는 자신의 능력들이 같은 방향에서의 저항이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저항들 모두 고난을 가져다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주님을 잘 믿기 위해서 주심이다. 사도들이 고난 중에도 기뻐했던 것은, 그것이 주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특권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도 이처럼 고난을 특권처럼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홀로 두신다는 착각으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걷어치움으로, 그 의 은혜도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진리를 갈구하며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이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해서 이왕이면 하나님께 보탬과 영광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눈이 그렇게 빛남과 동시에 다른 이에게 겸손히 배우려 한다. 그러나 그 섬김이 충성되기만 하면 안 된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함 받아야 되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 것은 인격의 상태, 잘한 것은 주님의 마음에 충분히 들도록 지혜로이 행한 상태이다. 지혜 없이 충성만 있으면 주님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며, 지혜는 있으나 충성되지 않으면 그 마음에 합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있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속히 바람처럼 지나간다. 연습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 기회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다. 감당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맡기신 분이 주님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언젠가 주님이 반드시 부르시기에, 감사히 지금의 맡겨진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과 원망 등의 대적을 일삼으며, 육체의 더러움을 따라 살며 휘청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홀딱 벗기시어 심판 날의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왜 우리를 주께서 부르셨으며, 그 자리에 우리를 세우셨는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그 사명으로 인해 불타오르고 있는가. 희어져 추수할 것이 많아, 주께서 다양한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우리의 감당치 않음으로 주님께서는 너무나 아파하고 계신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선명하게 보여주실 것이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슬픔이 되었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건져내신 그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명도, 거룩한 행실, 감사도 없이 정욕과 분쟁 등에만 엉켜져서 몸만 예배에 나올 때에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착한 성도로 돌아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따라 살려고 할 때, 만나는 것이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에게만 그러한 고난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한 명 한명 진실한 신자들도 동일하게 받았던 고난인 것이다. 지푸라기 같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선가 그 사명을 붙들고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잘 감당케 하시려고 은혜와 환경, 건강, 자원 등을 다 주신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신 그 많은 은혜의 자원들, 이 땅의 많은 복의 자원들을 사명을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은혜받은 마음은 부패하고, 사명은 팽개치고 육적인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슬퍼하신다. 결국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가 되는 것이다. 분투하는 싸움이 성도들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갈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는가.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은,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사명이 소중히 여기셨기에 그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별명은 충성된 증인이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보셨고, 자신의 피를 쏟아 헌신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셨기에 그것을 감당하며 사셨던 것이다. 

당신은 은혜 받은 사람인가. 이 사명은 반드시 이뤄져야한다는 절박한 간절함으로 떤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는 신앙의 위인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여 그것을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어,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없고 신앙이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고난을 피하기 때문이다. 과일 열매하나도 환경과 싸워 견뎠을 때에 좋은 영양성분을 함유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싸움과 투쟁의 몸부림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는 영적 전쟁이며, 그 신분은 싸우는 군인과 같다. 이 세상을 순례자로서 수없이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싸움 없는 삶은 곧 타락한 삶이다. 주님주신 그 자리로 돌아가 거기서 싸우는 참 성도가 되길 바란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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