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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울에서 기쁨으로 (습 3:14-20) -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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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에서 기쁨으로 (습 3:14-20)


세계에서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 합니다. 2008년 기준 10만 명 당 자살자 수는 26.0명에 달해 1일 평균 35.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자살사망자는 1만 2,858명이었다고 합니다. 국립서울병원은 한 해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액을 3조 856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원인 중 우울증이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행복한 인간 생활을 좀먹고 있습니다. 복된 가정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해마다 질병에 걸린 환자의 27%는 이 우울증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오는 2020년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사망이 심장병 다음으로 많을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보건 사회 연구원 남정자 부연구위원과 서울의대 조맹제 부교수가 연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경증 이상의 우울증 유병률은 25.4%로 미국의 백인과 일본인의 10% 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34.5%나 되고 치료가 필요한 중증도 1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방치하면 15%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은 평생 유병율이 15~20%나 되는 흔한 질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4명의 사람들 중에서 1명은 우울증 경험을 가지고 있고, 7명 가운데 1명은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증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인도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 엘리야, 사울 왕, 모세, 욥, 다윗, 칼빈, 마틴 루터, 웨슬리, 찰스 스펄전,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등도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갖은 위대한 국가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 링컨, 윈스턴 처칠도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는 작가 포우, 도스토에프스키, 밀턴, 유진 오닐 등도 우울증의 고통을 앓았습니다. 우울증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종교가 있든 없든, 나이가 들었든 젊었든, 영리하든 우둔하든, 지식이 있든 없든 찾아와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이 늘 우울하게 보내며 불안과 걱정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불면증과 두통, 무력감과 패배, 좌절, 상실감의 노예가 되어 살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게 살기 보다는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데살로니가 전서를 통해 우리 신앙인의 3대 지침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면서 그 첫 번째가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입니다. 신명기에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12: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상실로 우울해 하지 말고 어떤 경우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임마누엘 하나님 

우울증에는 그 원인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아치볼드 하드( Archibold D. Hart)는 우울증을 ① 일차적 우울증 ② 내분비 장애와 관련된 우울증(체내의 뇌하수체, 아드레날린, 그리고 특별히 갑상선 같은 중요한 기관의 장애) ③ 경내인성 우울증들(내적 원인 즉 생체적 원인에 의한 것이지만 증상은 경미한 상태) ④신체질환에 의한 이차적 증상으로서의 우울증 ⑤갱년기 우울증(대개 중년기부터 노년기에 시작) ⑥신경적 우울증(성격적 특성) ⑦반응성 우울증(일반 사람들이 겪게 되는 대부분이 우울증, 일상생활의 일종의 대응, 상실감) 등으로 구분합니다. 대부분의 앓고 있는 우울증은 반응성 우울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성 우울증의 갖게 되는 대표적인 원인이 대상상실에서 온다고 합니다. 생에 의미 있는 사람, 의존하는 대상을 상실할 때 온다는 것입니다. 돈을 의존하다가 돈을 상실하거나, 명예를 의존하다가 명예 상실하거나, 권력을 의존하다가 하루아침에 감옥에 가면 우울증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남편 의존하다 직장 의존하다 의존하는 대상을 상실하면 우울증이 온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합니다. 부도로 인하여 물질을 상실합니다. 사고로 인하여 자녀를 잃습니다. 정권 교체로 사회적인 지위를 상실합니다. 직장을 상실합니다. 육체의 노쇠로 건강을 상실하고 기억력을 상실하고 체력을 상실합니다. 자존감의 상실을 상실합니다. 통제력을 상실합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우울증은 오래갑니다. 문제는 상실된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우울증은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놓아 주지 못함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가 죽은 것, 잃어버리는 것, 떠나 버린 것, 실현되지 못한 것, 과거의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사로잡힙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경을 기록한 스바냐 선지자는 왕족이었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는 나라는 국력이 쇠하고 지도자들이 부패하여 절망적인 때입니다. 

