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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를 공경하라 (마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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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공경하라 (마 15:4)


(마 15: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어둠 속의 댄서"라는 영화의 주인공 셀마 제스코바는 미국으로 이민 온 체코 여인인데, 그녀는 심각한 시력장애를 앓고 있었다. 극도로 심각한 동공축소현상으로 인해서 급기야 실명에 이르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녀에겐 진이라는 9살난 아들이 하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희망이자 삶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아들 진 역시 어머니의 질병을 유전으로 물려받아서 수술시기를 놓치면 앞을 못 보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아들 진은 이 사실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초등학생일 뿐이다. 

셀마는 자신의 질병이 유전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을 낳은 것에 대한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런 셀마가 고국 체코를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돈을 벌어서 아들의 눈을 수술해 주기 위함이었다. 셀마는 프레스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는 가운데 셀마는 점점 시력을 잃어서 거의 맹인 수준에 이르게 되지만 셀마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야간작업도 자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셀마의 부주의로 기계가 고장나고 결국그녀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고용주는 셀마를 해고한다. 

이때까지 셀마가 모은 돈은 2,056달러 10센트. 수술비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사정만 잘하면 수술이 가능할 수도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셀마가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은 경찰 빌이다. 빌의 가정은 겉으로는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아내의 병적인 소비벽 때문에 이혼의 위기 앞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아내의 소비벽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은행에서 융자를 받지만 결국 빚은 엄청난 이자를 안고 돌아와서 급기야 가정이 파경에 이르게 된다. 

셀마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빌은 자신의 트레일러에 세들어 사는 셀마를 찾아가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빌은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셀마는 자신이 미국에 온 이유와 아들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정을 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빌은 셀마에게 잘 자라며 문을 나서는 척하지만 정작문소리만 낼 뿐 방을 나서지 않는다. 셀마가 돈을 넣어두는 곳을 알아두기 위함이었다. 셀마는 빌이 나간 줄 알고 책장에 있는 사탕 담아두는 캔의 뚜껑을 열고 그날의 일당을 넣어둔다. 

그 광경을 목격한 빌은 소리 없이 방을 빠져 나간다. 하루하루의 삶이 피곤과 과로의 연속이지만 셀마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래서 퇴근 후 틈틈이 동네의 극단에 가서 뮤지컬을 연습한다. 셀마가 누리는 행복이 있다면 그건 아마 아들 진이 주는 기쁨과 음악이 주는 행복일 것이다. 셀마는 자기 개인의 행복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직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들의 미래와 행복만이 관심사였다. 

셀마가 해고된 날, 그날의 일당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언제나처럼  사탕 통을 열었을 때 돈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셀마는 없어진 돈이 빌의 짓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린다. 쉘마는 조용히 빌의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빌은 2층의 서재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셀마는 낮은 목소리로 빌에게 자신의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빌은 한 달만 쓰고 갚겠노라고 셀마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아들의 수술을 눈앞에 둔 그녀에게 빌의 설득이 들릴 리가 없었다. 셀마는 빌의 가방을 더듬거리며 그 안에서 자신의 돈을 꺼낸다. 순순히 돈을 돌려줄 것만 같았던 빌은 이때 자신의 서랍에서 총을 꺼내서 셀마를 겨눈다. 돈을 도로 뺏으려던 빌과 빼앗기지 않으려던 셀마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총이 오발되어 빌이 복부를 맞는다. 

빌은 자신의 삶을 체념한다. 그는 돈을 움켜쥔 채 셀마에게 돈을 가져가고 싶으면 자신을 죽이고 가져가라며 셀마에게 자신의 총을 건넨다. 셀마는 그럴 수 없노라고 울부짖지만 빌은 이미 삶을 포기 한 듯 자신을 죽여 달라며 돈을 움켜쥐고 셀마에게 사정을 한다. 결국 셀마는 앞도 못 보는 눈으로 흐느끼며 총을 빌에게 겨눈다. 마침내 빌은 숨을 거두고 셀마는 울먹이며 돈을 들고 병원으로 향한다. 

의사를 만난 셀마는 아들의 수술비를 건넨 후 자신이 없더라도 아들을 잘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한 후 경찰에 잡힌다. 재판은 일방적으로 셀마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셀마가 이민 온 외국인인데다 변론을 맡은 변호사조차 국선변호인이라 제대로 된 변론을 할 리가 없었다. 

결국 셀마에겐 일급살인죄가 적용되고,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된다. 감옥 안에서도 셀마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죽음을 기다리는 셀마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들린다. 셀마에게 유리한 사실들이 새로 밝혀져서 사형집행을 유예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변호사도 국선변호사에서 새로운 변호사로 바뀌었다. 셀마를 찾아온 변호사는 재판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며 셀마를 안심시키려 한다. 셀마는 변호사 선임료가 궁금했다. 누가 주었는지, 또 얼마를 주었는지……. 

