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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단절의 고통 (마 27: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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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의 고통 (마 27:45~56)

 
우리들은 원시사회를 모계사회라고 말합니다. 아마 아버지는 사냥을 가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연히 가정은 어머니 중심의 모계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는 농업사회가 되면서 부계사회가 되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의 사회가 산업화 사회를 거쳐 지식사회가 되면서 다시 모계 중심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계 중심의 사회로 되어가는 과정에서의 아버지들의 아픔을 담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많이 다투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대화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들이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아버지가 측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전화를 드렸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기다려라 네 엄마 바꿔 줄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전화 드린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통화하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버지```’ 쑥스러워 말을 못하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왜, 또 뭐가 필요한 것 있냐?’ 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 없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너 술 취했구나. 술 먹고 전화하지 말라.’ 말하고 아버지는 전화를 끊습니다. 

대화가 단절된 부자지간의 아픔입니다. 이런 대화 단절의 아픔과 슬픔이 우리 가정에는 없습니까? 부부간에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은 없습니까? 자녀들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본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서로 대화가 단절되어 외로움과 아픔을 겪는 경우는 없습니까?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단절의 아픔과 고통은 없습니까? 

우리는 대화의 단절이 얼마나 큰 아픔을 가지고 오는지를 한 여인의 죽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남성들의 우상이었던 마릴린 먼로의 죽음입니다. 그는 1962년 8월 5일 일요일 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검시관들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생명이 끊긴 마릴린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침대 옆에 있던 수화기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마릴린은 아마 그 마지막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 죽음을 맞았을 것입니다. 

클레어 부스 루스는 그녀의 죽음을 라이프지에 ‘무엇이 정말 마릴린을 죽였나? 한 조각의 사랑도 찾지 못했던 사랑의 여신 마릴린’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으면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수화기가 마릴린의 인생을 그대로 대변한다’ 고 말했습니다. 마릴린은 유명인이지만 자신에게 밀려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진지하게, 진솔하게 받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허공에 매달려 있는 수화기와 같이 외로움과 고통과 싸우며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그의 말을 진솔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자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화의 단절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고 슬픔입니다. 

지난 주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 속에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와 땅의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고독과 절망감에 쌓여 절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버림을 받았다는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운데 가장 큰 고통과 상처는 자신이 가장 사랑을 받아야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길태의 사건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찾아온 고독과 상처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절망 중에 절망이고 고통 중에 고통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도 단절된 고통의 희생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실 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호언 장담했던 제자들이 모두 달아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예수라는 사람을 안다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할 것이다’라고 자신을 저주하며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찬양하던 군중들이 한 순간에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고통과 절망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버림 받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다가 힘들면 산과 들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며 힘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변화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 주시며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작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 하나님은 어떤 도움과 위로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깊은 침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못 본 척하시며 외면하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고독과 고통을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이유를 고린도후서5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죄의 삯인 죽임을 당하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인간의 죄에서 얼굴을 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지고 가시는 죄를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심은 바로 죄로 인해 버림을 받고,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우리들이 절박하게 외쳐야 할 외침이었습니다. 

말을 못하는 동물들도 자신들만의 의사소통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소리와 몸짓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나비와 나방은 냄새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합니다. 반딧불은 빛으로, 박쥐는 초음파로 의사 전달을 합니다. 꿀벌은 온몸을 흔들고 춤추고, 꼬리를 빙글빙글 돌려 자신의 정보를 다른 벌에게 전달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장애우들은 자신의 몸짓과 손으로 의사 전달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의사소통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죄의 담은 하나님과 나,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를 둘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죄의 담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견고한 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 죄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에베소서2장 14절에서 18절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담을 무너뜨리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신약 311면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건축’ 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이야기는 난파선에서 무인도처럼 보이는 작은 섬으로 수영하여 도착한 몇 명의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섬의 한 모퉁이에는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건축 자재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토의하기 시작합니다. 한 청년은 아무래도 이 섬에서 한 동안 살아야 할 것 같으니 우선 살아갈 집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다른 한 믿음 좋은 청년은 청교도를 본받아 교회를 먼저 짓자고 주장합니다. 

그때 다른 청년이 갑자기 조용히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여기서 가까운 곳에 다른 섬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저 쪽 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만일 저 이웃 섬에서 이 섬으로 원주민들이 쳐들어 올 수 있으니 그것을 대비하여 이 건축자재로 섬 둘레에 담을 쌓자고 주장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청년의 의견에 동조하여 담을 쌓는 공사에 착수합니다. 한참 공사 중에 웬 낯선 청년이 이 섬으로 수영해 오자 이들은 공사를 중단하고 그를 붙잡아 체포합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체포당한 청년은 기가 막힌 듯 그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섬과 저쪽 섬을 함께 소유한 추장의 아들이오. 이 건축 자재는 내가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이 두 섬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준비한 것인데 당신들은 다리 대신 담을 쌓고 있군요’ 라고 말합니다. ‘저놈이 수상하다, 저 놈을 죽여라’고 한 청년이 외치자 또 다른 청년이 달려들어 그를 패기 시작합니다. 천둥 벼락이 치고 불이 꺼진 무대에 잠시 후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무대 중앙에는 그 추장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고 추장의 아들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적 멘트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나는 다리를 놓고자 했는데 당신들은 담을 쌓았습니다.’ 

한 시인은 ‘현대인들은 필요한 다리는 놓지 않고 아직도 벽을 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고 개탄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담을 허무는 사람보다 담을 더 높이 쌓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무너질 기미가 없어 보이는 남북한의 담이 높이 쌓여 있습니다. 6월이 되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는데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동서편견과 지방색의 벽이 재현됩니다. 사회 곳곳에는 이념의 차이로 보수와 진보가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경색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경제 번영을 이룬 세대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야 하는 세대 간의 갈등의 벽이 눈에 보이지 않게 높이 쌓여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믿어 달라고 호소하지만 국민들은 지도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 불신의 벽이 쌓여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간의 대화를 가로 막는 높은 담이 쌓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부부는 단 한 마디의 대화로 모든 것이 종결됩니다. 그것은 “꽥” 하고 지르는 고함 소리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꽥’ 하는 고함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대화 단절의 아픔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꽉 막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대화의 단절의 고통과 절망의 외침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가 들려 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나, 나와 너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죄의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는 고난주일, 종려주일입니다. 높이 쌓인 담을 허물어 화평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우리 모두가 함께 뒤따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 간의 막힌 담을 허물고 부부간의 화평과 부모와 자녀간의 화평을 위해, 형제간의 화평을 위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직장 동료들과의 화평을 위해, 사회와 나라의 화평을 위해, 60년이 넘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민족의 화평을 위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에 특별새벽기도를 쌓으며 화평 위해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높게 쌓여 있는 담을 허물고 화평을 만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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