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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6) : 베다니 (요 11:1~4,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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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6) : 베다니 (요 11:1~4,43~44) 

 
수년전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살아있는 인물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오프라 윈프리, 마더 테레사, 빌리 그래함등” 여러 인물이 열거 되었는데 한 소녀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난 여러분에게 살아있는 인물 중에서 존경하는 이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어린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부활의 축제를 가졌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이 반드시 우리에게 부활의 역동적인 삶을 사는 보증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믿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날마다를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그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다니에서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감람산 동편 약 3-4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생긴 이 마을은 아랍어로는 ‘엘 아자리에’(el-Azariye)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을 나와 밑으로 약 20m정도 내려가면 은색 지붕의 프란치스칸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54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발루지에 의해 건립(4세기 나사로의 무덤으로 알려진 전승의 터전 위에)되었는데 윗벽에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여인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한 마리아의 집도 보존 되어있는 이 마을 ‘베다니’라는 지명은 본래 ‘베이트 아니’(가난한 이의 집) 혹은 ‘베이트 아나니아’(아나니아의 집)이란 뜻인데 예로부터 가난한 자들과 나병환자들이 살던 마을이지만 예수님은 이 마을을 자주 찾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가난한 마을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위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부활의 산 기적을 베푸시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의 시청각적 교훈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부활의 믿음을 넘어서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1.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고난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게도 왜 이렇게 인생의 힘든 사건들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도대체 하나님은 예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우리는 피해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역동적인 부활신앙을 갖고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고난은 올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의 집의 식구들 적어도 그의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자매만의 주관적인 확신은 아니었습니다. 

요한11:5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한복음의 기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본래부터>(지금까지,now) 이 가정의 가족들을 사랑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사랑’의 단어는 원문에서 사랑의 최고의 형태를 묘사하는 ‘아가페’가 쓰여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께서 아주 특별하게 사랑한 사람에게도 질병과 고난, 그리고 죽음은 찾아 올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밖의 고난이 성도에게 찾아 올 때 먼저 우리가 기억할일,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거나 나를 버리심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벧전4:12-13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사도 야고보도 동일한 교훈을 약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여기서 ‘여러 가지’라는 말은 본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실로 인생에는 무수한 색깔들의 시험들이 존재합니다. 건강과 질병의 시험, 불의의 사고의 시험, 관계 왜곡과 단절의 시험, 오해 받음의 시험, 돈의 시험, 이성의 시험, 권력의 시험, 허영의 시험, 실직의 시험, 사업 파산의 시험등 얼마나 많은 시험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지요? 이런 삶의 시험들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것이 바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시험들을 만날 때 우리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시험을 만나서 우리가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의 두 번째 레슨입니다. 


2.성도의 고난 건너편에 부활의 영광이 예비 됨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하면 오늘의 질병이라는 고난 저 건너편에 영광의 사건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찍이 베드로 전서 4:12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 불과 같은 시험을 당할 때에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 절에 약속하신 바와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벧전4:13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본문의 사건의 현장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요한복음 11장 6절에 보면 주께서는 그가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의 질병의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에게로 당장 달려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셨지요? 6절을 읽어 보십시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무슨 말입니까? 일부러 늑장을 부리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한마디로 더 큰 주의 영광을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베다니 나사로에게로 가셨습니까? 

요한11:17에 보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 간지 나흘만이었습니다. 여러분, 나사로가 아파 누었다가 예수께서 오셔서 치유 받아 건강을 회복하는 일과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 부활하는 일중에 어떤 일이 더 위대한 사건이었을까요? 설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나사로의 질병과 사망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는 부활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계시하시는 하나의 예증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질병 소식을 듣고도 요단강 건너편(요10:40)에서 이틀이나 늑장을 부리시다가 나사로의 완전 사망을 기다려(당시 유다의 풍습은 죽은지 나흘이 지나야 사망으로 처리함)그의 무덤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질병의 고난, 심지어 그의 죽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섭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고난에는 준비된 하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8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성도가 할 일, 고난 저 건너편에 예비 된 하늘의 영광, 부활의 영광, 재기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3.말씀의 능력으로 결박을 풀고 살아감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역동적인 부활의 능력으로 인생을 사는 세 번째 비밀,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아직도 매고 있는 사망의 결박들을 풀고 사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43-44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 예수님의 나오라는 말씀의 선포와 함께 나사로는 살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사로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의 많은 구원은 받고 믿는 자는 되었으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성도들의 그림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다시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때 비로소 나사로는 부활의 능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믿고 교회는 나오지만 말씀의 능력을 혹은 성령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닙니까? 

우리 교회 성경 공부 중에<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있습니다. 이 공부를 마친 많은 성도들의 간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면서 참으로 말씀의 능력을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저의 삶에 살아계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말씀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주님의 함께 하심을 문자 그대로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망의 베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을 매고 있던 결박을 벗어 던지고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주와 함께 찬양하고 춤추며 사는 놀라운 역동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1970년대에 저는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며 한 편의 신앙 시를 한국 교회에 번역하여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란 시입니다. 들어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하늘을 가로질러 내 인생의 장면들이 펼쳐졌다네.-모래위에 두 짝의 발자국이 있었다네./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거기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들을 보았네./내 발자국이 멈추어진 그 곳에서/내 삶의 길을 되돌아보았네./자주 그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였네./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저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때 거기에는 오직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제 곁을 떠나 버린 주님을-주님께서 다시 대답하시었네./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난 너를 사랑했고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네 시련의 때, 고통의 그 때에도/네가 본 오직 그 한 짝의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니라./그때에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그런데 최근에 이 ‘시‘가 업그레이드되어 제2탄이 나온 것을 아십니까?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또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꿈속에서 모래사장에 있는 발자국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에 발자국은 여전히 한 짝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그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예수님, 예수님, 정말 힘든 저를 업고 걸으시느라 많이 힘드셨군요. 죄송해요/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네./그래 그때는 폭풍우를 지나는 때이어서 그랬구나./그런데 주님 보십시오. 이번엔 다시 지그재그로 더 엉망이 된 두 짝의 발자국이 나타났어요, 그건 왜 그런가요?/아이야, 기억 못하는구나./그때는 우리가 함께 춤을 춰서 발자국이 저 모양이란다.”(That was when we danced)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춤추며 가고 싶어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의탁한다면 성령은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결박을 풀고 춤추게 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부활의 계절에 이런 춤추게 하시는 말씀의 능력, 주 임재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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