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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벧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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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벧전 1:3~9)

   
부활절은 한 날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왜 매년 달라지는 것입니까? 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활절은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4세기경까지 해마다 지켜야 하는 부활절 때문에, 어느 날 부활절을 지킬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그 견해를 달리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성금요일은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월 열넷째 날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니산월 열넷째 날에서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금요일이 화요일에 오면 부활절은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부활절이 주간에 와도 좋으니, 유대인의 달력을 따라 니산월 16일에 부활절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란 언제나 일요일, 주일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은 성금요일이어야 하고, 부활은 항상 주일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마침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해결되었습니다.    달의 중요함과 날의 중요함을 다 인정하면서 부활주일은 춘분 후, 첫 만월이 지난 후,  오는 첫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월 22일보다 빠르지 않고, 4월 25일보다 늦지 않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제8일이 됩니다.   우리 기독교회에서는 제8일이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8일에 도마를 포함하는 모든 사도들이 있을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라고 말하였지만, 도마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20:25)라고 말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제8일에, 오늘의 주일에 도마를 포함하는 모든 사도들이 집안에 모여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샬롬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20:27)  이 때 도마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그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유명한 말씀, 잘 알려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오늘의 본문 8-9절에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받아 읽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11:1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실상이란 확신을 말합니다.  실상이란 본질, 실체,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다 보아야 믿고, 알아야 인정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참으로 뒤처지고 바보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보지 못하였어도 존재하는 것들이 많고, 내가 알지 못할지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어야 내가 존재합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것을 내가 보지 못하였고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예수님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 못하였고, 경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이 분명히 계신 분이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한 번도 부인해본 적이 없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 주님을 보지 못하면서도 잘 믿고 있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저는 유진 피터슨 박사의 여러 책들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그분은 영성신학자로, 개신교의 영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학자입니다.    그를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거룩한 삶으로, 부활의 삶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중요한 것은 부활은 우리가 아는 대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롬8:11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믿는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려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이시요, 성령님도 살리십니다. 주님은 살아나신 영이요, 우리 안에서 살리시고 있습니다.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예수 믿는 사람은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절 말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삼고 있습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소망이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공존합니다.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산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확고한 기대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무엇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 소망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하게 살며,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가기를 힘쓰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태도, 자세가 다른 것을 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갑니다.  태산이라도 높다하지 않고, 도전하고 정복하게 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힘든 일도 싫어하지 않고, 감당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칠전팔기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쓰인 30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1)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2)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 
3)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4)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5) 공부할 때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6) 공부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7)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8)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전부도 아닌 공부 하나도 정복하지 못한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9)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 
10) 남보다 더 일찍 더 부지런히 노력해야 성공을 맛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소망과 열정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데이빗 제러마이어 목사는 “기쁨으로 주를 맞으리”라는 책에서 “소망을 품으라”는 주제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다시 의료 장교로 복무하다가 5년 동안 베트콩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 있었던 헤럴드 퀴쉬너(F. J. Harold) 소령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소령은 뉴욕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베트콩에게 잡혀 있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 미해병대원으로 2년간 포로로 잡혀 있었던 스물네 살 가량의 한 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쿠쉬너 소령이 그 해병을 만났을 때에 그 해병은 건강상태가 양호하였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령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포로 생활에서 잘 지낼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수용소 책임자가 자기에게 모든 일에 잘 협조해준다면 일찍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포로들이 일찍 석방되는 것을 목격했던 해병은 모든 일에 잘 협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포로들의 모범이 되었고, 미군 포로들을 모아놓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세뇌하는 모임인 ‘사상개조집단’의 리더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수용소 책임자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약속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 젊은이는 절망하는데 마치 시체와 같이 변해갔습니다.  모든 일을 그만두었고 음식도 기피하고, 누구의 격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원 간이침대에 누워서 손가락만 빨다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시일에 풀려날 것이라는 소망이 사라지자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절망 속에 죽어간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에 소망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입니까?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소망이 절실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사49:23에 보면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나라의 회복과 축복을 말씀하면서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에서는 “나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소망삼아야 합니다. 

시146:5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누구를 소망삼아야 합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시며, 소망이 되십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지금 세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며, 박해와 역경이 그들을 떠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이겨내고, 역경 속에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산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잠시 잠깐이요,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말 힘들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만든 사람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거나, 예수를 믿거나,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출회하기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가정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마을 공동체에서도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본도 갈리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로 흩어져 갔습니다. 

당시의 로마대제국의 황제들은 자기는 현현신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황제만을 숭배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또 다른 주, 또 다른 왕을 신봉한다고 하여 말살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약 250년간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거듭났으며,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4-5절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하늘나라의 유업은 썩지 않습니다. 썩지 않는다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부패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 자랑, 면류관이라고 해도 다 잊히고 썩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순수합니다. 순결하고 깨끗합니다.  하늘나라는 쇠하지 않습니다.  시들지 않는다, 쇠퇴하지 않습니다. 

유업이란 기업이라고 번역합니다.  상속 재산, 유산, 소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공동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셔서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셨고,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셔서 우리 안에 임재하게 하심으로 인쳐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유대나라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을 교육하고, 자식들을 사회에 진출시키고, 마지막에는 유산을 남겨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상속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함께 공동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3.  예수 믿는 사람은 시험을 이깁니다.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다 핍박을 피하여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첩첩산중의 갑바도기아 토굴 속에서 숨어 지내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데, 연단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혹독한 훈련이 없이 위대한 선수는 없습니다.  훈련소를 나오지 않은 군인이라면 군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군복 입은 사람이지, 군인이 아닙니다.  군인이라고 하면서 총을 한 번도 쏴보지 못하고, 기합도 한번 받은 일이 없다고 하면 그를 군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이 찾아옵니까?  시험을 치르지도 아니하였는데, 성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시험은 때로는 넘어지게 하는 유혹이 될 수 있어도 시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한동대학의 김영길 총장의 부인이신 김영애권사님은 지혜로운 어머니학교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강의를 들어보았는데, 정말 대장부와 같은 강심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여성이 되자고 합니다.  그는 어려운 순간, 고통스러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통 받는 순간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 같은데, 그 분 나름대로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문제나 혹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에,  “몇 년 지나면 어떨까” 어떤 문제라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문제는 일 년만 지나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떤 문제는 한 몇 개월만 지나도,  혹은 10년 후, 혹은 천국 가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 문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숨을 내 몰아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만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먹을 불꾼 쥔다고 합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순간만 보시지 말고,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8-9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시험을 이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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