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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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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3~38)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 올라왔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동안 무려 6시간이나 고통 가운데 계시다가 운명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한 주간 십자가에서 남기신 주님의 기도를 붙잡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왜 이 말씀이 필요한지 성령의 도움을 통해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지금 주님은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웃들에게 오해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김부남 사건을 기억합니까? 아홉 살 때 자기를 성폭행한 사람을 30년이 지나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자기가 겁탈 당했다는 수치와 상처로 수많은 세월을 그 고통의 더미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30년 동안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고 두 번째 결혼생활도 원만치 못했습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사는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 놓은 그를 평생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죽이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분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용서의 기도는 원문에 살펴보면 한번만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계속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누군가 왼손에 못을 박을 때에 그 고통이 쓰리고 아파서 "아버지여 이 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가시관을 씌워놓고 조롱하고 침 뱉을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발을 묶어놓고 못질할 때에 땅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며오는 아픔을 느끼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카로운 창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올 때에 "아버지여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고난의 한 복판에서 주님은 가장 먼저 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뭐, 이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여기 보세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러분, '가시고기'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가시고기는 바다에 살다가 이른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서 민물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수컷 가시고기가 민물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안 암컷은 둥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놀기만 합니다.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은 '집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를 확인하고는 마음에 들면 그곳에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을 낳은 암컷은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을 낳고 도망 가버린 암컷을 대신해서 알을 지킵니다. 알을 빼앗아먹기 위해서 모여드는 침입자들로부터 알을 지켜내기 위해서 1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만 8일째 되는 날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합니다. 새끼들이 모두 부화했지만, 수컷은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둥지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 약 15일 동안 수컷 가시고기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새끼만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고 나면 수컷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주둥이는 다 헐어버리고, 화려했던 몸 색깔은 볼품 없이 퇴색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둥지 앞에서 힘없이 몇 번 움직이다 죽고 맙니다.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은 죽은 수컷 주위로 몰려들어, 죽은 아비의 살을 파먹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는데 화가 나더라구요. 새끼들을 위해 자신을 다 쏟았는데 그 놈들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비의 심정을 손끔 만도 알지 못해요. 그저 그들이 하는 것은 앞 다투어 지 애비의 살을 파먹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는데 저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도 모두가 성난 폭도가 되어 죽이라는 함성으로 골고다 언덕을 흔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 고통 속에서도 무지한 저들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저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용서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용서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신 용서입니다. 주님은 지금 저 십자가 위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선 아무런 죄가 없는 메시야를 재미삼아 희롱하고 가혹한 고통을 가하고 있는 저 군병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까 두려워 죄 없으신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선언한 빌라도를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인기와 권세를 잃을까 두려워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종교 지도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광기어린 분노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도 용서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사랑해 주신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십자가가 두려워 자리를 피한 비겁한 제자들 저들을 주님께서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 중에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용서의 기도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를 통해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해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내게 아픔을 주었던, 내게 손해를 주었던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게 종노릇하며 이미 지옥 자식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칸느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밀양이란 영화를 보신 분이 게실 것입니다.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자식과 함께 와서 살다가 아들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싸늘한 시신으로 엄마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때 신애라는 이 여인은 그 상처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전도를 받고 비로서 그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신애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위로를 받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만나 용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리까지 서게 됩니다. 드디어 신애가 큰마음을 먹고 유괴범을 용서해주러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괴범을 만납니다. 수염도 단정하게 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애가 좀 의아하게 여기면서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당신을 용서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유괴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십니까? 사실은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신애 앞에서 화통하게 웃습니다. 이에 덧붙여 유괴범은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안을 진작 누렸어야 하는데, 이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몰랐다는게 억울하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애의 마음이 뒤집히기 시작합니다.?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내 마음에는 아직도 고통이 남아있고, 처절한 피눈물이 남아 있는데! 누가 용서해주었는가? 내가 용서를 안 해주었는데 네가 먼저 용서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남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나와서야 되겠느냐?? 거기서부터 신애는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꼭 이 유괴범 같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다 용서해줬다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고 다니며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나니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해질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유괴범을 보십시오. 

아이를 죽일 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평안히 잠을 이룹니다. 살찐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유괴범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잘났느냐” 예수 믿는다는 게 참 편리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다 용서받았다고 하고 싱글싱글 웃고 다니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게 과연 기독교냐?” 우리가 왜 이런 소리를 듣습니까? 죄악 때문에 아파하는 깊은 통곡을 생략해버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유괴범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범한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야 하고 그 때문에 고통당한 한 어머니의 갈가리 찢긴 가슴을 상상하면서 자기도 괴로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감히 수염을 깎고 나오는가? 수염을 다 뽑고 나오면 몰라도 말입니다. 최소한 괴로움에 잠도 못 잔 듯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면회 장소에 나왔어야 합니다. 어떻게 세 끼 밥을 다 먹습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고개를 못 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이 어머니가 당한 아픔의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나도 지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이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하면서 통곡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그러면 유괴범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내가 정말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괴로워해야 정상적인 결론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그 유괴범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는 용서는 당신의 희생에 터 위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사울이 변하여 대 사도 바울이 된 것은, 다메섹도상에서 거꾸러지기 전에 스데반이 순교할 때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이빨이 다 부러지고 갈비뼈가 다 부러지면서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된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때 바울은, 충격을 받고 거꾸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이,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합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같은 십자가의 용서가, 죄악으로 얽룩진 세상을 덮었고,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먼저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허물과 죄악을 깨닫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마음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자가 참으로 복 받은 자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이 은혜를 알았다면, 우리 모두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서는 고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벽마다 골고다 언덕으로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로 가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승리는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사랑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이웃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귀한 축복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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