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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을 이기는 위로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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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이기는 위로 (막 14:32~42)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고통이 지나 가면 또 하나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한 종류의 고통이 지나가면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고통에는 매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겪게 되는 자질구레한 고통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예외적인 고통, 잔인하고 충격적인 고통들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지 않게 우리를 찾아오는 고통을 겪을수록 더 커다란 아픔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모르고 당하는 고통은 차라리 담담하게 잘 겪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가올 고통을 우리가 미리 다 알고 있다면 그 고통을 겪는 것이 훨씬 더 불안하고 긴장이 되고 더 큰 고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육체적인 고통도 있고, 정신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전후한 예수님의 고통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문자 그대로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겪으실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잔인한 고통의 모든 모습을 아시고, 보시고, 그 고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비단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34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심한 어떤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 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전혀 모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매달리셔야 한다는 수치스러운 고통, 혹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일시적이나마 죄를 짊어지고 심판을 경험하심으로써 하나님에게서부터 분리되고 버림을 받아야하는 고통.  혹은 십자가의 상황을 앞두고 그가 사랑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겪으셔야만 했었던 그런 배신의 고통,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런 고통을 예수님이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똑같으신 지극히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엄청난 고통 앞에 어떤 위로를 찾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비밀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싶습니다.  이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우리의 삶의 현장을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입니까?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그 첫 번째 비밀은,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2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그 다음 3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을 가시면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데리고 가셨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어떤 고통스러운 것을 겪게 되면 그것을 남한테 보이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동양권의 문화는 체면문화가 많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홀로 감당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동반했느냐는 겁니다.  아마도 최악의 고통을 이기고 극복하는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있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도 단순하게 더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셨기 때문에 이런 외로움을 당하시면서 외로움의 상황, 고독한 상황, 그리고 고통스런 상황 앞에 직면하시면서 위로 받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있고 싶어하셨다.  제자들을 친구 삼아 그 고통의 밤을 함께 지내고 싶어하셨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좋은 친구를 알아볼 수가 있습니까?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봄으로써 우리는 좋은 친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우정의 테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보면, '선경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들을 우리는 알아본다."  유명한 과학자였던 퀴리 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경에 처할 때 우리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숫자를 세어 볼 수가 있다."

내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내가 역경을 만날 때 내 진짜 친구가 몇 명이냐?  진정한 친구를 우리는 세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언 17장 17절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정말 위기를 만났을 때 그때 우리는 친구를 알아보고 형제를 알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남긴 감동적인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 두 사람이 전쟁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훈련을 받고 공교롭게도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작전 도상에서 친구 하나가 참호를 나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포탄이 나르기 때문에 자기 참호로 돌아오지 못한 체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친구를 잃어버린 것을 안 또 한 사람의 친구가 그대로 견디지 못하고 포탄이 막 날아오는데 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분대장이 막았습니다.  "지금 나가면 너도 위험해 진다."  그러나 분대장의 시선이 다른 데로 쏠린 틈새를 이용해서 그는 재빨리 자기의 참호를 나와서 친구가 고립된 그곳을 향해 포복해 계속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고립된 친구에게 접근해서 그 친구를 붙들고 들쳐업고 그는 다시 참호로 돌아옵니다.  파편이 튀는 조각 속에 그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친구를 데리고 참호로 데리고 왔을 때 이미 친구는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분대장은 야단을 칩니다.
"이런 병신 같은, 이 바보 같은, 네 친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너도 죽어 가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이때 죽은 친구를 들쳐업고 왔던 그 친구는 분대장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분대장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친구는 이미 죽었고 저도 부상을 입었으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분대장님은 제가 친구를 죽기 직전에 만났을 때 제 친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지요."
"네 친구가 뭐라고 그랬나?"
"내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그게 친구예요.  친구입니다.  친구는 고통의 순간에 더불어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서 친구를 기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독한 순간, 이 고통스런 순간, 내일이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어두움이 닥쳐오고 있는 그 밤에 제자들을 친구 삼아 그 동산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친구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7절에 보면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우리 한 시간 동안만 좀 깨어 있어 함께 기도하자, 같이 좀 대화를 나누자.  예수님께서는 이 외로운 밤, 이 고통스런 밤에 대화를 요구하셨고, 기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제자들은 친구 역할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의 기사를 묵상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친구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친구의 자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본문의 상황과 같은 사실을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사를 보면,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단다.  나는 너희들의 친구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곁에 좋은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느껴지시는 상황이 있습니까?  제가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어서 그의 곁에 있어 주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많은 장례식에 참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례식은 너무나 견디기 어렵도록 쓸쓸한 장례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  사람들이 없습니다.  물론 알리지 못한 상황,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쓸쓸한 장례식의 뒷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분이 평소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둔감했던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가장 고독했던 상황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을까요?

