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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에 십자가가 세워졌는가? (창 50: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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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 십자가가 세워졌는가? (창 50:14-23)


성령집회 때, 전도해야 할 가족이 있는 교우들을 위한 특별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 교회에서 특별히 손수건을 준비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준비한 손수건이 모자라서 당황했습니다. 그만큼 가족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정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들은 먼저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분명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 집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가정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 구원은 단순히 가족들이 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동생을 종으로 팔아버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이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가정 구원을 단순히 가족들이 교회에 다닌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야곱의 가정 문제 뿌리는 부모의 편애였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첩을 합하여 네 여인에게서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열한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을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 말은 요셉을 장자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이렇게 편애한 이유는 자신이 진정 사랑하던 여인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런 편애는 부모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야곱의 부모 이삭과 리브가는 많지도 않은 두 아들도 편애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꿰차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치맛폭으로 휘감싸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7-28절을 보면 이삭은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사냥하는 에서를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이 가정 일을 잘 돌보아 준다고 사랑이 더 갔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니 우습지, 우리 자신도 결국 이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자식도 자기에게 잘해 주는 자식이 더 사랑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자녀가 더 사랑스럽다, 밉다 하는 감정을 재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삭과 리부가의 자식 편애로 인하여 둘 밖에 안되는 아들들이 서로 속이고 죽이려하는 사태로 몰고가 결국 야곱이 도망을 쳐 20년 동안 이산 가족으로 지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야곱 자신도 자식을 편애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무서운 죄성이고 모든 가정 문제의 뿌리입니다.

야곱의 열 아들은 요셉을 애급에 팔아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들이 마음을 합해서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 자신이 이런 거짓말로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거짓말도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아내를 동생이라고 거짓말하면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습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결국은 죄의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죽은 후 야곱의 가정은 쪼개질 대 위기를 맞이합니다. 사실 야곱의 후손들은 적어도 넷 이상으로 갈라질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는 넷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다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요셉이 그동안 아버지 때문에 참고 있었을지 몰라,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우리에게 복수할 거야.” 

이러한 형들의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형들이 용서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요셉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 왜 응어리가 없었겠습니까? 지금은 총리 자리에 올랐지만 자기들 때문에 열일곱살 부터 종살이, 옥살이 말할 수 없는 배신들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우울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이국 땅 애굽에서 고생 고생해서 일구어 놓은 터전 위에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과 그들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구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진정 자신들의 죄를 뉘우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자기들의 죄를 뉘우친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들은 요셉보다 자기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다시 한번 용서한다고 선언합니다.  

(19-21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의 용서로 야곱의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한 민족이 됩니다. 용서가 가정을 구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들었고 믿었다고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 복음을 잘 알아도, “용서받았다, 구원받았다” 노래해도, 실제로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로 용서받고 지옥에서 구원받은 자임을 믿어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하게 될 때 그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이 다 교회에 다닌다고 가정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패가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지식이 형제들이 진정 십자가의 용서로 서로를 용서하게 되었을 때, 그 가정은 구원받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용서는 특별한 용서입니다.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님에도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용서받은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용서가 우리 가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먼저 회개해야 용서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무덤까지 갈 것입니까? 천국까지 그 감정, 그 미움, 그 응어리 간직하고 갈 것입니까?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은 것 역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아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한국 이스라엘 성회가 열렸습니다, 마지막 날 인도자인 예루살렘의 24시간 기도의 집 대표인 릭 라이딩스 목사님이 유대인 목사와 아랍의 목사님을 강단으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유대인 매튜 목사 아랍인 스티븐 목사가 서로 끌어안고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메튜 목사님이 기도했습니다.“하나님,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민족과 혈통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갈등하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백합니다. 이스마엘은 우리의 형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몸임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탈북자와 한국 전도사님이 올라와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목사님과 한국 목사님이 올라와 서로 고백과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한국 목사님께서 울먹이면서 기도하였습니다.“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가 일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우리 한국 민족이 일본 사람들의 죄로 고통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님께서 강권하심을 느낍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회개합니다. 그 동안 미워했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국인 자매가 기도했습니다, 그의 할머니가 일본 사람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아버지는 고아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가정이 파괴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사과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인데, 일본 사람들을 유독 증오했음을 사과합니다, 증오가 우리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와 증오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미워했던 것 조차 죄임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용서는 해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용서의 은혜를 누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악에 대하여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요셉이 은혜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억울한 일, 두려운 순간, 앞이 캄캄한 일을 겪으면서 그는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고통과 위기를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매번 경험하였습니다. 형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고, 노예로 팔아먹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셔서 가뭄 속에서도 온 가족을 구하고 이스라엘의 큰 역사를 이루어 가는 기회로 삼으신 것을 깨닫고 형들을 용서할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21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한 영성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최용덕씨가 작곡한 ‘오늘 나는’ 이라는 찬양을 듣고 한없이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1절>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지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2절>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 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나중에 알았지만 최용덕 집사님이 이 찬양을 만들게 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집사님과 복음성가에 대한 논쟁이 일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복음성가에 대하여 찬송가 보다 못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최용덕 집사님은 너무나 화가 났었습니다. 그런 후 화해를 청해야 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망설였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교회도 먼저 나온 선배라는 생각에 끝내 먼저 손해보기를 거부하고 있던 어느 날, 그 집사님이 먼저 용서를 구하기에 화해해 주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그 집사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을 찾은 집사님은 그 친구 집사님의 사모님으로 부터 일기장 한 페이지를 보게 됩니다. 그 페이지에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분은 예수님이고 그 다음으로는 자신을 전도한 최용덕 집사님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최용덕 집사의 눈에 눈물이 계속 흘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여진 복음성가가 바로 "오늘 나는" 이라는 복음성가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가정에 진정 용서의 십자가가 서야 합니다. 

