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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에 미친 사람들 (행 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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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미친 사람들 (행 26:24-29)


일제 해방 이후 우리 나라에는 세 종류의 빨갱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박 빨갱이, 토마토 빨갱이, 사과 빨갱이입니다.  사과 빨갱이는 겉으로는 빨갱이지만 속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고, 토마토 빨갱이는 겉도 안도 빨갱이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박 빨갱이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 속으로는 빨갱이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무서운 것이 수박 빨갱이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도 이런 유형의 신앙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 속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서 다 은혜를 받고 은사를 체험하는 것 같은데 생활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겉을 보나 속을 보나 모든 면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어떤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겉과 속이 변함없이 같은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가짜 신앙과 거짓된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김이나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존재로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인생의 풍랑은 반드시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억울한 일들이 우리들 주위에서는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삶을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운명의 파도는 휘몰아쳐 옵니다.  어두움과 파선의 위협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가정이 잘되고 은혜스럽고 만사가 형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합니다.  신앙 때문에 어렵고 눈물을 흘리는 고통의 날들이 우리들에게 더 많을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예수 믿는 것은 알고 보면 고되고 힘드는 길입니다.  이 길은 눈물 없이는 못 가는 길입니다.  피 없이도 못 가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죽더라도 이 길은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야하는 그 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면서도 기쁘게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은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에게 닥쳐온 날들을 살펴보면 바울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위협받는 고난의 길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수없이 채찍으로 맞았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서른 아홉번씩 맞는 태형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습니다.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그리고 밤낮 하루를 바다 위에서 표류한 일도 한 번 있습니다.  여러 번 길고 어려운 여행을 하면서 강이 범람하고, 강도를 만나고, 내 동족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박해 등으로 죽음의 고비를 수 없이 넘겼습니다.  여러 동네에서 폭도들에게 곤욕을 겪고 광야와 사나운 바다 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피곤에 지치고 고통에 시달려 잠 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지냈습니다.  주리고 목말랐으며 먹을 것 없이 지낸 날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몸에 걸칠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었던 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바울이 당한 고난의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을 중단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고,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 많은 고난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면서 나아갔는데,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미쳤도다"  베스도 총독이 보았을 때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와 복음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향한 베스도의 이 말은 사실은 비난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결코 불명예스러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랑스럽고도 영광스러운 말이었습니다.  이왕에 예수를 믿을 바에야 예수에게 미쳐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서야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가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사랑에 미치신 분이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아니했더라면 어떻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려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하나님이신 당신이 높고 높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실 생각을 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인류를 향한 그 사랑에 미치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천하보다 귀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사랑에 미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럴듯한 일을 미치도록 좋아해서 거기에 전적으로 몰두한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기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광기는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자기 일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이룬 업적과 성취에 의해서 발전해 온 발자국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상황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나름대로 합리적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에 빠진 것은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에 미친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사랑에 미친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처럼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에 미치고, 쓸데없는 일에 미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기독교, 반교회 운동에 미친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 교회가 당면한 위기입니다.

미국 외교관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에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미국 기업이 있습니다.  유럽 선진제국은 물론 공산권이나 저개발 국가들, 심지어 원수의 나라에까지 들어가는 회사가 있습니다.  코카콜라입니다.  코카콜라 판매에 미쳐버린 사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

중국의 모택동은 "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미쳐야 됩니다.  미쳐야 일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이 죄가 없음을 증명하고 석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재판이 잘못 진행되면 자신의 생명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들 앞에 내가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순간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를 전하는 일이다.  내가 석방되느냐 더 갇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고도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  내가 어찌하여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복음이 무엇인가?  그는 또박 또박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예수가 누구인지 그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이 때 바울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본문 2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바울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요 10:20)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예수님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의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제자들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미쳤다고 몰아세우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때로는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더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자신을 미쳤다고 안타까워하는 그들을 향해서 바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본문 2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만약에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한 번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로 물어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 선생님, 제가 생각해도 선생님은 미친 사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미치게 만들었습니까?

아마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다네.  나는 일찍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러 미쳐 날뛰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한 죄인 중의 괴수를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받아 주시지 않았는가?  버림받은 내 인생을 사랑의 손으로 붙들어 복음의 전도자가 되게 하고 사도가 되게 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그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버렸다네.  내 머리는 예수 생각으로 가득 찼고, 내 가슴은 예수의 피로 흘러 넘치고, 내 눈에는 오직 예수만 보인 다네.  그래서 오늘도 입을 열면 예수가 터져 나온다네.  나는 말이야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일세."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고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강권'이라는 말은 '앞에서 잡아끈다.  뒤에서 민다.  속에서 뒤집어엎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앞에서 잡아끌고, 뒤에서 밀며 내 심령을 뒤집어엎어서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예수의 사랑에 한 번 미쳐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영혼을 향한 불타는 이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에 미치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좀 쉬어가면서 하시고 편한 곳을 찾아서 전도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밤낮도 없이, 죽음도 당신을 막지 못하고 그토록 미쳐 전도하게 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대답을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에 미쳤다네.  나는 한 때 유대교에 미치고 율법에 미쳐 본적이 있지.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가두고, 정죄하고, 사람을 죽였다네.  하지만 복음은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고 자유하게 한다네.  이 복음의 능력을 알고서야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지옥이 천국으로 바뀌고 죽음이 영생으로 바뀐다네.  버림받은 땅이 영광의 땅으로 바뀌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다네.  이 능력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복음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말이야 한 마디로 예수의 복음에 미친 사람일세."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 선생님, 우리가 하루 이틀 한 두 번은 미쳐서 살 수 있지만 어떻게 당신처럼 평생을 미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대답을 합니다.  "나는 성령에 미쳤기 때문일세.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술에 취했다, 미쳤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성령에 취하고 성령에 미치면 어린이도 젊은이도 장년도 노인도, 밤에도 낮에도, 집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낮은 자리에서도 높은 자리에서도 미친 듯이 기뻐할 수 있고,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고,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는 예수 마니아가 된다네.  건강한 신앙인이란 미칠 곳을 제대로 찾아 제대로 미치는 것이라네.  나는 말이야 한 마디로 성령에 미친 사람일세."