크리스챤 카운슬러요, 의사였던 스위스의 '폰 트루니에'가 쓴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배우자와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가 있다면, 당신의 아내 당신의 남편과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동성 가운데서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몇 명의 친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나를 비판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몇 명의 친구만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의 현장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요란해도 당신은 그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탁월한 진단입니까?  인생의 현장에서 우리가 그 어떤 폭풍우와 먹구름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더불어 마음 통하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면 넉넉한 마음으로 이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동성 친구들 가운데 몇 사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있다면 나는 인생의 어떤 폭풍우도 뚫고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위로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상대방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 없었지만, 그래서 친구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지만 그래도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곁에 있어주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홀로 걸어가기에는 너무 고독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좋은 믿음의 친구를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없다면 여러분이 좋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좋은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상황이 저는 교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내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몇 사람, 정말 마음이 통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인생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사귀어도 여러분의 교회 생활은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그런 친구를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친구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선교회 모임, 같은 연령 또래의 모임, 혹은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데 참여해야 친구가 사귀어지지 주일에만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면 좋은 믿음의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두 번째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가 나를 위로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때 거기에는 항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할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서 말을 나누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위로하는 기술이 없어서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내가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도, 또 남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들도 우리는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바로 욥의 친구들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럴 때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별로 예수님에게 친구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취한 태도를 주목해 보십시오.  35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같은 기사를 누가복음에서 읽어보면 누가복음 22장 41절에 "저희를 떠나"  제자들을 떠나.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함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가 무엇입니까?  한문에 친구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지기'(知己)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기.  나를 알아준다는 뜻입니다.  나를 알아준다.  내 고통을 알아주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된 거리에 가서 그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힘들어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친구들을, 사람들을 너무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에게서의 위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안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사람에게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오셔야 합니다.  내 인생의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36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여기에서 '아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기대고 싶은 심정으로 그분 앞에 자기의 절망과 자기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속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렌'이라는 기독교 철학가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의 체험이다."
주님 앞에 홀로 서는 것.  그렇습니다.  아무도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나는 그분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비젼 칼리지의 학장인 '제임스 휴스톤'은 기도에 대한 아름다운 제목 가운데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하나님을 나의 친구로 삼는 것, 그리고 그분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분은 고독하셨습니다.  외로우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앞에서는 결국 나 혼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독합니다.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감동적인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고독의 심성이 느껴지십니까?  이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예수님께서 고독해 하시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렇습니다.  친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도 함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을 건너갈 때 우리는 함께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따로 가야합니다.  남편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아내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했던 친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고독한 그 길을 건너갈 때, 그때에도 함께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때도 내가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가 고통 속에서 힘들고 외로워할 때 내가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우리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독은 넉넉한 마음으로 극복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정말 배울 수가 있다면 평소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습관이 중요합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읽어보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셔서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좋은 습관은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드리는 이 공적인 예배가 언제나 은혜롭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의 예배는 아주 밋밋하게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왠지 피곤하다.  그래도 예배에 빠지지 않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에 빠지지 않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좋은 습관이 되어 있으면 어떤 때는 무미건조하지만 어느 날의 예배 시간에 갑자기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예배가 항상 나에게 감격이요, 은혜는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배가 좋은 습관이 되면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절실하게 하나님의 만지심과 다루심이 필요할 때 그 습관을 좇아 예배 드리며 기도하던 나에게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를 만져 주시고 나를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세상 친구들로부터의 위로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만지심과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마지막 비밀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줄 아는 것, 저는 이것이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정말 힘든 것은 이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고통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것이어도 이 고통이 의미가 있다, 견딜만한 의미가 있다, 이것만 확신 할 수 있다면 이기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내가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 같다, 내 죽음이 어쩌면 개죽음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만약 내가 부딪쳐 있는 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만 내가 확인할 수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의미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본문 36절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보십시오.  '그러나'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무슨 뜻이 있을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저 잔인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주님은 마침내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맞아,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신 거야.  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해.  그래야 내 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구속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가 있다면, 그래서 나의 죽음이 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해"  아마도 주님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세 번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상황을 가만히 읽어보면 한차례 기도가 끝난 후에 제자들을 와서 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아직도 잡니다.  그래서 처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찌하여 자느냐?"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번째도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면서 한참을 기도하시다가 또 와서 보니까 제자들이 또 자는 겁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주님의 목소리가 좀 더 높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아까 보다 주님의 목소리가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기도합니다.  세 번 기도하고 와서는 주님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본문 41절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세 번째는 달라집니다.  세 번째 와서 보니까 아직도 잡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냥 자"  이때쯤 주님의 마음속에 어떤 확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완전히 결정한 것입니다.  나는 가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게 내버려두자.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면 옆의 사람을 들볶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괜히 옆에 있는 사람을 들볶습니다.  주님은 이때쯤 자신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괜찮다.  자라.  나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자.  십자가로"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을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고통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고통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모르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 이 사랑을 받는 자, 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내가 겪는 불가사이한 고통도, 억울해 보이는 이 아픔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결국은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 질 것이다" 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을 뚫고 나갈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대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하나님의 빛나는 뜻을 바라보며 우리는 고통을 향해서 담담히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인도 선교의 문을 열었고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윌리엄 케리는 32살의 젊은 나이로 영국을 떠나 인도로 갔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40년 동안 선교하는 과정에서 자기 아내는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선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벅차게 그는 경제적인 아픔을 당해 왔습니다.

그가 하기를 원했던 과제 중에 하나가 인도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 말은 하나가 아닙니다.  수십개의 지방 방언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지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몰두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윌리엄 케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영어로 '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밖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이 고통 속에도 뜻이 있다.  이 아픔 속에도 뜻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오늘의 나의 실존, 나의 존재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신다.  나는 그 뜻을 다할 것이다.  이 사실을 믿었을 때 그는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도 당당하게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만약 이 뜻을 알 수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일어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변을 향해서 여유 있게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형제들, 쉬십시오.  나는 일어나 갈 것입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서…"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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