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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게도냐 지경 첫 성 빌립보 성을 선교하다 (행 16: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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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 지경 첫 성 빌립보 성을 선교하다 (행 16:6~40)
 

사도행전은 1:8절에 그 주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약속을 따라 승천하신 주님이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을 부으시고 예루살렘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 땅에 안디옥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교회가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어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파송했고,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고 주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친 뒤에 바나바와 바울은 다시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떠나기로 하였으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갈라섰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제자로 삼아 다시 교회들을 돌아보고 굳게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지 않았던 곳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계속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렀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와서 자기를 도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 바울은 하나님이 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갈 때 본 환상을 본 것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넬료의 가정에 가게 되었고, 자신이 예상하지 않았던 성령이 고넬료의 집 식구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나 바울이나 처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성령께서 보내심을 알고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시며 자신의 원함을 나타내셨으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의 잔을 마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길을 순종하여 가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명령하심으로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빌립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이며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빌립보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정착하여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에 바울이 들어감으로 유럽을 복음을 통하여 정복하는 첫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전쟁이든 그 전쟁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입니다. 로마 군대도 적과의 싸움에 앞서 제일 먼저 로마 군대가 머물러야 할 숙영지를 건설했습니다. 그 숙영지를 건설하면 숙영지를 중심으로 길을 내었습니다. 그런 뒤에 적과의 싸움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볼 때 루디아의 집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복음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안디옥교회와는 다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루디아의 집에 머물며 빌립보 성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뒤에도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기 전에 루디아의 집에 들렀다고 본문은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하여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탐하였을 때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디아의 집이 바울을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집을 교두보로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조금 허술하거나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 성의 유력한 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거나, 관원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면 아마 교두보가 훨씬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집, 그것도 아마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교두보로써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은 모양새입니다.

이제 빌립보 성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과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권능을 받아 적군을 보기 좋게 무찌르는 모습으로 연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튼 이 말씀은 권능을 받았는데 그 권능은 ‘내 증인이 되리라’하는 권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내 증인’이라 함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의 증인으로 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4:26절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누가복음의 주제 구절로써 누가복음의 기록목적을 나타낸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이 말씀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사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취임하셨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다른 교회다닐 때 부흥회를 봄과 가을 일년에 두 번 정도 일정하게 하였는데, 그 때 부흥강사들의 말을 들어보거나 간증하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증인됨과 다를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령이 함께 하는 경험이나 간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개과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형편 없이 살았는데 이젠 새롭게 되었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게 되었다는 거의 공통된 주제들이었습니다. 즉 예수 믿고 나서 성령체험을 통하여 모든 일이 잘 풀렸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바울과 실라를 보면 그들은 가려고 하지 않은 곳에 가게 되었고,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 성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바울이나 실라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의 모습이 잘 보여지지 않습니다. 아덴에 갔을 때 그것도 바울이 홀로 갔을 때, 그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바울이 분노하여 복음을 전하였던 행동과는 매우 다르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런 목회를 하겠다고 신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오래 하다보니까 교회에 교육목사가 있어 아이들을 잘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신학을 하기로 결심을 했더랬습니다. 이런 결심을 그 당시 당회장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교육 부분에만 한정되게 신학을 하려 하지 말고 전체적인 목회를 생각하고 신학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려던 것은 조그마한 부분이었는데 당회장 목사님은 그것보다 더 큰 일을 말씀하신 셈입니다. 

