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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행 17:16-21, 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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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행 17:16~21, 32~34)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마게도냐로 건너가 유럽선교를 시작하게 된 바울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철학의 중심지 아덴에까지 오게 되었고 그곳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연설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17-18절을 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회당에서나 장터에서나 가리지 않고 전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유대인이나 경건한 사람들이나 날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했음을 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당시 희랍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그러한 전도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17절에서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하고, 18절에서는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했다고 하며, 또 20절에서는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했다는 것 보면 역시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의 전도는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전도에 대한 아덴 시민의 반응에 관한 종합적 보고를 우리는 본문 32-34절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전도에 대한 아덴 시민의 반응이 세 갈래로 갈린 것을 봅니다. 첫째는 조롱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수용입니다. 34절에서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합니다.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며 믿었고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도 있었으며 여인도 있었던 것을 보아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는 완전한 실패라고는 할 수 없으나 큰 성공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32절 하반절과 3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라 합니다. 분명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18:1에 보면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덴에는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유대인들의 반발과 난동과 위협이 그를 다른 도시로 옮겨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적 지혜만을 좇는 아덴 사람들의 기질과 지적 거부가 그를 떠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아덴에서의 전도경험은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덴에서의 씁쓸한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전도원리를 분명하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 전도원리를 고전1:18-29에서 길게 언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말씀은 전도에 임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에 잘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으며 그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 

고전2:1-14의 말씀도 전도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을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새롭고 상업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바울도 처음에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스스로를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전도자, 목회자로 만든 것은 설득력 있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였고 성령의 역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일은 성령의 역사 아래 있지 않는 육의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전할 때 역사하시고 안 하시고는 성령의 몫이고 자유입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믿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나 전할 사명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우리는 <새문안 새 생명>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태신자 작정도 하고 <잃은 양, 숨은 양 찾기>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 전도하는 훈련도 계속합니다. 그 누구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든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주눅들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전도운동이 미련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망설임을 아직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미련한 것 아닙니다.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할 뿐 아니라 가련한 것입니다. 최고의 지성과 철학적 사고를 자랑하던 아덴에서도 남녀고하를 막론하고 믿는 사람이 생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날도 최고의 과학자들 가운데 오히려 순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앞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으며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사람의 지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에 달린 것임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의 전도의 경험과 거기서 얻은 확신이 또한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전도도 아니고 혼자 하는 전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도고 성령을 따라 하는 전도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복음전파에 기쁨으로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부활주일의 예배출석인원이 칠천 명을 넘어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도약 1070>의 목표를 정한 금년 말까지 칠천 명 이상의 고정적인 출석교인을 확보하고 내년에는 팔천 명 이상의 목표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비상 1188>의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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