잠시 후 셀마는 그것이 아들의 수술비라는 사실을 알고선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형집행 유예신청을 포기한다. 자신의 사형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셀마의 둘도 없는 친구 크로와는 셀마의 아들 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라며 셀마를 설득하지만 셀마는 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미래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결국 셀마에게 형 집행일이 찾아왔다. 그녀를 데리러 교도관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셀마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가 없다. 사형이 집행되던 때 침묵이 흐르고 셀마는 아들 진의 이름을 흐느끼며 부른다. 그리고 곧이어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노래로 부른다. 노래가 중간쯤 되어 참관인들이 하나 둘 고개를 숙일 때 형틀의 바닥이 꺼지며 셀마의 몸은 허공에 매달린다. 셀마는 그렇게 숨을 거둔다. 아들의 두 눈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한 어머니, 그녀의 이름은 셀마 제스코바이다.
  
이것이 우리의 부모님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 합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로 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주전300-주후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입니다. 탈무드는 내용상 율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 격인 '게마라'(보완이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면에서는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각종 이야기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벨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습니다. 특히 매우 미미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식사 때에 손을 씻는 예법은 먼지가 많은 팔레스틴의 풍토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풍속에 의해 위생적 필요에서 마련되었습니다. 한편은 이방인들과의 모든 접촉으로 길이나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스치거나 이방인의 물건에 무의식적으로 닿는 일 따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에 의시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야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는 효과적인 정결 의식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술하고 있는 '손'에 관한 행위법을 다룬 책자인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만일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다. 그런데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에 붓는다면 그 손이 불결하나 1/4통 이상의 물을 더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들의 유전과의 근본적인 권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계기로 삼아 여호와 신앙의 정수(essence)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율법을 인위적으로 해석한 유전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율법의 의식보다는 그 정신을 더욱 더 중요시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유전의 형식을 어기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을 어기는 일은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입니다.

특별히 '범하느뇨'(파라바이네테)는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빗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벗어나 곁길로 가게하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렬한 질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고 지적 하십니다

평행구인 막 7:10에는 모세는 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이런 차이는 계명의 원계시자와 그 계시의 전수자를 상호 교호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즉 계명은 그것을 전수받고 기록한 기자의 말인 동시에 그 기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한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비방하는 자는 이란 출 20:12에 기록된 율법의 제 5계명과 출 21:17에 기록된 제 5계명의 실천적 법규입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예수께서 특별히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신 이유는 손을 씻지 않는 일이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모를 거짓으로 공경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약점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5계명은 대인 계명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2)로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보다 더 중한 계명입니다.
비방하는 자(카콜로게오)는 '욕하다', '악의로 말하다', '비난하다'등의 뜻으로 결국 부모를 비방하는 자란 자신의 부모의 은혜와 권위를 무시하고 나쁘게 말하거나, 저주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패역한 자들은 예외 없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잘못을 보상해야만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더불어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극한 형벌을 당하는 두 가지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레 20:9)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내가 드려...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서약의 한 형식으로 부모를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 크시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는 면제가 됩니다.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여기에 '고르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제물)을 가리키는 말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봉헌의 맹세는 후대로 가면서 차차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만일 고르반이라는 말을 써서 맹세한 경우 가령 그 가리켜 맹세한 것이 부모의 부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취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고르반' 맹세 후 그 맹세한 것의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습니다. 진정 이는 출 20:12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맡씀을 폐하도다는에서 '폐하는도다'(에퀴로사테)는 말은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로서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3절의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조상의 유전을 절대시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어떤 집사님이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십계명중에 가장 지킬 수 없는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이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버림을 받아 온갖 고생을 했지만,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고 유명해 지니까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아버지가 찾아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찌나 아버지가 염치없는 짓을 하는지 살면 살수록 미움만 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독한 마음을 품고 아버지를 독살할 작정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에게 라면을 주면서 점심때 끓여 잡수라 하고 나갔습니다. 그 라면 속에는 독약을 섞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녁때에 들어오면 죽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기는 죽었는데, 아버지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딸이 죽어 있더라는 겁니다. 아버지 먹으라고 놔둔 라면을 그날 따라 집에 일찍 돌아온 딸이 배가 고프다며 그 라면을 끓여 먹은 것입니다. 

결국 남모르게 식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하고 일을 무마시켰습니다만, 더 더욱 아버지가 미워져서 도저히 더 이상 살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한달 만에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가 죽는 꿈을 꾸었습니다.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다시 한번 진짜 아버지가 죽었는가 확인을 하려고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그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이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난후 꿈을 깨었는데 이상하다 하며 혹시 아버지가 죽지나 않았나 하며 급히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오기는 나오는데 그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로 변해서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확실한데, 어찌 보니 예수님이 얼굴이더라는 겁니다. 그 순간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신것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도저히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아버지의 모습을 아예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꾸어 주시는구나 하고, 그날부터 극진히 예수를 모시듯 아버지를 섬기었다 합니다.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하시니 부모님을 공경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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