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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죽으면 열매 맺는다 (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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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열매 맺는다 (요 12:24)  
 
 
1.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앙상한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더니 어느 순간부터 잎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새 잎이 난 그 자리는 작년에 낙엽이 되어 떨어졌던 잎이 있던 자리입니다. 낙엽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새 잎이 생긴 것입니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습니다. 뱀은 해마다 한차례 죽을 고생을 하며 자신의 껍질을 벗는 행사를 치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성장을 이루어 가고 또 생명을 보존합니다. 그런데 뱀이 병에 걸리거나 손상을 입게 되면 껍질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 해에 자신의 껍질에 갇혀 나오지 못하므로 죽게 됩니다. 어제의 내가 죽어야 오늘의 내가 살 수 있고,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내가 새롭게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라고 말씀했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면,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부활이 있지,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이렇게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죽습니다. 부활, 죽고 난 후에 물론 부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2.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씨와 열매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그 형체가 없어지고 죽어야 잎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볍씨를 뿌렸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있으면 그것은 죽은 볍씨입니다. 살아있는 볍씨라면, 그 형체가 사라지고 잎이 나오면서 모가 됩니다. 모가 자라서 벼 이삭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볍씨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대신 수많은 이삭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능력을 행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생명의 씨는 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을 행하시고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 생명의 복음을 나 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결국은 내 안에서 썩어지고 죽습니다. 뿌려져야 합니다. 복음의 씨, 생명의 씨가 뿌려지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예수 생명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전해야 합니다. 불신자를 예비신자로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3. 씨앗이 뿌려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인생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 사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고후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사도께서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극심한 고통,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부활 신앙으로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십자가를 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입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후4:8-12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 이런 고난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두 번째 뜻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죽을 고생을 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의 십자가, 여러분의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4.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두 번째 죽음의 고통은 질병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사도는 육체의 가시 즉 질병 때문에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병고침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고침받지 못한 것도 은혜입니다. 
고침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내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훨씬 큽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때 나타납니까? 내가 약할 때입니다. 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약함을 이기고도 남는 능력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도리어 감사하십시오. 약한 것들을 자랑하십시오. 약함이 축복입니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여러분, 약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강해질 것입니다. 

5. 세 번째,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고전15:31-33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를 괴롭히는 맹수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맹수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였습니다. ‘내가 죽자, 내가 죽어야지.’ 그렇게 하여 이겨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을 괴롭히는 맹수들이 가정에도, 직장에도, 동네에도, 친구들 사이에도 있을 것입니다. 싸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냥 죽으십시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합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정욕과 탐심이 죽어야 합니다. 욕심이 죽어야 하고 쾌락을 즐기려는 정욕이 죽어야 합니다. 

지난 4월2일자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인 존 파이퍼 목사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기 위해 8개월간 모든 목회활동을 중단하고 안식년에 들어간다는 기사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나의 영혼과 결혼생활, 가족과 사역 패턴 등을 성령의 시선으로 점검하기 위해 쉬게 됐다”고 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그동안 내 영혼에 존재하는 몇 가지 종류의 교만을 발견했다.... 이는 목회 사역의 자격을 박탈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를 슬프게 하고 아내와 가족 관계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했습니다. 

더 고귀하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더 거룩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 제목처럼, 오늘 부활주일에 진정으로 부활의 기쁨, 부활의 능력, 부활의 영광을 얻으려면, 내 안에 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6.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 지는 것, 죽는 것, 약한 것, 병든 것- 이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약한 것이 도리어 강해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요 하나님의 약하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의 영광을 위한 전주곡이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죽음이요,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고통과 질병은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해주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게 하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이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제게 고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축복이 되게 하옵소서.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죽어야 할 것이 죽게 하옵소서. 그래서,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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