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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21) : 대제사장의 집 (눅 22:54-62) -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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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1) : 대제사장의 집 (눅 22:54-62)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은 모두 ‘모윤숙’이란 이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윤숙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한국 문학사에서 ‘애국시인’과 ‘친일시인’이란 전혀 상반된 두개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속 인구에 회자될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그리고 6.25전쟁 이후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세대에게 모윤숙은 ‘렌의 애가’로 그 고달픈 시대의 젊음의 낭만을 대표하는 서정을 남겼습니다. 

“시몬, 그대는 들리는가? 낙엽 밟는 소리를/나는 당신과 함께 낙엽이 떨어진 산길을 걷고 싶소/시몬,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오솔길에서 낙조를 바라보며/사랑을 속삭이던 그 곳을 다시 걷고 싶소” 

나이 많은 분들 중에 젊은 시절 이 시를 읖조려 보지 않은 분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본래 ‘렌의 애가’라고 말할 때 ‘렌’은 아프리카 숲속에서 홀로 우는 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시몬은 잘 아시는대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의 일생은 어쩌면 렌의 애가의 주인공처럼 손가락질과 박수를 함께 받은 굴곡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승 예수님을 배신한 흔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해 슬픔의 애가와 기쁨의 애가를 함께 남겼던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몬 베드로가 이 슬픔의 애가를 부른 곳이 대 제사장의 집 뜰이었다고 증언합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마태26:57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가야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집 뜰에서 피워진 숯불 가에서 깊어가는 밤 베드로는 그의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가슴 아픈 역사를 남기게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해 보면 시온산 남동쪽 기드론 계곡과 힌놈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과거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터로 알려진 이 곳에 1930년대에 세워진 ‘베드로 통곡교회’(Church of St.Peter in Gallicantu)가 서 있습니다.(451년 비잔틴 시대 최초의 교회가 있었던 곳) ‘갈리간투’라는 말은 라틴어로 ‘닭의 울음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교회당 중앙 돔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위에 닭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집은 법정 역할을 하기도 했고 따라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여기서 고문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교회 지하에 예수님이 갇혀 계시던 동굴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그것이 궁금합니다. 
본문은 적어도 제자 베드로의 실패와 재기의 추억을 각각 두 가지로 정리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제자 베드로가 슬픔의 애가를 부른 이유

1)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간 때문입니다.

5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 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 어떻게 따라 갔다구요? <멀찍이>-맞습니다. 멀찍이서 따라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등은 가까이서 주님의 마지막 행보를 지키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서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찍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는 주인 되신 예수님을 가까이 따름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약4:8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364장)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코너에 몰리면서 그분을 가까이 함이 손해라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단절도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 멀어지다가 마침내 파경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과 주님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날마다가 그분을 가까이 하시는 하루하루이십니까? 아니면 요즈음 조금씩 그분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요?

2) 속화된 무리들과 함께 한 때문입니다.

55절을 읽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자리 잡기 시작한 베드로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비극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의 안티 예수의 군중심리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그는 축복의 자리를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1:1을 기억하십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위해서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들과의 접촉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근원은 성도의 공동체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셀 공동체를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사자는 정글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새는 하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모임, 교회는 우리의 삶의 젖줄이요 성숙의 마당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어느 사이 제자들의 공동체를 떠나 안티 예수의 무리 가운데 주저앉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7절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러나 다행한 것은 이것이 그의 삶의 마지막 노래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밝아오는 새벽 또 다른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의 애가가 아닌 회개의 애가요, 사랑의 애가요, 기쁨의 애가였습니다.


II. 제자 베드로가 기쁨의 애가를 부른 이유

1) 주께서 그를 주목하신 때문입니다. 

61절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이것이 그의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그때 제자 베드로를 주목하시던 예수님의 시선은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한없는 자비와 긍휼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주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베드로는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제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락한 제자, 스승을 배신한 제자를 향해서도 주님은 그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한결 같으신 주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를 동일한 시선으로 주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나도 요나처럼 주님의 존전에서 도망가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아니 베드로처럼 나는 예수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주님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 때문입니다.

다시 61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성도의 타락과 넘어짐은 많은 경우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등한히 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치 않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타락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지킬 뿐 아니라, 넘어짐의 자리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에너지요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면 늘 방언이나 예언 등의 은사부터 떠 올리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성령의 역사를 아십니까?

요한14:26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의 중요한 사역이 그때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십니다. 그러나 생각나게 하려면 미리 우리 마음에 기억해둔 말씀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것이 말씀 묵상과 말씀 암송의 중요성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 오르는 순간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본문 62절입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 통곡으로 그는 주님을 부인했던 모든 죄책을 씻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새 노래, 이제 더 이상 슬픔의 노래가 아닌 기쁨의 노래, 사랑의 애가를 부르며 주님의 사역의 장으로 돌아옵니다. 이 날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흘려진 베드로의 통곡의 눈물은 자신을 살리고 주의 몸된 교회를 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지난 시대의 영성가들은 성령의 은사중에 하나로 ‘눈물의 은사’(gift of tears)를 말해왔습니다. 사막 교부들은 “눈물이 흐르면 우리 마음의 사막에 생명의 비가 내린다. 그때 우리 마음의 사막에는 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은혜의 꽃이 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막에서 살고 기도하며 사막의 위험을 잘 알던 그들은 “사막의 가장 큰 위기는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막의 건조함보다 더 두려워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은혜의 눈물이 메마른 마음이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신 100살을 넘기신 방지일 목사님(한국 최초의 중국 선교사, 평양 대부흥 운동 당시의 평양 장대현 교회의 전도사요 증인)은 최근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책을 펴내셨습니다. 이 책의 한 대목을 읽어 보겠습니다. “눈물은 내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무지개를 보여 주기도 하고 살게도 한다. 눈물의 사람이 되어 강팍한 것이 다가오지 못하게 됨도 느꼈다.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내 기도의 한 제목이다. 

눈물은 억지로 흘리지 못한다. 의지적으로 울게 되어 배우 노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깊은 눈물은 흘리고자 해서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눈물 흘리는 것도 은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 역시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눈물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은 비관론자가 되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눈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게 해달라는 말이다. 눈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지름길인 것이다.”(pp.30-32)

유명한 화가 엘 그레코(El Greco)의 <베드로의 눈물>을 감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왼쪽 팔목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천국 열쇠를 건채로 그의 두 눈은 허공의 함 점을 우러러 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새벽 첫 닭이 울면 일어나 기도하고 늘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 이후 울보가 되었고 너무 울어 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항상 짓눌려 있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오순절 부흥이 일어나던 날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고 설교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하며 그가 “주 예수님,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고 고백하는 순간 갑자기 통곡이 쏟아져 나왔고 그리고 바로 그때 다락방에 모인 모든 회중들에게서 가슴을 쥐어뜯는 통곡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이 거룩한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방지일 목사님처럼 기도하시겠습니까? “주여 저에게 거룩한 눈물을 주시옵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울면 우리 자녀가 살고 우리 민족이 살고 한국 교회가 살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망각하면 자녀가 죽습니다. 가정이 죽습니다. 교회가 죽습니다. 우리 민족이 죽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거룩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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