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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대를 잇게 하라 (출 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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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를 잇게 하라 (출 3:13~15)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가 너를 보내었느냐’고 물을 때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하시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기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냥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아니요, 또는 ‘이삭의’, 또는 ‘야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것이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요,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요,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대를 이어서 이어지는 것임’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와 함께, 또한 바로 이 ‘대를 이어서 믿음의 가계를 잇고 있는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은 ‘한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심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라고 하는 예식을 제정해 주신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족속의 아버지’가 되도록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의 자손들 모두가 다 ‘할례’라고 하는 예식을 행하여 너와 너의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 표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창17:9-14).

이 할례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아세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에서는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만,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 ‘유아세례’나 ‘할례’는 어린 아이들이 자기의 의지나 또는 자신의 신앙고백에 의하여 받게 되는 예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할례를 베풀고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가계’에서 태어났기에, 그 부모의 신앙고백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태어난 이삭이기에 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의 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며;  또한 이 ‘이삭’에게서 태어난 야곱이기에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 때로부터 이어지는 믿음의 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하셨습니다.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라고 한다면,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란 바로 그 이름의 자리에 ― 아브라함의 자리에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이삭의 자리에 ‘여러분의 자녀의 이름’이,  그리고 야곱의 자리에 ‘여러분의 손자들의 이름’이 바로 그 자리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서,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며, 나의 믿음에 있어서도 대를 이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른 하나님의 칭호’를 부를 수 있도록, 새롭게 결단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의 대를 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모의 의지와 또한 모범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사례’를 통해서, 그리고 또한 많은 ‘실제로 믿음의 가계를 잇고 있는 분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부모의 의지와 모범!!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 레피즈라고 하는 곳에 사시는 부쉬라고 하는 분이 어느 신앙잡지에서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이 분은 몇 주 전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도와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든 중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반질반질한 호두 한 알을 발견하였는데, 어머님 말씀이 “그것은 바로 네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아버지께 선물한 호두알이란다.  아버지는 그것을 마치 보물처럼 지난 40여 년 동안이나 가끔씩 꺼내어보면서 사랑스럽게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것을 나는 보아왔단다”하고 일러주시더라고 합니다.
   
물론 부쉬씨는 자기가 그 호두알을 선물했는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여섯 살 때 초등학교 일학년 당시 학교에서 어느 동산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그 때 아주 큰 호두 한 알을 주어 와서는 아버지께 선물을 하더랍니다.  그 때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할 수가 없더란 것입니다.
   
보세요.  한 알의 호두! ― 돈으로 따지고 본다면 별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들의 사랑을 간직하려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보배였던 것이지요.  이렇게 호두 한 알 속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중에 40여년이나, 아니 그 후에까지도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49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인자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젖 먹는 자식을 한 순간만이라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태에서 성장하고 세상에 나온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출발되었고, 하나님께서 키워준 아들과 딸들이기 때문에, 잠시도 잊지 않으시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뜻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부쉬씨는 그의 간증 끝에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지금 어느 교회의 집사로서 봉사하고 있고, 지난 40여년의 생애를 통하여 한 번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본 적이 없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지만, 자신의 이 믿음 생활의 배후에는 바로 호두 한 알을 40여 년 동안이나 소중히 여겨 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이지요.  자신은 부모님의 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제 자기에게도 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자기 부모님이 자기에게 해 주셨던 것처럼, 또 자기가 자기 부모를 통하여 배웠던 것처럼, 자신도 자기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그런 부모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나를 통하여 나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배울 수 있는 그런 부모가,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서원을 하는 뜻이  바로 이 날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웁니다.  어떠한 아버지, 어떠한 어머니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였으며, 바울이 세운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이어나간 초대교회의 최초의 목사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며 교회를 설립하던 중에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감옥에도 여러 번 갇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모함도 받았으며, 중상모략과 배신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나 이 디모데를 통하여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는 언제나 디모데를 보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함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새로운 용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선교의 여정을 계속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높이 들어 칭찬하며, 그를 통하여 위로를 받으며 기쁨을 얻게 되는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말이 계속 됩니다.  이 거짓이 없는 믿음이 바로 그의 외할머니와 또 어머니 속에 있던 그 믿음을 디모데가 ‘배워서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영어성경에 보면 ‘sincere-진실하다’고 하는 말이 상용되고 있는데, 이 sincere란 말은 두 개의 라틴어 단어, sine란 말고 cere란 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밀랍초를 바르지 않았다’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옛날에 토기장이들이 그릇을 구워내었을 때, 흠이 있으면 양심적인 토기장이들은 그 그릇을 깨뜨려 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거기에 밀랍초를 바르고는 색을 칠하여서 깜쪽같은 모습으로 시장에 내어다 팔곤 하였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표도 나지 않습니다.  아주 멀쩡하지요.  그러나 조금 오래 쓰거나 또는 뜨거운 음식을 담게 되면, 금방 표가 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신용문제가 대두되게 마련인데,  그래서 토기장이들은 자기가 완성한 그릇에다가 ‘sine-cere ― 밀랍초를 바르지 않았다’는 딱지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여서 붙이고는 시장에 내 놓았다고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정직성과 신실함을 들어내고자 하는 표식이었던 것이지요.
   
요즈음도 영어로 편지를 쓸 때, 제일 밑에 ‘sincerely’하고는 자기 이름을 ‘싸인’하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래된 풍습인 것입니다.

