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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역사의 장애물 (출 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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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의 장애물 (출 3:11~22)


I. 세 가지 장애물

「너는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주제로 출애굽기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1장: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되어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전대미문의 핍박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2장 1절-10절: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된 인물인 모세의 출생과 나일강 갈대상자를 통한 기적적인 구원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 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절 사이에 40년의 역사가 흘렀습니다. 

2장 11절-25절: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실패를 낳았습니다. 이 일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고 거기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가정을 만나게 됩니다. 

3장 1절: 

미디안 광야생활 - 또 4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 유명한 모세의 소명 사건입니다. 

3장 9절과 10절: 

“이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리라는 말씀입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 출애굽기 3장 11절 - 22절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모세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 두 가지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첫 번째 질문 - 11절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Identity - 자기 정체성 - 자아상에 관한 질문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 이 자아상에 관한 질문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아상이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아상이 초라한 사람은 초라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질문 13절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가? 신론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 당신과 나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새 역사를 감당하고자 할 때마다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며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두 가지 질문입니다. 
이 일을 감당해야 할 나는 누구인가?
이 일을 내게 맡기시는 하나님과 나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이와 함께 이 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방해물 - 방해꾼은 없을까? 본문에는 바로 왕으로 등장합니다. 사탄이지요. 사탄은 어떤 방해를 하고 나설까? 이 문제가 본문 18절-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제목이 「새 역사의 장애물」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 - 나는 누구인가? 자의식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 - 하나님은 누구인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 번째 장애물 - 방해꾼 사탄의 방해전략은 무엇인가? 
영적싸움을 할 때마다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방해꾼은 누구이며 방해전략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II. 첫 번째 장애물: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다. 이제 너는 내 백성에게로 가라. 그리고 이제 저들을 구원하라.”(출3:9-10)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모세는 지금 깊은 자아상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역사로 부름 받은 모세의 첫 번째 위기요 장애물이었습니다.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건강한 자아상입니다. 내가 무너지면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40년 전 모세가 왕궁 뜰을 거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도 “내가 누구이기에” 제가 가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까요?
“모세야,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지금 고난당하는 내 백성에게로 달려가 그들을 구원해 내라.”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 가고 말구요.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하며 기다려 왔던 일인대요. 그 일을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저 말고 또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모세는 당당하고도 자신 있게 응답했을 것입니다. 감격하며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 7장 25절에 보면 -

모세는 자신이 노예관리인 애굽사람을 쳐 죽이고 이스라엘 노예들을 도와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격려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영웅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해 주리라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칭찬해 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모세를 영웅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궁에서 혼자 잘 먹고 잘 살던 네가 뭔데 우리의 지도자가 되려하느냐 덤벼들었습니다. 애굽 왕은 모세를 살인자로 낙인찍어 죽이려 했습니다. 

모세의 교만했던 우월감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월감.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판단을 과신합니다. 우월감에 빠진 사람은 연약한 사람을 동정할지언정 약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으로 넘치는 자아상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아상, 우월감 - 이것은 새 역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이토록 자신만만하기만 했던 모세! 우월감에 젖어 살던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40년 세월을 보낸 뒤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부름 앞에 - 
「내가 누구이기에 그 일을 합니까?
하나님, 저 자신 없어요.
저, 팔십 노인이예요.」
우월감이 열등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교만했던 자아상은 절망과 좌절 - 초라한 자아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새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아상도 자학하는 자아상도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인격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갑상선 항진으로 고생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갑상선 항진이 치료되자마자 갑상선 자아가 왔습니다. 그것 또한 죽을 맛입니다. 우월감이 항진이라면 열등감은 저하일 것입니다. 모두 질병입니다. 
교만한 자아상이 무너진 모세. 이번엔 열등감이 찾아왔습니다. 둘 다 병든 자아상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책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모세야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야 너는 순종만 하면 된다. 일은 내가 한다. 
♪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모세야 너는 약하나 내가 내가 함께 하면 너는 강자가 된다. 
모세야 교만을 버려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세야 열등감을 버려라. 나와 함께 너는 할 수 있다. 

III. 두 번째 장애물: 하나님, 당신이 누구입니까?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대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는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하려고 할때 -
첫 번째 장애물은 모세 자신 -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그 일을 맡을 수 있는 존재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출애굽이 과연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일이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냐?
하나님은 과연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두 번째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잘 몰라요. 그리고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몰라요. 

그 내용이 본문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모세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여호와란 이름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초기까지 무려 160회 이상 여호와란 이름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여호와란 이름을 모세에게 처음 알려주셨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조상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면서도 그 여호와란 뜻이 무엇인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여호와”란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란 말을 좀더 정확하게 발음하면 야훼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야훼란 말이 나오면 소리를 내지 않거나(묵음) 아도나이(Adonai) “주님”으로 읽었습니다. 