악한 므낫세 왕이 죽고 그 아들 아몬왕이 므낫세의 길을 가다 피살되자 어린 요시아 왕이 8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요시야 즉위 초기까지 남유다는 앗수르 제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 앗수르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대거 들여와 숭배하는 등 실로 정치적, 종교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아왕이 즉위한 후 앗수르 제국은 주변 속국들의 반란으로 큰 고심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남쪽 유다에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아왕의 거국적인 종교개혁을 도와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이 임할 것이니 그 때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장 2-3절을 보세요. 우주적인 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4-6), 지도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7-9) 부정직한 상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10-11) 불의로 축재하고 향락을 일삼는 자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12-13). 그리고 2장에 와서는 열국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쌓아 놓은 부도, 권력도, 사회적인 기반도, 다 상실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낙심이 되고 우울하겠습니까? 머지않아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가 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마다 깊은 두려움과 의기소침에 빠졌을 것입니다. 온 나라가 우울했을 것입니다. 기운이 쫙 빠지고 맥이 풀렸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고 웃음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내일 사업이 부도난다. 두 달 후에 죽는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놓고 떠나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3:13). 시온의 딸(14)에게 말씀합니다. 오늘날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런 절망적인 환경과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우울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십니까? 상실될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상실될 것을 생각하며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울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4절에 노래하라고 말씀합니다. 기쁘게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 없어져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상실로 우울해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빈손 들고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없어져도 본전입니다. 상실은 집착하면 우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해서 보냈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중년기가 지나면 상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리 하나님만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선물을 준 사람은 보지 못하고 선물만 좋아하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갖은 것 상실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떠납니다. 아름다움이 있을 때 좋아하다 아름다움 잃어버리면 떠납니다. 돈 있을 때, 권력 있을 때, 능력 있을 때 좋아하다가 돈 잃으면 떠납니다. 힘 있을 때 따르던 사람도 힘을 잃으면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 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했습니다. 피를 나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보디발에 집에 가서 성실하게 근무하였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용만 해 먹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감옥에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창 39:23)"

바울이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려버렸고, 그레스게도, 디도도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딤후 4:17-1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상실로 인하여 슬프고 기분이 울적하십니까? 모든 것을 잃어 버려 앞날에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가치한 실패자라고 생각됩니까? 갖은 것이 없어 다른 사람에 비해 열등하고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매사에 부족한 자신을 비판하고 자책하십니까? 갖은 것 없어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모든 것이 귀찮고 쉽게 화가 나고 짜증나십니까? 진로, 취미, 가족, 친구를 잃어 버렸습니까? 건강을 상실하여 늘 염려되고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하십니까? 늘 우울하게 살고 있습니까? 고아처럼 버려져 혼자라고 생각하며 고독해 하십니까? 끝없는 패배로 패배의식 속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니라." 이 시간 한번 마음 속 깊이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극력한 풀무불 속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박한 믿음을 가진 열 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처럼 늘어뜨린 손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자기 비하로 우울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왜 우울해 합니까? 왜 우울증에 걸리겠습니까? 심리적, 사회적, 유전적, 생물학적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원인으로 신경체제의 이상이 생겨 약물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체내의 내분비기관은 우리의 정서적 상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칩니다. 뇌하수체, 갑상선 같은 중요한 기관의 장애로 우울해 질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요인이 아닐 때 인지이론에서는 부정적인 인지 양식 때문에 우울해 진다는 것입니다. 기질 자체가 우울질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비관적인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하합니다. 

USA Today에 소개된 미국 근로자들의 우울증은 고독감, 일에 대한 권태, 건강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원인은 자기의 목표가 분명치 안다는 자기 비하(lowself-esteem)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다 끝났어, 내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아, 나는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어.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나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어, 교회에 나라고 누구 하나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비하하며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비하의 사고 그물망을 가지고 있으면 늘 우울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에 보면 “한국 사회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이런 제목의 기사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울해 집니다. 문화나 질서 의식이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의존 장애, 성형수술 집착, 집단 히스테리, 도덕무력증 등으로 한국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라는 것입니다. "한국 놈은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우울합니까? 자신을 비하하면 매사 의기소침하게 되고 희망이 없습니다. 성취욕도 사명도 없습니다. 

