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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영광을 찬양하자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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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영광을 찬양하자 (눅 24:1~12)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은 똑같이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과 이적을 기록하는 복음서의 결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요, 구속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생각해보면 부활이란 죽은 몸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165cm의 키에, 70kg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하면 죽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키는 165cm에 몸무게는 70kg의 한국사람, 동양인의 모습으로 전과 똑같이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던 몸이 그대로, 예전의 모습대로 되살아나는 것은 회생이나, 소생,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 세 번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은 회생, 소생,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한 사람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육신의 연속성이 있고, 삶의 연속성이 있으니,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하지만, 단순한 회생이나 회복은 아닙니다.  죽은 몸이 살아났으나 예전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입니다.  죽을 몸이었는데, 죽지 아니할 몸으로, 썩을 몸이었는데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병들과 쇠약해지고 후패하는 몸이었는데,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더 좋은 육신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금요일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시고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아리마대 요셉이 제공한 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 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은 안식일- 토요일이었습니다.  토요일 하루가 지나가고, 안식 후 첫 날 새벽 미명에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에 목격한 사람은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여성으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 해 돋을 무렵에 몇 명의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 무덤에 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성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 그리고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박사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습관으로는 시체를 무덤에 누이고 사흘 후에 그 무덤에 찾아가서 다시 한번  향품을 발라드렸다고 합니다.  죽은 자의 영은 사흘 동안 누구를 기다리듯이 무덤 주위를 떠돌고 다니지만 사흘이 지나면 무덤을 떠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길을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 이르자 아침 일찍 여인들이 길을 나섰습니다.

이 여인들이 가면서 걱정하는 것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과 유대 교권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큰 돌을 굴려 막아놓았습니다.  이런 저런 걱정하면서 무덤에 당도하고 보니 그 큰 돌이 옆으로 굴려져 있는데 심히 큰 돌이었습니다.     마침 여인들이 무덤으로 갈 때에 큰 지진이 나면서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천사가 내려와 무덤문의 큰 돌을 굴려내는 것을 보면서 무서워 떨었는데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당도하여 무덤 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이 시신이 보이지 않기에 근심하였는데, 이때에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곁에 다가와 섰습니다.  여성들은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 얼굴을 땅에 내고 엎드렸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었습니다.  이 여자들의 말을 들은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으며, 주도적으로 사도들에게 알려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갔는데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는 들어가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무덤 안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요한도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며, 천사들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기를 만나주셨고 외쳤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나누며,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격스럽게 보내야 하는데, 우리 한국교회는 즐거운 문화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성령 강림하시기까지 50일간을 기쁨의 50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기뻐하고, 즐기고 누리는 문화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사순절은 잘 지키고, 수난주간을 정말 의미 있게 보내는데, 정작 부활절이 되면 기뻐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초대교회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이 되어도 주일을 제외하여 주일은 작은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사순절이 정말 의미가 있는 절기라고 해도 부활의 주님을 기리는 것이 더 앞서는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서로 인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는 방법이나 부활의 감격을 지속할 수 있는 사역을 전개해야 합니다.  부활의 감격을 유지하고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사역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루만의 기쁨, 하루만 반짝하고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오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되었지 왜 굳이 몸의 부활이 필요하야고 묻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면 되었지 왜 육신이 부활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말하지 새 하늘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영혼이 잠시잠깐 누리는 잠정적인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영접하면 예수님이 이루시고,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그 모든 은총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과 은총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육신을 빚어놓고,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절대적으로 육신을 먼저 지으시고 영혼을 넣어주셨습니다.  육신이 없는 영혼만의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담하와가 범죄 타락하므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의 육신이 죽을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만물을 회복하시므로 인간의 육신은 다시는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물을 회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데, 영원한 구원이란 우리의 육신까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무디 선생님이 목회하시면서, 세상을 떠나는 성도들의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는 장례식을 집례하려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예수님이 장례식 설교를 어떻게 하셨는지, 성경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예수님은 장례식 설교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초상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초상집에 가시면 죽은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독자 청년이 죽어 상여가 나갈 때에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청년이 상여에서 살아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나흘이 되었는데, 무덤 문을 열어놓으라고 하시더니 무덤에 있는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 나오더라”고 하셨는데, 그가 베로 동인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장례식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 살려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5:20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첫 열매란 이제 계속될 추수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첫 열매를 말합니다.  실제적인 첫 열매란 오늘 먼저 잘 익은 것 하나만 따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다 거둘 때까지 계속해서 추수하게 됩니다.   첫 열매는 추수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도 뒤 따라 가면서 육체의 부활로 열매 맺어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희망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뒤따라서 우리도 부활하는데, 예수님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을 했습니다.  고후4:10에서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시신을 짊어지고 다니면 죽은 부패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 곧 썩어 죽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바울이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겠다는 각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반드시 주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죽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날 육신의 부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존하는 부활의 생명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살아가시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이 말씀에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때에 예수님은 현존하는 부활을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마르다는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고, 죽음에서 신령한 몸의 부활이 일어나고, 그 부활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 그 부활은 우주적으로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심으로 우리 안에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부활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험한 세상에 나가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고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우리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부활의 영광과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감격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흔들어보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흘러나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이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는 사망권세를 물리칩니다. 

오늘 우리는 상처입고,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어둠의 탄식을 날려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높이 찬양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는 절망의 노래를 불러야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보니 절망의 노래는 환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억울하게 죽으실 때는 통곡의 노래를 불렀지만, 알고 보니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감격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은 시신이 없어졌다고 할 때까지도 비탄의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후로는 개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를 바꾸어야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승리의 노래, 환희의 찬양으로 영광돌리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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