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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절기를 지키려 하다 (출 5:1 ~ 출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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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를 지키려 하다 (출 5:1 ~ 출 6:1)
 

오늘은 2010년 교회력을 따라 부활절로 교회가 절기를 지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신약교회의 최대 명절은 성탄절보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약하게 절기를 지키는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예수의 나심도 그의 부활하심을 목표로 하셨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실제 예수의 나심보다 부활하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고민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활리듬이나 환경에 앞서서 어찌하면 더 적당한 부활절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성탄절을 교회의 최대 명절인 줄 알고 덩달아 기뻐하고 오히려 교회보다 더 앞장서서 떠들어대며 상술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더 성대하게 나타내고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불교의 석가탄신일처럼 성탄절을 최고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부활절을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부활의 종교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는 고린도전서 15: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 하면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과 모든 신앙고백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4복음서의 모든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은 4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에 그 결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해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어찌하면 교회의 최고의 즐거운 절기로 만들어갈 수 있나 연구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절 본문으로 여러분과 제가 읽은 출애굽기 말씀은 언뜻 보기에 부활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직접적으로 부활을 증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모든 본문은 한 말씀이라도 부활과 관계가 없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말씀은 기독론적 해석을 따른다면 부활로 말미암은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부활절이라는 한 해의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말하는 것 보다는 부활절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난 삶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구약 출애굽기 본문을 통해 알고 그 삶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께 이런 질문을 먼저 드리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이 무엇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물론 저희 교회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은 새로운 질문은 아닙니다. 예배예전을 갱신할 때나, 신입반의 새신자의 기본도리를 배울 때에도 이미 여러분께 드렸던 질문이고, 우리의 구원관을 바꾸기 위해 수시로 여러분께 드렸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출애굽기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의 구원얻은 삶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심을 따라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어 달라고 하는 내용이 그 중심입니다. 늘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지만 항상 첫 부분에 나오는 말씀이 그 단락이나 장의 주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5: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하셨나이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 중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여호와의 말씀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직접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관계되는 말씀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 앞에 하는 말이 광야로 내어보내어 달라고 하는데 그 목적이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정말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어보내 달라고 하는 목적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나오는 구원의 목표가 가나안 땅에 들어감이 아니라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하니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보낼 것을 말씀하실 때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7-18절 말씀입니다. “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였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가나안 일곱 족속의 땅에 올라가는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 그 목표는 뒤에 있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달라는 목표가 여호와 앞에 희생절기를 지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왕에게 말하면 그는 금방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강한 손을 나타내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하겠다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시고 기적을 세 가지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의 바로 왕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냈다는 것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극심한 압제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4대 만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이 이스라엘이 번성함을 두려워하여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였지만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 왕보다 여호와를 더 경외함으로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을 살렸고, 모세의 어미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그를 숨겼으며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 보냈는데 애굽의 공주가 물에서 모세를 건져 바로의 궁에서 모세를 자라나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스스로 자기 동포를 위하여 싸웠지만 미디안 광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40년이 지난 뒤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내산에서 불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로 세우셨고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보내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은 바로 왕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재차 요청을 하였으나 바로 왕은 듣지 않고 어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하는 일을 쉬게 하려느냐고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은 벽돌을 구워 애굽의 건설사업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짐으로 애굽보다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이스라엘에게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달라 하는데 그 목적은 여호와 앞에 희생절기를 지킨다는 것이었으니, 바로 왕이 듣기에는 할 일이 없어 괜히 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일이 없어 놀기 위하여 쓸데없이 광야로 나가 절기를 지키려 한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노역을 감독하는 자들을 불러서 더 심하게 일을 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왕이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게으르다, 게으르다’를 반복하며 이스라엘의 게으름을 강조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에게 요구를 하기 전에는 건축재료인 짚을 주어서 국고성을 짓게 하였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재료를 구하여 성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소리를 한다고 여겨 그들 스스로 진흙과 짚을 구하여 벽돌을 구워 성을 건축하도록 한 것입니다. 