인터넷 교회에서 교회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 정말 남겨두고 싶은 글들을 모아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책자를 내었습니다. 이번 3호에 김지연 집사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시댁에서는 6남매 맏며느리인데다가 친정에서는 두 딸의 장녀라 홀로된 친정 어머니와 시아버지 모시는 일로 마음 고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몸이 아프실 때, 집에 모셔야 할 절박한 사정이었는데 시누이의 반대로 두번이나 거절을 당해 모셔올 수가 없었답니다. 그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분했는지 참을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미움을 품고 3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시아버지가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아 집에 모셔야 할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 때 친정 어머니가 아플 때 당한 일이 생각나 당연히 모셔야 함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너희도 당해 봐.’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했답니다. 그 때부터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특히 예배 때마다 선포 되어지는 말씀들은 정말 집사님을 힘들게 했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으로 설교할 때면 너무너무 괴로웠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나 그 말씀이 은혜가 되기보다 고통이 되더랍니다.

“예수님, 내 안에 사시지 마세요.”하였답니다 “저는 절대 아버님을 모실 수 없어요!”예수 믿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답니다,‘예수 안 믿었으면 내 맘대로 할텐데. 죄라고 생각 안하고 찔림도 없었을텐데.’.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감동을 거절하려고 애를 썼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하셨답니다. 일주일을 버티다 항복했습니다. 그 대신 “주님,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도와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감당케 하셨답니다. 

시아버님이 치매까지 있으셔서 며느리인 자신을 보호소 아줌마로 알고 눈치를 보실 때면 가슴이 아프다가도 대.소변 기저귀 가느라고 며칠씩 밤을 세우게 되면 여지없이 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매일 목사님의 말씀으로 달래주셨답니다. 그렇게 한달 이상 아버님은 병마와 자신은 마음 속의 자아와 싸우며 지내던 중, 잠깐 정신이 돌아온 아버님은 복음을 받아들이셨고 집사님의 손을 잡고 그 동안 수고했다며 고생했다며 미안했다고 말씀하더랍니다. 그 날 시아버지와 참 많이도 울었답니다. 아버님이 아프신데도 자신의 마음의 상처 때문에 빨리 모시지 않고 고생시킨 못된 생각을 했음을 고백하였답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 시아버지는 집사님의 손을 잡고 불러드린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이 찬양을 들으시며 천국에 가셨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고통스런 마음을 품고만 지내면 속이 썩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께는 다 털어 놓아도 됩니다. 다윗도 그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억을 십자가로 처리해 주십니다. 
믿고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미운 마음, 고통스런 마음을 거부합니다. 내 주님이 이미 나를 용서해 주셨다. 이제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해결되었다. 미운 마음 고통스런 마음 기억에서 사라져라!”  

가정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 십자가에서 용서가 강같이 흘러나오는 가정이어야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용서의 십자가가 역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용서의 십자가가 역사하고 있습니까? 교패만 붙여놓고 십자가는 치워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왜 가족끼리 미워하고 마음이 갈라진 채 살아야 하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왜 이렇게 힘들게 어둡게 무겁게 살아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 시간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편과 아내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자식입니까? 형제입니까?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생각 속에서 그 사람의 손을 한번 잡아보십시오. 손을 잡아주십시오. 따뜻하게 잡아주십시오. 

♪ 1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지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유가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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