디모데는 sincere한 믿음 ― 거짓이 없고 위선적이지 아니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교회의 제일 처음의 목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늘 위로와 기쁨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디모데의 바로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다름 아닌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매일 매일 드리는 기도와 성경 읽는 것;  겉으로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진실한 신앙의 자세;  꾸미지 아니하는, 거짓이 없는 일상의 생활이  바로 이와 같이 디모데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또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자녀들에게로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나를 보고 나의 자녀들이 ‘참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아버지 어머니,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모두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러한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몇 분의 사례를 좀 더 찾아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장차 이루어질 정의로운 사회인 메시야의 왕국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희망하였던 분입니다.  그래서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 편에, 다른 아들은 주님의 왼 편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모습!  어떻게 보십니까?  소위 치맛바람을 날리는 그런 어머니로 보이지를 않습니까?
자기 자식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적성과 역량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그저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희망사항들을 무조건 자식들에게서 이루어보려고 무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는 그런 분들이 가끔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한 참된 사랑도, 교육도 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문제아들이 이런 부모 밑에서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만을 본다면, 이 어머니는 무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는 그런 분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함께 읽어본다면, 이 분은 결코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위대한 어머니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바로 이 어머니는 다른 몇 명의 여인들과 함께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 장면을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즈음 같으면 인권과 인도주의가 많이 통하는 세상이라, 사형당하는 사람에 대하여 동정하는 것이나 사형집행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옛날의 전제국가에서는, 특히 로마의 통치 하에서 식민지의 사형집행에 있어서는, 일체의 반론도 동정도 허용되지 않던 그런 당시의 사회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 보시는 바대로, ‘사형!’하고 일단 선언되면 상소나 재심이란 것이 없이 곧바로 끌어내어 집행해버리고 마는 그런 때입니다.  이 때 만일 누군가가 “재판이 잘못되었다”든지, “그는 죽을 죄인이 아니라”라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도 곧바로 그 죄수와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점을 놓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를 지는 자를 동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한 사랑의 고백이요, 동시에 나도 그와 함께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각오와 헌신이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그 많은 무리들과,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결국은 십자가 밑에 있은 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고,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이 어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이 어머니는 무작정 치맛바람만을 날리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이 있었으며, 이제 주님께 두 아들마저도 쓰이게 하고자 하는 큰 희망과 큰 꿈을 가졌던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희망을 향해 기도하며, 스스로 앞장서 나가는 개척자와도 같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지막 증인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어머니였기 때문에, 이 어머니의 기도와 꿈은 남김없이 성취되게 됩니다.  그의 한 아들 야고보는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순교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아들 요한은 제자들 중체서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아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가 된 것입니다!!

미국 보스턴에 가면 조각가 Cyrus Dallin이란 사람이 조각한 ‘Pioneer Mother―개척자 어머니’라고 하는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한 손에 성경을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린 아들의 손을 힘차게 잡고, 그리곤 앞으로 개척해 나갈 새 땅의 하늘을 희망의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이지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 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아들과 딸은 우리 부모의 모범과, 또한 위대한 꿈과, 그 선구자적인 발자취의 소산인 것입니다.  부모의 희망과 기도와 발자취는 그 자녀를 야고보와 요한처럼 주님께로 인도하며, 훌륭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분만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마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있어서 아들에게 본을 보여준 훌륭한 어머니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시는 바대로, 이 분은 경제적으로 조금 넉넉하여서 큰 주택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집을 공개하여서 예배당으로, 예배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 당시는 요즈음처럼 교회의 간판을 밖에 내다 걸거나, 또는 무슨 집회가 있다고 신문에다가 광고를 내며 떳떳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처형 후에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음으로,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비밀 예배장소로서 자기의 집을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모험이며, 희생을 각오하는 순교자의 정신이 없이는 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마가의 어머니가 어떤 신앙을 가졌고, 얼마만큼 교회생활에 충실하였으며 모범적인 크리스찬이었을까 하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린 소년 마가는 자기 집안에서 생겨지는 이런 사실들과,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런 어머니 아래에서 마가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는 사도 바울의 오른 손이 되어 기독교 초창기에 대표적인 선교사가 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하여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는 초대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 있어서도 맹자의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이 가정교육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는 어린 아들 맹자가 묻습니다.  “어머니, 어째서 저런 일들을 하는 것이지요?”  맹자의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합니다. “너에게 고기를 갖다 주려고 그러는 거겠지!”
   
이런 식의 빈말들을 우리도 평소에 자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부질없는 즉흥 농담도 거짓임을 안 이 어머니는 일부러 이웃에 가서 고기를 사다가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조금도 거짓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작은 거짓말도 거듭하게 되면 큰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자녀가 거짓말을 할 때에, 비록 그 거짓이 아무리 해롭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시정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부모가, 말로만 아니라 모범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쇠에 덥히는 녹이 모르는 사이에 그 쇠를 먹어버리는 것처럼,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먹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큰 꿈을 가지며 앞장서 나갔던 선구자와 같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실질적 생활을 통하여 신앙생활, 교회생활,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생활을 몸소 보여준 마가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거짓 없는 신앙교육을 한 디모데의 어머니는 모두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들입니다.
이런 어머니, 이런 아버지가 여러분 모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을 통하여 그 신앙이 여러분의 자녀에게로 상속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늘 마음속에 깊이 새기도록 하세요.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하여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이름 바로 그 자리에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또한 이삭의 이름 그 자리에 바로 여러분의 자녀의 이름이,  그리고 야곱의 이름 그 자리에 바로 여러분의 손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하며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칭호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대를 잇도록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바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 ‘바른 칭호’를 여러분 가정에서 부르시며,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후손에게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시는 바로 여러분의 가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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