성경은 보십시오. 부패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7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타락한 백성이지만 이스라엘의 남은 자, 시혼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16:3)” 하나님이 우리를 비천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존귀한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존귀한 자로 보는 자신을 비하하며 우울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십니까?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구원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얼마 전에 등록하신 사랑이 엄마와 함께 신생아실에 가서 기도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가서 “사랑아, 사랑아 엄마 왔어” 부르는 다정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산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보며 엄마는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 우리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건을 보고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우리 조건보고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사랑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형벌에서 제하여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대가에서 용서해주고 구원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죄의식에서 해방 시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하나님만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 번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나를 사랑하신다.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신다. 나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한 악기점에 남루한 복장의 중년 남자가 들어 왔습니다.그 남자는 묵직하고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내밀며 부탁했습니다.“이 바이올린을 5달러에 사지 않겠습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요.” 악기점 주인 벤츠씨는 불쌍한 나그네를 돕는 셈치고 5달러를 건네 주었습니다. 중년의 남자는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한 후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벤츠씨는 그 묵직한 바이올린의 활을 당겨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 나왔습니다. 닥지닥지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속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1704년산.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그것은 바이올린의 거장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이었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10만 달러를 호가하는 최고의 명품이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우리는 각자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명품입니다. 자신을 5달러짜리 인생으로 비하하며 우울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받은 존귀자로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3. 우리는 미래를 비관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명성과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우울하게 사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비관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에 대한 흥미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활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절망적인 세상 끝내 버리자고 반복적으로 죽음을 생각합니다. 

오늘 스바냐를 통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유다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미래를 비관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얼마나 비관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날에 재산을 다 불타 버리고 땅은 황폐해 지고 지위는 다 빼앗겨 버린다면 얼마나 비관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시온의 딸, 남은 자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울해 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지 15절을 보십시오. 형벌을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날에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다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그 때가 되면 해방의 날이 옵니다. 자유의 날이 옵니다.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받을 날이 옵니다. 비록 이 땅에 살면서 저는 자, 수욕받는 자, 쫓겨난 자, 사로잡힌 자, 가난한 자, 흩어진 자로 살았지만 완전히 회복되어 칭찬과 명예, 그리고 영광을 얻게 될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너의 치욕 예루살렘의 황폐, 시온의 모독이 그들 유다 백성에게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면 괴롭히는 자를 벌하고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을 받은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세상을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끝은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울해 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고 힘들더라도 미래를 비관하지 말고 낙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도저히 희망이 없을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비관을 낙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 해결 되지 않을 것같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새하늘과 새땅이 옵니다. 회복의 날, 영광의 날이 옵니다. 그 날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이 땅에서 승리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하늘나라에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했다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1)" 

낙관주의란 단지 감정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긍정적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긍정적 믿음입니다.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긍정적 믿음, 상황이 변해도 변질되지 않는 긍정적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퍼스트 레이디들 중에서 `가장 호감가는 여성'으로 손꼽히는 사람이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라고 합니다. 엘리너는 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답니다. 열살 때 고아가 되어 한 끼 식사를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가진 것 없었지만 이 소녀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남들이 갖지 못한 낙관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여섯 자녀 중 한 아이가 사망했을 때도 그녀는 말하기를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걸”이라고 말했답니다. 남편인 루즈벨트가 갑작스럽게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을 때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서 꼼짝도 안하던 그를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다가 어느 날 함께 산책하자고 청했습니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엘리너가 다정하게 말했답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뒤에는 꼭 이렇게 맑은 날이 오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의 이 시련은 더 겸손하게 맡은 일을 열심히 하라는 하나님의 뜻일 거예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인생의 말년에 남편 루스벨트는 관절염으로 `휠체어인생'이 되었답니다. 휠체어의 루스벨트가 엘리너에게 “불구인 나를 아직도 사랑하오?” 그 말에 엘리너는 “내가 당신의 다리만 사랑했나요?”라고 말했답니다. 

어떤 환경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영광과 칭찬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울하게 살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실로 우울해 하지 말고 어떤 경우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상실에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우리는 자기 비하로 우울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비하에서 존귀로 우리는 미래를 비관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명성과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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