우리 아들에게 누군가 “자네 부친이 누군가?”라고 물을 때 “예, 류자 영자 모자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시간이 지나다 보니 정말 여호와란 말의 발음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자음(YHWH)과 아도나이(Adonai) 모음을 합쳐 여호와(Jehouah)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연구의 결론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가 옳다는데 일치를 보았습니다. 오늘날은 세계 모든 교회가 하나님을 야훼라 부르는데 유독 우리나라 교회만 틀린 줄 알면서도 예전부터 써 오던 “여호와”란 말을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이 뭐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몰라요 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14절 15절에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 -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5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영어로 I am who I am으로 번역된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서 번역하기에 그리고 이해하기에 가장 힘든 말입니다. 어쩌면 번역 자체가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그대로 쓰고 읽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에헤 아쉘 에헤” 
세 낱말로 되어 있는 첫째 낱말과 셋째 낱말이 같습니다. “나는 나다”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나는 나다. 
설명, 이해, 논쟁이 불가능한 번역조차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출장을 갔다가 참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현관벨을 누릅니다. 집안에 있던 식구 중 누군가가 “누구세요?” 할때 “나야 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부터 이집 아빠의 이름이 “나야 나”가 된 것입니다.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 나야 나. 이런 의미입니다. 

“에헤 아쉘 에헤” - 이 말은 시제적으로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I was who I was. 과거에도 나였다. 
I am who I am. 지금도 나다. 
I will be who I will be. 영원히 나는 나다. 
어떤 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나는 영원 전부터 있었다. 
지금도 존재한다.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 말은 나는 모든 상황, 모든 역사, 모든 곳에서 존재하고 일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장신대 박동헌 교수(구약학)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에헤 아쉘 아헤 - 이 말은 우리말로 바르게 옮기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비교적 맞게 풀어보면 

“나는 나다.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때 있다. 나는 내가 일해야 할때 일한다는 식으로 된다. 나는 하늘 높은 곳이든 땅의 어느 거룩한 곳이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너희의 섬김만 받는 존재가 아니다. 너희가 있는 곳에 내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일하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한 존재이다.”라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이 말은 사역형으로 해석하면 “나는 존재케 하는 자이다”란 뜻입니다. 
나는 있게 하는 자이다. 
나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자이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너희를 구원하여 존귀한 나의 자녀로 삼는 자이다. 

나는 네가 존재하는 이유다. 
나는 네 삶의 목적이다. 
나는 네가 일하는 이유요 사역하는 이유이다. 
나는 네가 이 땅에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네가 충성하고 헌신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네가 의를 위해 순교해야 할 이유이다. 

에헤 아쉘 에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내가 누구냐고? 나는 나다!

누군가 만든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 있으라 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 없다고 해서 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오직 존재 이유가 있다!
에헤 아쉘 에헤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존재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있다.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당신은 누구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합니까?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에헤 아쉘 에헤
당신은 누구 때문에 새 역사를 시작합니까? 에헤 아쉘 에헤.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있는 자. 
이 세상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당당하다면, 이 세상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IV. 세 번째 방해꾼 - 사탄(바로)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대 역사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할 때 그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할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요, 둘째는 그 일을 명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장애물은 모세의 질문을 통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장애물은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방해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리 귀띔해 주는 것으로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겠으니 우리로 이 땅을 떠나게 해 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방해꾼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 그리고 2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세 번째 장애물, 방해꾼이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애굽 왕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로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겠다고 하자 바로 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안 보내려고 합니다.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약속을 했다가 어기기도 하며 아무튼 안 보내려고 온갖 몸부림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당신을 절대로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탄은 당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변을 돌면서 언제든지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작전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은혜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승리의 생활,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를 시작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처럼 초라하게 사는 것을 사탄은 좋아합니다. 

우리가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할 때 사탄은 얻어터지고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기적으로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너희를 도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방해꾼의 방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은 더욱 강력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바로 애굽 왕 바로입니다. 애굽 왕을 무찌르지 않고서 출애굽은 불가능합니다. 애굽 왕을 극복하지 않고서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때마다, 
우리가 더 나은 부흥을 보고자 할 때마다,
우리가 더 큰 역사를 보고자 할 때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서는 바로 왕을 무찔러야 합니다. 
성령으로 무장함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세상의 왕 - 바로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견고한 진을 파해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바로 왕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가치관이 당신의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이 당신의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더러운 자존심이 당신의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변덕 심한 그 성질이, 우유부단함, 의기 박약, 참을 성 없음, 게으름, 이런 것들이 당신의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결단 없이 신앙생활 하는 미지근함이, 상처와 습관적인 죄가,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우상 같은 자녀, 돈, 물질이, 주일을 범하고 십일조 결단을 못하고 10년 신앙생활하는 그 모습이 바로 왕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왕을 떠나지 못하면 하나님이 치십니다. 
내가 강한 손으로 바로를 치기 전에는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리라. 
내 속에는 바로 왕도 있지만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경험하기 위해서, 너 나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바로 왕을 무찔러야 합니다. 
출애굽을 허락할 때까지 하나님이 바로 왕을 치십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려서라도 출애굽은 이루어집니다. 

바로야, 내 백성을 놓아주어라. 
사탄아, 내 백성을 놓아주어라. 
새 역사의 걸림돌, 장애물들은 떠나갈지어다. 
험한 산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백성을 인도해 갈 것이다. 
너를 향한 아름다운 계획, 새 역사는 펼쳐지리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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