또 신학을 하고 부산 영락교회에 내려가게 된 것도 처음부터 개척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잘 배우고 봉사를 하다보면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아 처음부터 고생하지 않고 교회를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개척을 하게 되었고, 원치도 않았던 개척이었습니다. 감히 꿈꾸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속사 복음을 듣고 나면서부터 불행(?)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저에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작은 교회에 멀리서부터 이 복음 때문에 별로 잘 나지도 않은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룬다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저 적당한 크기의 교회에 나가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축복을 받으리라 하는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일부러 귀신 들린 여종을 보자마자 저 사람을 구원해야 하겠다는 바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는 모습과도 다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을 이롭게 하는 자였습니다. 요즘 지하철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보시면 금방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심히 괴롭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기도하는 곳에 가게 되다가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여종이 좇아와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여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같이 여러 날 반복이 되니까 바울이 그 여종이 불쌍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심히 괴로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니까 귀신이 즉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이 어찌 보면 억지로 귀신을 쫓아낸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좋은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종으로 인하여 수입이 끊긴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끌어다가 고소를 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으로서 로마인인 우리가 지키지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며 바울과 실라가 성을 요란케 한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무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때리고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이 깊은 옥은 나중에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하여 들어가 확인하는 것을 보니 깊은 토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이런 깊은 땅 속의 감옥들이 있었습니다. 참 바울과 실라가 억울한 일을 당한 셈입니다. 원치도 않았고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 일이 생겼고 감옥에까지 갇혔습니다. 매를 많이 맞고 발에는 착고까지 채워져서 마치 큰 중죄인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느 때 찬송하고, 또 어느 때 기도를 합니까? 현대의 보통 신자들을 보면 아마도 무슨 일이 잘 풀리고 잘 되었을 때 찬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대입과 같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경험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깊은 토굴에 갇혀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를 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태형을 당했으니 온 몸이 아프고 욱신욱신 했을 겁니다.

밤중쯤 되어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놀라 깨어보니 옥문들이 다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쳐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하니 간수가 등불을 들고 들어와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아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도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아!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선교하러 보내셨구나! 그러니 여기 죄수들과 옥을 지키는 간수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자!’고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간수가 제 발로 걸어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구원을 요청한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상하고 기대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다른 서신서에서 말하듯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복음을 부득불 전하지 않고서는 안되겠다’거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심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간수가 요청한 일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니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에 자기 집에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음식을 차려주고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이상한 점이 여기까지가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오늘 본문 35-40절을 왜 기록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억울하게 매맞은 일을 항의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날이 새어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은밀하게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려 하니까 그때서야 바울은 자기가 로마시민임을 밝힙니다. 왜 로마시민을 정식 재판도 하지 않고 매를 때리고 옥에 가두었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로마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친히 와서 권하여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항의는 사실 매맞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컷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후에 나오면서 이런 항의를 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보아서는 매를 한 대라도 맞았을 때 로마 시민임을 주장해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껏 매를 맞고 온갖 수난을 다 당한 뒤에 자기 주장을 펴니까 통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왜 이것을 기록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성을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주목을 하여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고넬료의 가정도 베드로가 먼저 원해서 찾아가지 않았고, 베드로가 성전의 앉은뱅이를 고쳤던 처음 표적도 사실 앉은뱅이가 적극적으로 원하였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도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의 첫 성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첫 성을 정복하실 때에 역사하십니다.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는 아주 다릅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껏 한 것이라고는 여리고 성을 뺑뺑이처럼 돌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보다도 작은 성인데 매복이라는 전략이 동원됩니다. 먼저 싸움을 하러 나아가 싸움하는 척 하다가 도망을 갑니다. 그 도망갈 때 아이 성 사람들이 쫓아나오면 어제 이미 매복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텅 빈 아이 성을 공격하고, 또 골짜기에 매복했언 군사들이 사방에서 아이 성 사람들을 쳐서 다 진멸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더 견고한 성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이라고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칼만 폼으로 들고서 성을 6일 동안 한 번씩 돌고 7일 째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친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흔들리고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고보니까 여리고 성도 지진으로 흔들려 성이 무너진 점은 빌립보 감옥에 지진이 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빌립보 성에 일어난 복음전파는 다른 성과 다르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울과 실라가 원래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었고, 계획했던 목표를 달성해서 복음전파를 열심히 하였던 것도 아니며, 순전히 성령의 명령하심을 따른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적극적인 복음전파의 모습 보다는 도리어 성령의 명령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것이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군대장관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말을 타고 적진 속으로 먼저 달려가는 선봉장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군의 왕이나 장수가 먼저 적진 속으로 돌진하면 군사들은 사기를 얻어 그 뒤를 따라 용맹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빌립보 성의 복음전파가 바로 이런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여기까지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적극적인 모습이 아니었는데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셔서 빌립보 성을 정복하는 일에 바울과 실라와 함께 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싸움은 자기의 로마시민권을 앞세우거나 자기 능력과 권세를 과시해서 빌립보 성에 교회를 세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는 이제 바울의 사역에 항상 함께 합니다. 