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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칠년째의 신앙 (신 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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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년째의 신앙 (신 15:12-18)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간에 과거에는 하나님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하나님이 없이도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가 일어나면-풍랑이든 지진이든 질병이든 기근이든 주로 나쁜 일들이지요.- 이것을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과거의 사고방식이 계약서류상에 남아있는데 계약서에 act of God-하나님의 행위라고 나와 있을 때는 주로 자연재해를 일컫는 말입니다. 심청전 같은데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다의 신을 달래야 선원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청을 재물로 바치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그와 비슷한 사례를 엿볼 수 있는데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더니 하나님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셨다는 성경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아기를 갖지 못할 때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이 태를 닫으셨다고 말했고, 비가 오지 않을 때도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로를 막으셨다, 또 사람의 몸에 병이 나는 것도 과거에는 영적으로 그것을 이해해서 병을 고치는 방법도 영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죄가 있다거나 악한 세력이 있다거나.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일단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목사든 장로든 의학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일단 의사선생님 앞에 앉았을 때만큼은 의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의사선생님도 ‘환자님, 혈압이 오르셨군요. 죄가 많으신가 봐요. 회개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체중을 줄이셔야 됩니다. 콜레스트롤 수치를 낮추셔야 됩니다. 음식을 조정하시고 운동을 하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의학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려고 합니다. 

어느 의사선생님도 ‘위장에 염증이 있으시군요. 누구를 미워하시는 모양입니다. 회개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식사습관이 정기적이지 않군요. 너무 짜고 맵게 드시는 모양입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입니다.’라고 말하지요.

현대인들이 이 인간의 질병을 스트레스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과 과거 사람들이 인간의 질병을 죄나 어떤 재앙으로 생각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 아닙니다. 그것을 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과거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로 해석하는 것은 훨씬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우리의 질병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다만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많이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영역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고 창세 이후로 인간의 영역이 이렇게 넓어진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축소됐지요. 

지난주 설교를 들으신 어느 한 분이 설교가 너무 어려웠다고 말씀하셔서 ‘당연히 어렵지요. 왜냐하면 과거에 들어보신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많이 들어보시면 쉬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인간의 활동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자유가 많아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경제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일을 쉬고 휴가를 갈 수 있습니까. 그건 그만큼 경제적인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놀러갑니까.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한 달도 놀러가고 그렇습니다. 놀기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이것은 경제적인 여유와 자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성의 자유,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만 백 년 전과 비교를 해봐도 큰 변화가 있었지요. 또 정치적인 자유,종교의 자유 ․ 언론의 자유 그리고 도덕의 자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금기되었을법한 많은 일들이 지금은 허용됩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그것을 나타내고 그것을 금지하는 것을 오히려 인권침해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자유의 폭이 넓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활동범위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날이 과연 올지 알 수는 없지만 만일 인간의 모든 질병을 정복하는 날이 온다면 암이든 심장병이든 당뇨든 불치병이라는 것을 다 정복하는 날이 와서 더 이상 사람이 병에 의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리고 가난을 정복하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면 그리고 압제와 억압이 사라져서 적어도 정치적인 억압은 없는, 그래서 사람이 자기 양심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시대가 오게 된다면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생각을 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입지는 좁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오해했던 부분이 정리가 되면 핵심적인 하나님의 역할은 더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고 질병이 없고 사회적인 부조리가 없는 모든 것이 풍성한 낙원이었어요. 완전한 환경이에요.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다스리셨습니다. 최초의 죄는 가난이나 질병이나 고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풍성한, 완벽하게 보이는 환경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사회가 낙원처럼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역할과 위치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고난 많은 사람들 틈에 사셨지만 예수님 자신은 질병이라든가 극심한 가난이라든가 가정의 아픔이라든가 누구에게 핍박을 받았다든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다든가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건강한 인간이요 완벽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떤 부족함 ․ 아픔 또 모순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으로 여기신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섬길 분으로 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개인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허물이 있었다든가 아픔이 있었다든가 가정에 불화가 있었다든가 이런 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적어도 당신은 완벽한 건강한 인간이었는데 그럼에도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셨어요.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의 메시지, 우리가 흔히 듣는 메시지와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종교적인 모티브, 종교적인 동기를 제공하는 것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느냐, 이런 설교하지 않았고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병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느냐, 이런 설교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느냐, 이런 설교 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살 수 있느냐, 이런 설교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느냐, 이런 설교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찾을 수 있느냐, 이런 비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긍정의 삶이라든가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든가 이런 책이 그 당시에는 발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책을 기독교적인 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희한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현대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기 때문이요, 인간을 부르시기 때문이요,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 ‘내가 무엇을 너희에게 주리니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버려야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버려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더 얻기 위하여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이천년 전의 성도들보다 우리는 더 훨씬 풍성하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더 갖기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무엇을 더 얻기 보다는 잃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때로는 자유를 잃을 수도 있고 또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사회적인 특권을 잃을 수도 있고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순교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기뻐했고 또 그 기쁨과 은혜 속에서 자기의 소유를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삶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경험하고 그리고 아쉬워하지 않고 그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처럼 고난 받는 것을 그들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 원래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초대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아마 민망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립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동기는 여전히 나 중심적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무엇을 얻고 어떤 혜택을 입고 내게 하나님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따지려고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많은 것을 해주시만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원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오늘 성경 본문은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한 율법 규례입니다. 옛날이라고 종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 육년을 섬기고 칠 년째가 되면 그를 풀어주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외 조항이 있었어요. 만일 종이 ‘나는 주인과 주인의 집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하면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 말은 옛날에는 귀걸이가 노예의 상징이었어요. 귀에 구멍을 뚫고 고리를 달아서 나는 누구에게 소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평생 섬기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종의 관계가 아니고 사랑과 의리의 관계가 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힘으로 당신에게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득이 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믿으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 믿으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기 때문에, 안 믿으면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에, 안 믿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원하면 떠나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안에 거하기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혀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된 이유에요.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칠 년째의 신앙이에요. 육년까지는 종으로 살았을지라도 제 칠년에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부여했어요. 그러나 종이 ‘내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인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겠습니다.’ 내가 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얻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것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 편이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그 말씀에 생명이 있고 나는 거기에서 위로를 얻고 나는 그 진리를 떠날 수 없다, 이것은 별개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이 현대인의 모든 자유를 누리지만 신앙적으로 만큼은 여전히 노예근성적이고 미신적이고 타성적이고 의존적이고 원시적이고 기복 신앙적이고 율법적이고 이방인적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유는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여기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늘 듣지만 진정한 사랑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친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는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건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내 탓입니다. 

내가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내 안의 사랑보다는 여전히 미움 ․ 싸움 ․ 원망 이런 것들이 더 많습니다. 내 안에 단물보다는 쓴물이 더 많습니다. 내 쓴물 때문에 남을 보는 눈도 쓰게 보고 세상을 보는 눈도 쓰게 보고 하나님을 볼 때도 쓴물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별로 없어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론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실감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을 즐거워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담이요 힘드는 일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부득이한 일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노예근성이에요.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종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이건 천지차이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빨래를 하는 것과 집의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남편의 빨래를 하는 것은 일의 내용은 똑같아요. 그러나 그 동기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의 내용은 같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이유와 동기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에 나오고 섬기고 기도하고 그 이외의 모든 일절 행위의 내용은 같을 수 있어요.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원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인류의 과학과 기술이 백배, 이천 배 발전한다 하더라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병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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