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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지금, 당신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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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부활은 지금, 당신에게 일어나야합니다 (눅 24:13~35)
 

1. 소문과 사실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해 승조원 46명이 실종된 사건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와 소문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나온 소문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이나 특수공작, 혹은 기뢰에 의해 침몰했지만, 정부가 이를 은폐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천안함> 후방에서 진행 중이던 <속초함>이 미확인 물체, 물론 “다수의 새떼”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을 향해 함포를 쏘아댄 것이 ‘북한 개입설의 증거’라 하여 이 소문이 제법 설득력을 가지고 퍼졌습니다. 

두 번째 유언비어 性 소문은 당시 인근 해상에서 한미합동작전이 실시 중이었는데, 그 훈련의 오폭으로 인한 사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은 한때 잠시 떠돌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또 다른 소문은 구타와 가혹 행위 등에 시달린 후임병이 폭발물을 터뜨린 ‘내부사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고 당시 병사들의 침실 문이 잠겨있지 않았고, 상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이 함정을 폭발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 상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고 원인과 사고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정부나 군 당국이 뭔가를 쉬쉬 하면서 감추는 것 같은 상황이다 보니, 이런 근거 없는 추측과 소문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가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소문대로 일지 아니면 소문과 전혀 다른 이유일지 기대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여러분, 잠시 떠돌던 소문이 그 당사자의 등장과 그를 직접 만난 증인들로 말미암아 사실로 확정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소문 그 자체는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고, 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앞에 있었던 사건이 너무나 생생했으며 그리고 그에 대한 증인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사실이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일은 실제 발생한 것임이 입증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2.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1)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

예수님은 분명히 사망했습니다. 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이나 유대 지도자들 및 그 수하들이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망을 그렇게 확실하게 확인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말한 대로 혹시 살아나거나, 아니면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다가 뭔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일 후, 분명히 죽었고, 여러 사람이 거듭 그 죽음을 확인했었는데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공개적으로 처형되었고,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확인했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시신을 염하고, 수의를 입힌 후, 큰 바위에 만들어진 굴속에 넣었으며, 총독 빌라도의 이름으로 그 무덤이 봉인 되었고, 군인들이 무덤 입구에서 지키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로마 당국이 나서서 그 소문을 확인할 결과,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총독부 당국과 유대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아는 몇 사람을 불러다가 ‘부활은 없었고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날조되고 조작되었다’는 반대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부활이 분명히 일어난 사실이기에 날조했지, 없었다면 그들은 무덤을 열고 시신을 꺼내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덤을 공개하여 수의에 둘둘 싸인 채 썩어가는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입단속만 시켰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있을 수 없는 일”,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날조한 말을 오히려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였고 그것이 2천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과거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주과학의 발달로 화성 금성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머잖아 우주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학의 발달로 동물을 복제하는 것은 이미 옛 일이고, 사람의 장기를 복제하여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치료하는 일이 곧 실제가 될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화상으로 전화하는 시대가 되었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TV를 볼 뿐 아니라, 시장을 보고 쇼핑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더 이상 “불가능”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요? 지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머잖아 가능해 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은 끝내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은 조작될 수 없는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의 명단이 그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등 주님의 제자들이 차례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500여 명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또 다른 야고보가 그를 만났고, 한 자리에 모여 있던 사도들이 다 함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났으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수의 여인들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주 특별한 목격담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은 글로바라는 제자와 그의 친구로서,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비록 12사도는 아니지만, 초창기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고 있던 시간은 안식일 다음 날, 바로 부활이 일어난 그 날 아침이었습니다. 새벽에 마리아가 골고다 언덕에 있는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으로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고 다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약 11km) 떨어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것이 一波萬波로 퍼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아예 소문의 진상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기대하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虛無한지를 吐露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서 그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 기대는 21절 말씀대로, 개인적인 野望이나 成功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이 기대한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문제, 즉 로마와 이방인의 압제에 의해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강한 나라를 세워 옛 다윗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이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지지하여 따랐으며, 일부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 총독부, 헤롯 왕, 유대 지도자들까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위협이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숙원인 해방과 건국은 머잖은 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대요 꿈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나약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어떤 反抗이나, 군중을 煽動하는 것이나, 특별한 행동 하나 취하지 않고 그냥 허무하게 죽어버렸습니다. 비록 뒷 예기가 계속 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이었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에 대한 것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든지, 그 길을 걸으면서 “이 모든 된 일”,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 지루한 여행에 심심치 않게 만드는 ‘말거리’ 이상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여긴 그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虛荒된 예기에 다시는 자신을 맡길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한 번 속은 것으로, 한 번 당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허황된 이야기에 자신을 맡기기보다 고향으로 돌아가 실제적인 일이나 하면서 새로이 출발할 것만 생각하기로 한 것이죠.

