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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 우리 왕이여!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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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왕이여! (막 11:1~11) 
 

1. 종려주일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인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入城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죠. 원래는 오늘을 “호산나 주일(만세 주일, Dominica Hosanna)”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영국 성공회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마치 외국의 국가 원수가 訪韓하면 길가에서 그 국기를 흔들었듯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에 근거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불렀던 그 이름이 지금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종려주일”, 즉 “호산나주일”인 오늘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주후 385년경의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인데, 이 자료에 따르면, 로마로 대표되는 서로마 교회에는 종려주일이나 고난주간에 대한 행사가 없었고, 동로마 교회에서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6세기 경 스페인의 儀式書인 서고트 교회의 에 보면, 서로마 교회가 종려주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그 전까지 서로마 교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로마 교회의 풍습들이 서로마 교회로 전해졌고, 그 가운데 하나가 고난 주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려주일이었다는 것이죠. 서로마 교회는 종려주일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축복하는 ‘祝聖儀式’을 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려주일 전통도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簡素化내지 廢止되어 과거의 풍습과 전통적인 행사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많은 교회들이 종려주일을 중요한 절기로 여겨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려주일에 대해 장기숙 詩人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바람 살가운 봄 날
앞서나온 아기눈같은 산수유 꽃 
가녀린 가지마다 들며나는 소리 
호산나! 호산나!
종려가지 흔들며 부르는 소리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려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물겨운 그 길 걷게 하시려고
사랑의 손 내밀며 오시나이까? 
작고 여린 나귀등 타고 오시나이까?
나도 그와 같은 나귀가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좋으련만
내 안에 나를 태운 발자국만 보이니 차마 부끄러워 우나이다.

호산나, 호산나! 
모두 나와 환호하며 노래하세.
죄에서 해방된 기쁨 충만하지 아니한가!
그 이름 앞에 엎드려 찬양하는 이
바라보시며 안으실 걸세.
꽃눈 깨우듯 내게 숨어있는 씨눈 깨우며
봄바람처럼 내게 오시는 이
가슴 저미게 느끼실 걸세.

아, 어찌하리. 
축복의 꽃길 걷게 하시며 내게 오시는 이
뜨거운 눈물 사랑 바라보기 버거워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나이다.

여러분도 이런 시인의 마음으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을 묵상하면서 오늘 설교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종려주일의 두 가지 모습 

1) 예루살렘 入城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한마디로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 계속 옮겨 다니면서 나라 잃은 슬픔에,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한 영적인 궁핍에, 경제적으로까지 너무나 힘들었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주된 使役地는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 남짓 사역하셨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은 여리고와 예루살렘에서 약 2~3km 떨어진 베다니를 지나, 벳바게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루트를 이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감람산 동편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제자 중 두 사람을 베다니 반대편에 있는 ‘벳바게’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였습니다(2). 그러면서 만일 누가 와서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3). 

‘그렇게 대답하면 그 사람이 나귀를 줄 것’이라는 말씀이었지요. 아마 그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께 ‘나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써도 좋다’는 약속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들은 맞은편 마을로 갔고, 그곳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 묶은 줄을 풀자, 한 사람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5).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답니다”고 대답했는데, 그 사람은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나귀를 데려가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걸쳐서는 그것을 鞍裝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준비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는데요. 그들도 제자들처럼 자신들의 겉옷을 벗더니 그것을 길 위에 펼쳤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 위에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환호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가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나오면서 잎이 우거진 푸른 나무 가지들을 바닥에 깔거나 흔들었습니다(요12;13). 그러면서 예수님을 뒤따르던 무리들과 앞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던 무리들이 서로 노래를 주고받았는데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면(9),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화답했습니다(10). 

이렇게 그들이 주고받은 노래는 시편 118편으로, 순례자들이 유월절이나 장막절에 불렀던 여섯 개의 <순례의 시(113편부터 118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➊ 특히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 “오, 구원하소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요(시118: 25a). 이 말은 원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10)”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었습니다. 즉 이제 이스라엘에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➋ 이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송했습니다(눅19:38). 이것은 무리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라 여겼다는 뜻입니다. 

➌ 그리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쳤습니다(10).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다시 세울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나라 안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는 이방인들을 쫓아낼 분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과 성 안에 있다가 환영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대적이고 엄청난 규모로 환영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同床異夢”이라고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武力과 權力을 가진 정치적인 왕으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을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지요. 

➊ 창세기 49장 10절, 11절을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유다를 축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즉, 야곱은 유다 가문이 실로, 즉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며, 그 메시아는 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죠. 