원래 일이 심하여 매우 힘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바로 왕에게 탄원을 하였는데 그 까닭은 모세와 아론의 요청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모세와 아론을 만나 그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큰 권능의 손을 경험하고 내어보낼 것임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강한 손은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10재앙을 통해서 나타나며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모여 여호와의 말씀에 응답하여 언약을 맺고 모세로 말미암아 성소를 그들 중에 짓습니다. 이 성소를 지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 강림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해서요, 함께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전체적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이 구원론에 치중되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개념을 자신의 도덕적인 변화나 인격의 완성을 말한다고 알고 있고,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이러한 선입견적인 구원론의 개념 때문에 우리는 오늘 출애굽기 본문과 같은 내용을 읽을 때, ‘절기를 지키려 하노라’와 ‘희생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말씀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쉽게 간과하고 맙니다.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려고 내어보내달라고 하는 말과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내어보내달라고 반복해서 여러 번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즉 이런 성찬에 관계된 말씀이 성경에 중요하게 반복되는데도 우리가 들은 교리의 가르침 때문에 눈이 가리워져 잘 보이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게 말하라고 한 것은 그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배 곧 제사가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에게 요구한 목표였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사는 것이 출애굽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후반부의 거의 모든 내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할 성소를 짓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마지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공한 성소에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셨다는 내용이요, 그게 결론입니다.

그런데 성소를 짓는 장소가 사막 한 가운데, 광야에 짓는 것이 고작입니다.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해서 아주 초라한 천막으로 지은 성소였습니다. 이런 성소를 짓는 것에 대하여 출애굽기는 거의 반이나 할당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소가 완공되면 레위기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예물을 드려 성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의 앞 뜰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제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반복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별로 화려한 궁전도 아니요 멋있는 행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절기를 지킴에 대하여, 희생제사를 드림에 대하여 많은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아야 하고,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시므로 그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의 강한 손이 바로 왕을 압박한 것입니다. 결국 바로 왕은 이 여호와의 권능을 보고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어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유월절에 있어서도 모세가 기록하는 중심을 보자면 얼마나 큰 권능이 나타났는가 보다는 도리어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를 더 많이 기록합니다. 이 유월절에 어린 양의 고기를 먹고 쓴 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이 유월절의 먹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모여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후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이 시내산 위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영광을 보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완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의 먹음으로 출애굽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의 먹음으로 그 목표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유월절과 시내산의 먹음이 한 세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얻은 삶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심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바로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가 아주 게으른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막대한 인력, 즉 노예로 부리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어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로 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 일하기 싫으니까 쉬려고 하는 잔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왕이 ‘역사를 쉰다’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값싼 노동력이 현대에도 얼마나 큰 경쟁력을 갖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가해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여겨 더 많은 일거리를 주게 하였습니다. 게을러서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더 심하게 일을 부과하고 혹독하게 감독하라고 일렀습니다.

이런 압박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도 왜 바로 왕 앞에 쓸데 없는 소리를 하여서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켜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은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의 미움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이 칼로 이스라엘을 죽일까봐 걱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일을 감독하는 이스라엘의 패장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것이 여호와 앞에 옳은 일인지 판단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애굽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의 미움을 사는 것이 여호와 앞에 옳은 것인지, 모세와 아론이 애굽 왕 바로에게 요구한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패장들은 바로 왕이나 그 신하들에게 미움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불평을 듣고 모세와 아론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세웠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망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는 더 강한 손을 나타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출애굽기 다음 장에서부터 10가지 재앙이 하나씩 나타나고 결국 유월절의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사 이스라엘 백성을 대대적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얻은 삶을 말한다고 하면, 애굽에서 나오면 사흘 길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니까 가나안 땅에 속히 들어가는 것으로 완결되었을 법 합니다. 그런데 자그만치 40년 동안이나 천막으로 지은 성소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행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나안 땅만이 구원의 목표라면 이렇게 길게 기록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드라마인지 잘 모르겠는데 일과 성공에 미쳐서 사는 남편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남편은 집에까지 일을 갖고 들어와 밤새도록 그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부인이 왜 집에까지 일을 갖고 와서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앞날에 위대한 성공을 바라기보다는 오늘 이 시간에 자녀들과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움이 부인에게 더 크고 좋게 보였던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자녀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일에 대하여 그렇게 매달려 사는 것을 좋아하지도, 달가워하지도 않습니다.

혹 우리는 일에 매달려 밤낮없이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삶의 원대한 목표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학업 중에 있는 학생이라면 밤낮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앞날에 어떤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은 그저 일과 공부만 생각하고 달려갑니다. 

