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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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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 (눅 19:28~4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城에 王으로 入城하시는 날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十字架의 죽음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가십니다. 

내일새벽부터, 고난주간특별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한 주간, 남녀노소(어린 자녀들도 눈 비비면서 데리고 나아오십시오. 수험생도 와서 기도하게 하십시오. 청년들도,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새벽이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50대 中年성도님들도 기도자리에 나오십시오. 연세 높으신 어르신들도) 모두 기도하는 곳에 함께 서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그리하면 교회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그리하면 국가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그리하면 경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그리하면 자신의 정체성도 다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오래 전,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원숭이 생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의 이야기 주제는, 한 늙은 엄마 원숭이의 죽음입니다(밤새…). 다음날 아침이 되자, 새끼 원숭이들, 남편 원숭이 할 것 없이 다들, 죽은 엄마 원숭이 암컷 원숭이가 움직이지 않자, 꽥꽥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끌어보기도 하고, 팔을 당겨 보기도 하고, 일으켜 세워보기도 하고, 툭툭 치면서 온갖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죽은 원숭이가 움직일 리가 있겠습니까?

한 동안, 죽은 엄마 원숭이, 아내 원숭이를 두고 야단법석 떨던 원숭이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맙니다. 이유가, 배가 고파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섭니다. 우리 사람 같았으면, 밥을 먹고 돌아와서 죽은 엄마 원숭이 어떻게 할까? 또 궁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원숭이들은 한번 자리를 뜨면, 죽은 엄마 원숭이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 살길만 찾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해설자가 중요한 한 마디를 합니다. “원숭이는 죽음을 모릅니다.”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원숭이가, 어찌 엄마 원숭이의 죽음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종려주일 전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 십자가 죽음과 그 의미를 모르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1. 먼저, 종려주일 이전의 예수님의 행적을 알아야

누가복음 19, 1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 1이 종려주일 전후 예수님 행적의 분수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합니다(눅 19, 1). 이 말은, 예수님께서 어떤 다른 지역에 계시다가 여리고를 거쳐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그 기간을 추적해 보면 약 3개월 정도 되는데, 십자가 죽음 약 3개월 전,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신겁니까? 요단강 동쪽 異邦人의 땅 ‘베레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지내셨습니다(영상지도1). 그곳에 가시기 바로 직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혹 기억하시는지요?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감람산 가까운 마을, 베다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온 유대 사회에 집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사회문제가 됩니다. 유대 당국자들이 회의를 소집해서, 예수님 체포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더 이상 유대에서 활동하지 않으시고, 좀 감시가 소홀한 異邦人의 땅 ‘베레아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3개월 동안 지내십니다(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하심).

베레아 지역에 계실 때, 18년 된 귀신들린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주시지요(눅 13, 10-17). 수종병 든 사람도 고쳐주십니다(눅 14, 1-6; 이 두 사건, 안식일 논쟁).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등이 모두 베레아 지역에서 베푸신 비유들입니다. 

베레아 지역 사역을 마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여리고 지방을 통과하십니다(영상지도2). 바로 그때, 저 유명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주십니다(삭개오는 아무리 생각해도 복 받은 사람). 그 사건 이후, 유월절 엿새 前인 토요일에, 감람산 가까운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가셔서 하룻밤 유하십니다(3개월 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집). 그 날,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주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그 잔치 때,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香油 玉盒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리지요(마리아의 그 행위를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 칭찬).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종려주일 3개월 이전부터,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으로 준비하고 계셨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3개월 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아니, 3년 共生涯가 다 그러했습니다. 3년 共生涯만 그리하셨습니까? 십자가 죽음은, 아담과 여자의 범죄 후 창세기 3, 15부터 준비된 사건입니다. 

내가 너(뱀, 사탄)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後孫도(뱀, 사탄의 후손도) 女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傷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구약성경 곳곳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이미 계획된 사건이었고, 성취되어오던 사건입니다. 사사시대 룻기서 말씀에서, 그 옛날 모압 여인 ‘룻’과 나오미의 친족 중 유력한 자(אִישׁ גִּבֹּור חַיִל) ‘보아스’와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를 보지 않았습니까? 이방여인 ‘룻’과 유력한 자 ‘보아스’와의 결혼 속에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오벳’이라는 人物입니다. 그 ‘오벳’이 누굽니까?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입니다(다윗의 할아버지). 하나님은, 그 옛날 이방여인 룻과 유력한 자 보아스를 통해서, 예수님의 조상 ‘다윗’이 태어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攝理).

