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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께서 우리 마을에 오실 때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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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리 마을에 오실 때 (요 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종려 주일’(Palm Sunday)입니다. 오늘로부터 ‘거룩한 주일’(Holy Week)이라고도 불리는 ‘고난 주간’(Passion Week)이 시작됩니다. 이전에도 우리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우리는 종려주일에 있어 왔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종려주일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보면 행복한 결말로 끝날 듯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퍼레이드까지 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사태가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는 금요일에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암울한 성금요일을 지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토요일이 됩니다. 사람들은 어제의 사건을 떠올리면서도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내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렇게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상상치 못한 부활의 일요일을 맞게 됩니다. 부활이라고 불리는 전대미문의 행복한 결말로 길고 긴 일주일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부활절과 함께 모든 것이 해피 앤딩(happy ending)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요정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룩한 주간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거룩한 주간’(Holy Week)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분이 얼마나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느냐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거룩한 주간이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들어가 실제로 살아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최초의 제자들은 종려주일과 그 후에 일주일 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우리보다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목격자들이었습니다. 일들이 되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이 모여들더니 “왕에게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군중들이 얼마 전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 깊은 충격과 인상을 받았던 무리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예수님의 발아래 내려놓고 있었을 때, 그들의 행동이 150여 년 전 이스라엘의 광복군 지도자 유다스 마카비우스가 시리아 대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으로 개선 행진하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예수께서 그들의 나라를 해방시키실수 있는 왕이 될 것을 기대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에 대한 대답으로 당나귀를 타셨을 때, 예수님은 자기가 전사(戰士)인 왕(Warrior King)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려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것도 알았으며,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셔야할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퍼레이드가 평화롭게 잘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제자들에게 아주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것입니다. 

옛날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생일을 위해 무엇인가 특별한 이벤트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생들처럼 그에게는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의성을 발휘해서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 냈습니다. 깜작 생일파티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6명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아내가 직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파트 앞에 여러 대의 차들이 주차된 것이 보였습니다. 차들에는 각종 풍선들, 무지개 색상의 종이끈들, 그리고 “생일 축하해, 케이티”라고 쓴 커다란 포스터가 보였습니다. 차들 중 그래도 가장 괜찮은 고물차의 열어놓은 뒤 트렁크에는 케이티의 사진을 크게 붙어 있었습니다. 아내를 태워 크락송을 눌러대며 신학교 캠퍼스를 여러 바퀴 돌았습니다. 물론 생일을 맞은 아내는 마치 여왕이라도 되듯이 손을 흔들며 캠퍼스를 돌았습니다. 의도가 좋았고 아주 재미있었던 추억이지만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벤트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퍼레이드 역시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왕으로 오시는 분이여!” 무리들이 외쳐댔습니다. 제자들은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리들은 예수를 퍼레이드 하는 왕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16절)고 합니다.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험은 했지만 사건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종려주일을 경험했습니다. 종려주일에 일어나고 있던 이 모든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들은 “경험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험했다고 그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험과 이해의 예

우리는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압니다. 예를 들어 보면 이 사실이 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는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그는 부모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사랑을 ‘이해’하기 훨씬 이전에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왜 부모들의 그렇게 끝없이 사랑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얼마나 희생을 하는지, 왜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지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청년이 된 후 애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겠다고 헌신합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사랑)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남녀가 정말로 서로를 사랑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데 상당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서로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고 만들어 가는지, 심지어 사랑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하는 지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어느 날 그가 고물차의 뒤 트렁크에 당신의 사진을 걸어 놓을지! 

그렇습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참 후에야 경험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성령께서 그 의미를 가르쳐 준 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이 우리의 부모들이 종종 말씀하시는, “철이 들자 망령난다!”는 속담의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길고 긴 하루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하늘의 무지개를 보았다고 합시다. 우리는 무지개가 공중에 떠있는 습기와 물기들에 태양 빛이 반사되면서 생긴 빛의 굴절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 정보적 차원에서의 앎입니다. 그러나 언제 여러분은 무지개를 ‘경험’합니까? 여러분이 차를 멈추고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무지개를 경험할 것입니다.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는 현대인들