바로 왕의 입장에서 보면 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아가 절기를 지키며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왕이 ‘게으르다, 게으르다’고 반복하며 말하는 것이 어쩌면 정당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일을 부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얻은 삶은 어떤 성을 짓고, 어떤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최종 목표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이것이 완성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교제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본질은 어디에 어떻게 마지막으로 골인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와 함께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본질적인 구원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제가 누리는 구원의 삶도 이 성찬상 앞에 나아와 먹고 마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성찬상을 들여다 보면 별 것 아닙니다. 비싸고 맛있는 빵도 아니고, 포도주도 아주 값나가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중에서 아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 먹고 마십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누가 위대하다거나 대단하다고 평가를 하겠습니까? 주일마다 교회가 이 주님의 성찬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 ‘저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 한가하니까 저렇게 하는가 보다’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그렇게 보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는 것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바로 왕과 신하들의 미움을 사지 않는 일이 더 하나님 앞에 온당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기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인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맡은 일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크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여 사는 삶이 아주 대단하고 환타스틱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치 꿈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달콤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혼의 실체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뜯어보고 말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큰 이벤트가 연속되는 것도 아니고, 살수대첩과 같은 놀라운 승리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 단순하게 한 상에서 한 가족이 먹고 마시는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업적을 이루어 드리고, 선교적인 큰 행사를 치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 사는 것인양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상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와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이 조그마한 삶들을 더 기뻐하십니다. 아주 작은 떡덩어리와 보잘 것 없는 포도주 한 잔으로 표시되는 이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삶이 더 위대하고 값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니까 천지가 뒤바뀌고, 자기 삶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전폭적으로 뒤바꾸어졌다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야만 은혜요 구원이라고 여기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얻은 삶은 주일에 주님의 자녀들이 한 상에 앉아 먹고 마심으로 누리는 교제가 그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바로 왕과 같은 자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로 미움을 받지 않고 대단한 평가를 얻어내는 것이 빛이 되는 삶이라고 스스로 속기 쉽습니다. 그들의 칭찬을 얻어야 하나님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일도 성실하고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한 것 때문에 주님의 상이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소홀히 여김을 받는다면 깊이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그저 매주 반복되는 주님의 상 앞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스스로 무슨 큰 업적이나 성과를 이루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부활의 권능이 나타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슨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또는 공중부양을 통해서 저 천국으로 즉시 입장하게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유월절 식사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주님이 함께 먹고 마심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유월절이 시내산의 먹고 마심으로 완성되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오늘 부활절에 이 부활의 목표는 이 다음에 죽은 후에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한 것이 일차 목표는 아닙니다. 죽은 자도 다시 살 것이라는 신기한 일을 바라보라는 앞날의 미래만을 말하기 위한 목표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20장과 21장에 부활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에게 오심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물하시고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제자들에게 오심은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한 도마에게 부활의 영광의 몸을 보이시고 그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에 나간 제자들을 만나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고기를 잡게 하시고 숯불에 잡은 고기와 떡을 구워먹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권능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그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지심은 이렇게 숯불에 제자들과 고기와 떡을 구워먹으려는 것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영광으로 오신 주님을 알고서는 배의 그물을 버려두고 급히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와서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삶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심, 이것이 주님이 가져오신 영생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통하여 우리가 부활절을 기뻐하고 성탄절보다 더 영광스럽게 기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교회가 이 주님의 날, 그의 부활하신 영광의 날에 한 자리에 모여 한 상에서 먹고 마심도 바로 이 구원의 나타남이요 실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보통 바깥에서 성공적인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저 우리 식구가 하루 한끼라도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아주 평범한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우리의 구원의 삶이 무엇이냐고 할 때, 이 다음에 확실히 자신이 천당갈 수 있다는 다짐이나, 확신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목표가 구원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매 주일마다 한 상에 참예함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도 이제 주일에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 때문에 주일에 빠지는 것이 아주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직장의 동료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괴로워하여 주일의 주님의 상에 앉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다가 주일에 직장의 일을 위하여, 상사의 눈에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정당한 판단으로 행하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음에 천당을 가냐 못 가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주의 날에 주님의 상에 앉아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본질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매주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행사나 예식으로 생각할 뿐, 우리의 먹고 마시는 이 성찬이 바로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요 즐거움이며 구원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구원의 실제를 우리는 자기 마음의 확신으로 확인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실제가 여기 성찬에서 드러나고 확인된다는 것을 미처 알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개척초기부터 성찬을 주일예배의 중심으로 가져왔습니다. 예배예전 안에서 성찬으로 교제하고 애찬으로 나누며 하루종일 형제 자매들이 함께 기뻐함으로 교제함이 우리의 구원이었습니다. 큰 행사나 업적보다는 주일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먹고 마심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그런 온전한 교제를 목표로 교회를 세워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우리 중에는 주일에 단지 예배시간에 함께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나타내고 나머지 모든 삶은 일에 집중되어 있거나 자기 개인의 삶에 집중을 하는 경우가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주일에 생명이 충만해서 형제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충일해 있어야 하는데 일로 인하여 피곤하고 힘들어 하며 정말 억지로 예배하는 듯한 모습이어서 염려가 매우 큽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 식사는 이어지는 무교절 7일의 성회로 확대되었고 시내산의 70장로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백성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주님과의 만찬이었고 이 먹고 마신 식사는 주님의 죽고 부활하신 권세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함께 하신 식사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권능의 식사 교제가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죽기 전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망하였지만, 부활의 영광으로 오신 주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상에 앉는 백성으로 끝까지 주님께 충성하여 따랐던 것입니다. 