➋ 두 번째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슥 9:9). 스가랴는 장차 예루살렘에 임할 메시아는 ‘왕이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백성들을 구원하실 분이시며, 또한 겸손하신 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서 메시아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까지 예언했었는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스가랴가 예언한 그대로 하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2) 환영 인파 속에 숨은 모순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엄청난 환영 인파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 첫 번째 <종려주일>에는 모순되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➀ 첫째는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첫 번째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최고의 날이고, 엄청난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시는 장면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장면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앞뒤좌우 사방에,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가에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나귀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고, 그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깔거나, 혹은 자신의 겉옷을 폈습니다. 마치 황제가 외국 원정을 나갔다가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언제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이토록 성대하고 거창하게 북새통을 이루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준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33년간의 생애에서 이렇게 화려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난지 며칠이 못 되어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군대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그러다가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와서 정착했으며, 청소년 때부터 목수의 일을 하면서 혼자되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다가 30세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때부터 당한 고난과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을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8:20). 여러분, 예수님은 정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는 정말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사실 예수님이 가진 것은 많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수고와 슬픔과 고독과 아픔 등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셨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평생 단 한 번이라도 ‘호사’라는 것을 누려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수고는 수고대로 하시면서 대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렇게 놀라운 대접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이 장면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첫 번째 종려주일의 최종 연출자는 예수님 자신이었지요. 즉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왕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다고 해서, 힘이나 권력이나 돈이나 인기에 의해서 왕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 낮아지심으로, 십자가로, 희생과 죽음으로 세워지는 왕임을 나타내려 하셨습니다. 군대를 동원하거나 백성들을 선동하여 나라를 뒤집는 구원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구원의 왕임을 보이려 하셨습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눈물과 자기 생명을 바쳐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실 왕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세상적인 잣대로 왕이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눈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보이는 왕으로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왕입니다. 왜 예수님이 왕입니까? 

➊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노예로 살다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사 생명을 주셨기에, 그 분으로부터 생명 얻은 자들의 왕이 되셨습니다. 

➋ 두 번째로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제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권세를 가지셨기에, 지금 살아있는 자들과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의 왕입니다. 

➌ 또한 세상의 모든 왕들은 다 사라졌지만,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말 그대로 진짜 왕이 되셨고, 그 예수님은 장차 다시 오셔서 온 세상과 모든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기에 진정한 왕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유대나 이스라엘에 한정된 왕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로마인들에게나, 오늘 우리들에게나, 예수님은 왕입니다. 세상적인 권력의 주인으로서 왕이 아니라, 보다 크고 보다 높은 차원의 왕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다 넓은 세계, 궁극적인 세계, 영원한 세계의 왕이십니다. 이 땅과 저 세상, 지금 세상과 오는 세상, 그리고 육체의 세계와 정신세계 모두를 포괄하는 세계의 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무한히 넓고 큰 세계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2000년 전에도 왕이셨고, 오늘도 왕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왕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왕을 여러분의 진정한 왕으로 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첫 번째 종려주일,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지만,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맞이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을 받았고 그 분의 혜택을 입었지만,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섬겼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 그 사람들보다 오늘 여러분을 더 주목하십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여러분의 진정한 왕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를 책임지실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눈물을 책임지실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그 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가난의 왕, 겸손의 왕, 사랑의 왕, 만세!”를 외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➁ 이렇게 예수님은 그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고 사람들도 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열광과 기쁨의 이면에는 ‘십자가 처형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는 悲痛함이 있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길은 실은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대로, 이번의 上京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하루하루, 순간순간들이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긴박감 넘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두 가지 면이 있었듯이, 예수님을 환호한 무리들 역시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경배했습니다만, 또 다른 쪽에는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하여 죽이려고 모의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던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외치면서 영접하던 바로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군중심리에 들떠서 예수님 찬양에 함께 했다가, 또 분위기에 따라 그를 죽이라고 소리를 지른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던 그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수 있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보시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던 사람들도 주변 있는 사람들과 분위기에 따라 예수 왕을 배신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 계십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 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바라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그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의 삶은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세상적인 가치입니까? 주님입니까? 

예수님은 왕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왕이십니다. 사람을 죽일 권세와 살릴 권세를 가지셨고, 지옥에 넣을 권세와 천국으로 보낼 권세를 가지셨으며, 망하게 하실 권세와 흥하게 하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그에게 있고, 진리의 말씀이 그에게 있고, 생명이 그에게서 나오고, 聖潔과 恩惠와 義와 풍성한 사랑과 온전한 平康이 다 그에게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루고자 소망하는 것,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그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왕, 예수님! 나의 몸, 나의 마음, 내 영혼의 왕, 내 삶의 주! 온 세상 만물들로부터 영광 받으시고, 세세무궁토록 다스리시옵소서. 무엇보다 내 중심에 왕으로 좌정하시고 영원토록 나를 다스리시옵소서.” 

3. 참되시고 영원한 왕!

말씀을 맺겠습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은 왕으로서 자기 성읍에 들어가시기도 했지만, 낮아짐과 섬김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들어가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자신의 성읍인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보다 오늘 여러분의 왕이 되기를 더 원하십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왕이 되기를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실 예수님을 맞으면서 그에게 여러분의 겉옷을 벗어서 그가 가시는 길 위에 펴 드리시기 바랍시다. 아니 옷보다는 여러분의 마음과 모든 정성을 바쳐 그 길을 닦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여러분의 몸을 양탄자처럼 그가 가시는 길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왕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향해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신다면, 그때 여러분은 진정한 하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 왕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들과 땅의 기름진 것들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왕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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