빌립보서에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을 도운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괴로운 복음 사역에 항상 동참하였고 심지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역자를 보내어 후원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울을 도왔다고 빌립보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 성의 복음전파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친히 행하신 것이라고 하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첫 것, 맏물을 자기 소유로 삼으셔서 구약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점과 매우 흡사합니다. 고넬료의 가정도 이방인으로서 첫 것이요, 성전의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도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의 첫 표적이었으며,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리고 성도 가나안 땅의 첫 성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항상 하나님이 친히 권세를 나타내십니다. 그리하여 이제 나중의 싸움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저의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된 일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베드로나 바울도 자기가 예상하는 기대치와 다르게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셔서 그 사역을 넓히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육목사를 하겠습니다!’라고 저는 나섰지만 이렇게 목회를 하게 되었고, 좀 안정된 기반 위에서 사역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었어도 힘들고 어려운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부흥회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항상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되면 개과천선을 하는 해피엔딩이 주된 역사인 것처럼 말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므로 우리가 무슨 화려한 계급장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조심해서 들어야 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원하거나 계획한 일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셔서 억울한 사정으로 옥에 갇히었음에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나타냈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케 된 것입니다. 그런 고난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의 길인 줄 알고 찬미를 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므로 내 여건과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역사가 아니라 더 고난을 받으며 더 억울한 일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놀라운 삶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작은 교회를 이루는 것도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으로 귀가 열려지고 마음이 열려 이 교회를 이루는데 적극 참여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아는 이 복음을 전하자마자 이 복음 앞에 무릎을 탁 꿇었으면 얼마나 좋아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의 복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이단이라고까지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 바로 이러한 고난 속에서 주님은 그의 나라 일을 이루시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야 하셨듯이 우리도 그 길을 뒤따라 걸어가기 때문에 이런 일을, 이런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제가 꿈꾸고 제가 예상했던 목회자의 삶을 생각했지만 그러한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더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가게 되었으면서도 실제 하나님을 더 기뻐하는 삶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제 생각과 제 기대치로 싸여 살았더라면 이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영영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로 한 가족을 이루어 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교회로 세워나가게 하심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이 끊어지고, 경제적인 이익이 손해가 날 때 빌립보 성 사람들처럼 성을 내고 분노하며 상대방을 집어 삼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신을 섬김보다 자기 경제적인 이익을 내면 그것으로 모두 만족할 것입니다. 오직 그들이 섬기는 신의 존재는 자기들의 만족을 채워주는 수단과 도구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려고 하지 않고, 원치도 않은 일에 불려 나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깊은 토굴 속에 갇히면서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삶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이 아니심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죄인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죽음의 잔을 원치 아니하였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그 잔을 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오르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바로 성령의 권능은 이 분의 증인으로 살게 하기 때문에 이 주님과 같은 삶이 나타나게 되고 그 고난 속에서도 영광의 길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칼을 휘두르면 상대방이 척척 넘어지고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역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나타나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나를 통하여 진행되고 이 보잘 것 없는 미련한 자식을 통하여 진행이 됨을 알기에 온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엊그제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는데 부처를 청동같은 재질로 만들어 아주 길게 누워있는데 봄을 맞아 그 부처를 청소하며 닦아내고 그 위에 금색이 나는 반짝반짝하는 천을 입혀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 와불상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그 불상 앞에 소원을 빌고 절을 합니다. 거의 모두 자기 이익을 그 불상에 거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는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 성의 귀신들린 여종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 성에 보내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명령하셔서 이런 매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풀어내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요청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고 언약도 소망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선봉장으로 나서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앞장 서신 것입니다. 친히 역사하셔서 빌립보 성을 처음 자신의 것으로 받으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가나안 땅의 첫 것으로 받으심 처럼 이제 빌립보 성을 첫 것으로 받으셔서 유럽을 아니 저 땅끝까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어느 나라이든 어느 민족이든 주님께서 앞장 서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그 나라의 일을 이루십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로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복음을 듣게 하시고 알게 하셨는지 전혀 예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복음의 첫 사역을 통해 유럽 동반구를 복음의 역사로 허무신 것처럼 이제 우리 나라와 여러분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전히 우상 앞에 매여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바위나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와불상에게 절하며 소원을 빌었을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작은 교회를 이루고 형제를 섬기는 수고 속에서도 어려운 일이 닥치고 힘든 고난의 삶이 있어도 이것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 길임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일에 벅찬 기쁨과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 길에 들어와 있음을 알고 영광스럽게 찬양하며 굳건히 함께 이 복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성령이 권능으로 임한 복된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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