유월절 최후만찬을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에서 함께 하시는 교제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여 거꾸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주님은 이 식사교제 가운데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3번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보고 먹고 마신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몸에 연합하여 먹고 마심으로 그들은 다시는 주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주님의 길을 좇았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교회는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식사 교제로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상에 앉아 먹고 마심이 우리의 능력이요 구원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한 순간 예수 믿는다는 고백을 통하여 이 다음에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입장시켜 준다는 거짓말에는 속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모이며 매주 성찬함으로 반복하는 삶을 계속함으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한 주의 거룩한 성찬에 참예함을 가볍게 여기는 자에게는 영생에 이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5-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절씩 교대로 읽겠습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나는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을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재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큰 만찬을 배설함은 주님의 상으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배설했다 함과 같습니다. 이 잔치에 청하였으나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구약 백성으로서 밭을 산 자요, 소 다섯 겨리를 산 자요, 장가 든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일로 가버리고 주인의 잔치를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병든 자들처럼 구약의 소외된 천한 이방인들을 불러 잔치 자리에 채웠습니다. 이 잔치를 외면한 자들은 가나안 땅을 목표로 구원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의 나라를 목표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의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복된 자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방인이어서 구약의 죄인이며 병든 자로 주님의 상에 나아올 수가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강권하셔서 잔치 집에 채우신 것입니다. 

내 일과 모든 경우보다 더 이 만찬에 참여함을 복으로 알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의 중심과 목표가 이 성찬상에 앉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주일의 교제를 기뻐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분들을 세상 사람들은 이상히 여기고 게으르다고 하며 핍박하고 압제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24시간 일해도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일함으로 이 세상의 목표가 성취되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삶은 썩어짐으로 끝나고,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이며 영생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삶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주일의 교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던 유월절 권능이 아니라 부활하신 권능으로 주님의 몸에 연합하고 주님의 상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활의 상에 앉는 것은 재미가 없고 실속이 없으며 수입이 되지도 않아서 토요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주일 아침에 허겁지겁 달려와 설교 시간에 꺼벅꺼벅 졸고 있다면 어찌 이것이 주님의 구원을 얻은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워렌 버핏인가요? 그 사람과 한 번 점심이라도 먹을려면 얼마나 큰 돈을 지불하고 먹어야 하는지 그 식사권을 경매에 붙인 적이 있었습니다. 경제 대가와 식사하는 영광을 큰 돈을 지불하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에 먹고 마시는 이 성찬은 그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보잘 것 없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이 주님의 살과 피로 언약하신 생명의 잔치요 구원의 잔치임을 알고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감히 세상의 어떤 값으로도 치를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의 잔치인 줄 알고 여기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백성이 부활절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의 교제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식사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어느 가게에 가면 ‘주일에 쉽니다’라는 팻말을 써붙인 것을 보곤 했습니다. 제가 트집을 잡자는 것이 아니라 그 팻말을 제가 붙인다면 이렇게 써서 붙이겠습니다. ‘주일에는 예배합니다’라고요.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아 이 주일에 예배 즉 주님과의 교제를 최고 목표로 두고 그 안에 먹고 마심을 최고의 행복으로 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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