2) 부활의 주님은 그들과도 동행하신다!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하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16). “눈이 가려져 있었다”는 말은 제자들의 눈이 뭔가 다른 것에 “붙잡혀있었다”는 뜻입니다. 굳이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제자들이 뭔가에 씌워져있었다’, 혹은 ‘뭔가에 홀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기대와 꿈이 물거품 되고 이제는 실패자로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파묻혀서 였을까요?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 지를 고민하느라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시 그들처럼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인생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여 떠나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이 말은 본문의 두 제자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오셨고, 곁에서 걸으셨으며, 식탁에도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두 제자처럼 우리 자신의 삶이나 현실에만 골몰하여 주님을 보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만 오면, 이런 시간만 되면, ‘주여, 나타나시옵소서.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애절하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저라도 꼭꼭 숨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었다. 네가 어려울 때 뿐 아니라, 즐거울 때에도 나는 늘 네 곁에 있었어.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나를 찾는거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곁에 계신 주님을 항상 의식하고 만나고 동행해 오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 그러자 두 사람이 슬픈 얼굴로 멈추어 서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인 ‘글로바’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머물던 사람치고 이번 유월절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슨 일이뇨?”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믿을 바가 못 되고, 그 소식은 우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이들이 왜 미련한 사람들입니까? 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야단을 맞습니까? 평소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것은 정치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을 것이로되 반드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믿지 않으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죽음 현장에는 없었으면서도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믿었다는 것이고, 반대로 23절 “그가 살으셨다”는 소식은 같은 동료들이 전해주는 데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목격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는 장면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겨우 한 두 명뿐, 나머지는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보지 않았으면서도 그가 죽었다는 것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과 삼년 동안 同苦同樂했던 사람들, 믿음의 동지였던 사람들의 ‘부활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말하는 죽음의 소식은 받아들이고, 친구가 말하는 부활의 소식은 거절하는 모순에 빠져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불신으로 인하여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고, 그들은 ‘실패한 거사’에 몸을 담았던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패배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실망하여 돌아간 사람들은 이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 자기의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어부들은 다시 바다로 갔고, 어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며, 가룟 유다는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3) 부활을 믿어야 하는 사람들

두 제자는 드디어 目的地인 엠마오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그때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계속 길을 가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붙잡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29).”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 떡을 받아먹었더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 곁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자신들과 함께 걸으면서 성경을 풀어주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때에야 깨달은 것이죠.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3).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의 마음에 커다란 등불이 켜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다!” “우리가 그 주님을 만났다!” 이렇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것이 그 마음의 등불이 되고 밤하늘을 밝히는 빛이 되어서 10km의 밤길을 달리게 만들었습니다. 쉬지 않고 밤길을 달려 열 한 사도와 다른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으로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실패와 앞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걱정으로 예수님조차 알아보지 못하던 그들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비겁한 베드로는 용감해졌고, 잔인하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으며, 의심 많던 도마는 확신의 사람이 되어 땅 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는 십자가에 정복되었습니다. 텅빈 마음이 채워지고, 차가워진 마음이 뜨거워지고, 패배자가 승리자가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확실함이 되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당당함으로 변하는 것, 바로 이것이 부활을 믿고 경험한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부활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힘,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 지친 몸이 힘을 얻어 밤길을 달려도 피곤치 않게 하는 힘, 오늘 여러분이 부활로 말미암아 이러한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의 능력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음은 어느 분의 간증문입니다.

그 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친구의 손에 끌리다시피 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내가 가진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만난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바로 넉 달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 기약도 없는 이별만 남긴 채 그는 가버렸습니다. 우린 겨우 일 년을 함께 살았을 뿐인데…. 세상에 절망하고 나에게 절망하고, 나락 끝까지 떨어진 듯, 삶이 끝나버린 듯 괴로웠습니다. 

결국 나는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니까요. 만일 계셨다면 그이를 먼저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친구와 내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자리는 벌써 꽉 차 있었습니다. 이처럼 꽉 들어찬 교회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밝아 보였습니다. 아무도 나처럼 고통의 짐 같은 건 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서 안절부절 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강단 위의 한 사람이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이상한 기류 같은 것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 나 밖에 없는 듯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두려움에 두 팔을 허공에 휘저었습니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아니요, 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당신이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그는 이미 죽어버렸고 내 삶은 절망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계속 고개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요. 내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왜 …, 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왜 아무것도 아닌 저를 위해 죽으신거죠? 왜요?” 그때 한 빛이 내게 다가와 나를 감싸 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눈앞이 환해졌습니다. 그제야 안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그 이후로 내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물들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속으로부터 솟아나는 큰 울림으로 인해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축하해.” 그러자 갑자기 나는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짐이 사라져버렸어. 짐이 사라져버렸다구.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이것은 <낮은울타리> 2000년 4월호에 실린 양복임(전북 전주시)의 간증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이 살아계셔서 말씀하신다는 것, 죽은 줄 알았던 주님이 살아계시니 자기 남편도 영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이 매년 부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매년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이 부활을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그 부활의 능력과 복을 누리며 살라고 주님은 오늘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경험하고, 그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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