사랑하는 여러분, 미친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미친 사람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면 평상시에 낼 수 없는 무한한 힘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변호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향해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전염병은 당시에 무섭게 유행하던 전염병 페스트를 말합니다.  사실은 바울을 혹평하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지만 한편 예수에게 미쳤던 바울의 힘, 복음의 능력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전염병은 무서운 세력으로 전염이 됩니다.  삽시간에 온 동네를 휩쓸고 전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의 피묻은 복음은 전염병처럼 아시아에 번져 나갔습니다.  유럽에 영적인 불을 놓았습니다.  전염병에 걸리면 죽습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육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세상 정욕이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똑바로 미친 목회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서 가슴에 불을 간직한 성도들을 필요로 합니다.  뜨거운 열정에 불타는 목회자, 눈물과 감격의 성도가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헌신도 모르는, 그래서 감격도 열정도 없는 싸늘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호사 더둘로가 바울에게 말한 것처럼 세상 속에서 전염병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에는 강력한 영적 파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온 도성이 진동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구요?  성령이 붙잡히십시오.  성령에 충만하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성령에 미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건강한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미친 목회자가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에는 주의 사역에 미친 장로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인들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진정으로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 일어나야 진리가 살고 정의가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 일어나야 복음이 살고 교회가 살아납니다.

사도행전 이후 지난 2000년 동안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100년 전 이 땅에서도 회개운동, 부흥운동에 이어 복음전도 운동이 한반도를 강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미친 이름 없는 사람들이 각처에서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는 이 나라가 침몰하는 배처럼 국운이 기울어가던 어둡고도 암울한 때였습니다.  한반도 전역을 휩쓸며 성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던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그 불길이 꺼지기 전에 한국 교회 안에서는 100만 구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오직 민족 복음화만이 꺼져 가는 이 나라의 운명을 살릴 수 있고 백성들의 희망을 꺽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무렵 새벽기도 운동, 금식기도 운동, 산기도 운동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기도하고 일어선 사람들은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마을로 미친 듯이 뛰어 다녔습니다.  드디어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교회에서 100만 구령운동을 선포하고 교회들마다 "금년 100만명"이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오늘 복음을 전하고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몸서리치는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경기도 안산읍 발왈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온 몸이 부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이를 위해 3일을 금식기도하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여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대구 계명대학교를 세웠던 아담스 선교사님은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올해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최근 나는 하루에 한 교회를 세우고 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 했던 젼킨(Junkin) 선교사님은 추운 겨울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습니다.  클랙 선교사님과 시릴로스 선교사님은 어린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어린아이들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보냈습니다.  게일 선교사님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예수에 미쳐서 세계가 버린 이 땅에 와서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국에서 앞날이 촉망받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대학교수로, 사업가로, 심지어는 미국의 부통령으로 지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이 땅에 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버림받은 가난한 이 땅에 와서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바치게 했습니까?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 예수에 미친 사람들은 비단 선교사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들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토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기도회 후에는 둘씩 짝이 되어 쪽 복음을 들고 마을 마을을 누볐습니다.  가난해서 마음껏 전도헌금을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자신의 몸과 시간을 연보했습니다.  이것을 '날 연보'라고 합니다.

이 무렵 날 연보로 전도에 헌신된 시간이 총 10만 여일이 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마가복음 쪽 복음이 100만 권이나 팔렸고, 전도지가 300만장이나 나누어 졌습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어른들만의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와 중학교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1910년 길선주 목사님이 매큔에게 보낸 편지에는 초등학생들의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얼마나 불타오르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열정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7살 난 작은아이들도 용돈을 모아 가지고 와서 전도지와 복음서를 삽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거리로 가지고 나가 전도합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 이야기를 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가서 그들의 팔을 붙잡고 구주 예수를 영접하라고 간청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가 이 땅에 이처럼 번창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평안과 위로, 내 가정의 안일과 축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미신적 종교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복음과 예수를 위해 당당히 피 흘리는 일을 주저했더라면 오늘 한국교회는 이처럼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암울한 민족을 살리는 길은 정치적 힘을 키우는 것이거나 경제적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국교회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에 미친 사람들로 인하여 일어났던 회개와 각성이 오늘 우리들의 심장에서도 쏟아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 날의 성령님이 오늘 새롭게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께 주권을 내어드리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심장 속에 잠들어 있던 예수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 깨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피 속에 흐르는 복음의 열정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들로 인하여 뜨겁게 일어났던 그 날의 구령 열정이 우리들 속에서도 되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은 수많은 예수에 미친 사람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한국 땅에 와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너도나도 복음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는 그들을 보고 한국교회의 성도들 또한 예수 전도에 미쳐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선교란 영혼구원에 미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 선교는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룩한 사건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주위에 보면 미치지 말아야 할 것에 미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권세욕에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예에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물에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랑방탕 먹고 마시며 즐기려는 쾌락의 정욕에 미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륜도 저버리고 믿음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미쳐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무엇엔가 미쳐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제 정신으로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미치지 않는다면 잡스러운 것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일에 미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미치십시오.  그래서 복음을 들고 이 거리, 저 거리로 미친 듯이 다녀보십시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주 앞에 날연보를 드려보십시다.  그래서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이 나로부터, 우리들로부터 시작되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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