고대인들은 아름다움과 신비로 가득한 세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우리 현대인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삽니다. 수많은 설명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 삽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들이 알고 느꼈던 ‘아름다움’과 ‘신비’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움과 신비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덜 계몽되었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경험 없이는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험이 없는 이해는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예수라는 분을 알았을까? 물론 그들 나름대로 예수를 알았겠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안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금요일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종종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피상적일 경우가 있거나 아니면 잠시 있다 없어지는 환상(illusion)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 봅시다. 결혼한 부부들은 수많은 세월동안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합니다. 서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 ‘삶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어떤 젊은 부부를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겨우 2년 만에 심각한 위기에 빠진 커플이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던 도중에 남편이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어쩌면 하는 짓이 꼭 당신 같아! 당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하잖아!”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자기 남편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가벼운 이해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피조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인 교회 아래층에 준비된 저녁식사 자리였습니다. 이 모임은 한 달에 한번 모이는 노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상당수의 참석자들이 결혼한 지 수십 년이 된 부부들이었습니다. 한 부부는 얼마 전 금혼식을 마친 분들이었습니다. 50년을 함께 살았으니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남편 되신 할아버지가 아내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리스에 꼭 가보고 싶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그러자 아내가 남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앞서 본 젊은 부부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50년이 지났는데도 왜 이들은 아직도 결혼한 상태로 있을까?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상대방을 알아가는 신비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첫 번째 부부는 “당신은 항상 그래!”라는 깃발 아래 살고 있습니다. 
  ․ 두 번째 부부는 “나는 당신에 대해 그것을 몰랐어요!”라는 깃발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자, 아마 그 노인 할아버지는 그날 저녁 교회로 가는 길에 그리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할머니가 몰랐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감으로써 서로에 대한 상호이해가 변화되도록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신앙의 삶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의 의미에 대해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이나 제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가 된 것은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이 되기 위함이었지 지상의 왕국의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유일한 면류관이 금이나 보석이 아니라 가시로 만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입은 자색 옷이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왕복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이 손에 당하는 조롱의 의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일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죽으시러 이 구세주가 오셨다는 사실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방문을 경험하기 전까지 여러분은 진정으로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마을에 오실 때, 그분이 여러분의 가정과 개인에게 오실 때, 그가 왜 오시는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그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은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일주간의 드라마를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주일 동안 이 위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이야기 속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인가?”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이 있는 장소와 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가?

본문에는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물어보고 싶고 풀어보고 싶고 얻어내고 싶은 자기들만의 안건(아젠다)을 갖고 있던 무리들입니다. 당신은 이런 무리들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무슨 이유 때문에 예수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그 관심들을 사용하여 여러분이 이루려는 것을 예수로부터 얻어내려고 하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그가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으십니까?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굽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인생을 잘 살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노력형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도 죄인이라고는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들을 ‘괜찮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도 진정으로 자신들을 ‘몹쓸 죄인’,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끊임없이 선포하시는 ‘은혜’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위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은혜를 상실한 사람, 은혜가 없는 사람,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 항상 법과 완벽함과 신앙적 업적과 성취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본문에는 어리벙벙한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혹시 당신은 자기들이 이해하는 것 이상의 것을 경험하자 어리둥절하였던 제자들은 아닙니까? 자신의 머리로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을 경험하자 어쩔 줄 몰라 했던 제자들 말입니다.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오늘 아침에 우리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들입니다. 그러나 이번 일주일 동안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우리의 마을에 오시는 그분, 우리의 삶속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것은 달라질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만남, 위대한 만남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모든 것이 바꾸어진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는 이번 주 끝(부활주일)에 가서 그것(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경험한 후에, 제자들은 그들이 했던 경험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리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이번 주에는 그런 흥분된 일로 정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진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는 나중에 가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먼저 우리는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종려나무의 월요일부터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과 세족식과 배반의 목요일과 ‘슬픔의 길’(비아 돌로로사)과 십자가 처형의 성 금요일을 경험하지 않고는 부활절로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우리가 이번 주간에 드리게 될 예배들(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 예배들은 고난 주간을 지내는데 아주 중요한 안내자가 되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좀 더 중요하게도, 

이 말은 이 주간에 여러분의 경험들은 여러분을 예수의 혼란스런 제자로 남겨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은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마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여 그분의 삶의 여정에 의해 우리의 삶이 엮어져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경험하는 놀라운 실망들의 순간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는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상상했던 구원보다 더 풍성한 그분의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분이 여러분의 마을에 오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류호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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