그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 1). 이렇게 준비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집중적으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十字架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준비된 사건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 역시 준비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귀한 것은, 준비합니다. 즉흥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準備하심‘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極致(頂點)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의 頂點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예수님의 十字架事件입니다. 준비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바로 거기에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준비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求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넘치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누가복음 19, 28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앞서서(엠프로스덴, ev,mprosqen). 바로 여기에 놀라운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그 누구보다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나아가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일어날 심상찮은 분위기, 조짐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말입니다.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무리들은, 정반대로 예수님의 준비된 뜻과는 달리 자기들이 바라는 政治的帝王으로 등극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十字架의 길로, 앞서서 가십니다. 여기 주목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앞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인간의 구원은, 全的으로 예수님께 그 주도권이 있습니다. 能動的으로, 主導的으로, 積極的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는 바로 그 예수님께, 구원의 주도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지난주 수요기도회 때, 출애굽기 11장 말씀(열 번째 災殃인 장자죽음의 재앙을 앞두고 경고하신 말씀)을 보면서,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출애굽기 11장은, 아홉 번째 재앙까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1) 아홉 번째 災殃까지 애굽에 임하여도,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피, 개구리, 이, 파리, 가축죽음, 악성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재앙). 그러나 하나님은, 열 번째 災殃이 내려지면, 이스라엘이 반드시 애굽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확언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이 강퍅하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추방하듯이 황급하게 내 보낼 것이라 말씀합니다. 

(2) 아홉 번째 災殃까지는,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말하자면, 애굽 사람들이 놀라는 재앙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인 하나님의 행동이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열 번째 災殃은, 모세와 아론을 통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몸소, 災殃을 가지고 애굽 가운데 들어가신다 하십니다(출 11, 4-5).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中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요체, אצוי; 앞서가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王位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430년 간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救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여호와께서 直接 이루신 사건입니다. 구원은, 모세를 통해서, 아론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直接, 예수님께서 直接, 우리의 救援을 성취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선물입니다.

구약시대는 제사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5대제사, 언약). 그러나 구약의 제사제도는 어디까지나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된 한시적인 제도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예수님 십자가 구원사건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直接 十字架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신 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十字架 上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十字架 上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그러므로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天下 사람 中에 救援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 12).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루신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직접 죽으심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직접 고통 받으심으로 이루신 사건입니다.
3.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城에 王으로 入城하신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십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감람산(올리브나무山) 방향으로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에 이르십니다(영상지도2). 그때,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cf. 눅 22, 8)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거기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와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볼 텐데(마 21, 7), 그것들을 끌고 오라고 命令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짐승이나 망아지의 당시 용도는, 거룩한 용도로 사용되는데 주로 王家의 유명 인사들이 탑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는 행위로, 예수님이 스스로 왕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2) 마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심은 겸손하심이라 해석합니다. 이는, 동시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政治的인 메시야가 아니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헬라세계에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勝者나, 强者나, 힘 있는 자의 용어가 아닙니다. 敗者의 용어이고, 종의 용어이고, 奴隸의 용어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용어입니다. 卑賤과 卑屈의 또 다른 용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의미가 담긴 ‘겸손’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과 인품이라고 증언합니다. 정치적인 왕 아니십니다. 제국주의적인 왕 아니십니다. 평화의 왕이십니다. 고난의 종이십니다. 자신을 비움으로 높임 받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원하십니까?

(3) 누가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분’이시다는 겁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公義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가 異邦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統治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江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 9; 탄생 시 미가 5, 2 베들레헴 에브라다). 

가장 중요한 것,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을, 누가 믿었느냐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준비된 죽음을 누가 귀하게 여겼는가 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十字架가 구원의 능력이 된 사람이 누구냐는 겁니다. 도리어 부끄러움과 絶望과 패배라는 걸림돌(스칸달론)이 되지 않았습니까? 어린 나귀 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그 예수님을 누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영접했습니까? 극소수뿐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침묵하여 예수님을 王으로 높여드리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쳐 높이 찬송할 것입니다. 어린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王이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십니까? 十字架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신 그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는 者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신 우리의 王, 예수님을 찬양하십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며, 어린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救援者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王으로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삶과 마음과 믿음에 잃어버렸던 주님을 향한 찬송과 감격의 외침이 蘇生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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