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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에 대하여 (막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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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대하여 (막 12:18~27)


가문을 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독재자 이디아민(Idi Amin)이 우간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 반정부 인사인 케파 셈판기(Kefa Sempangi) 목사의 서재에 권총을 든 두 명의 괴한이 나타났습니다. 그날은 부활주일(1973년)로서 셈판기 목사는 7천 명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막 돌아온 시각이었습니다.
셈판기 목사는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2분만 시간을 주시오. 나와 당신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싶소."
괴한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셈판기 복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드린 것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 품에 맡기오니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하소서.”
눈을 뜨자 괴한들은 권총을 품에 놓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정부에서 목사님의 생명을 노리고 있으니 각별히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2분 사이에 그들은 감동된 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간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앞서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을 트집집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서로 하나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를 트집 잡기 위해서 손을 잡았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다른 종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판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을 이어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또다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던지는 것 역시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부활에 대해서 묻습니다. 자기들 자신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는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께 와서는 부활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무언가 예수를 곤란케 할 만한 무기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진짜 역석적인 것은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데 바로 그 예수님께 부활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부활에 관해 묻는데 그때 그들이 드는 예화가 바로 수혼 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칠형제 집안에서 맏형이 취한 아내가 자녀를 낳지 못한 상태에서 형이 죽어 바로 맡의 동생이 대신 그 형수를 취하였으나 그도 자손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계속해서 같은 경우로 인해 일곱 명이 모두 형수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한 뒤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부활 교리로부터 나오는 불합리성을 지적함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수혼법은 신명기 25:5~10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결혼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

이 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방지하고 죽은 남편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 남은 미망인을 보살피기 위한 사회 보장이라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동족혼의 가치성과 아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닌 딸만 있을 때에는 이 수혼법은 적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비록 딸이라도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수혼법의 첫 번째 예는 유다의 아들 오난과 다말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룻과 보아스의 관계인데 두 사람을 통해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 태어납니다. 이런 법이 있는데도 동생이 형수를 취하지 않는다면 미망인의 고발로 성읍 장로들 앞에서 아우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 죄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전체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법은 단순히 대를 잇는다는 측면을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제정된 법이라도 그것을 꼭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예를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제는 일곱 형제가 이 수혼 제도를 따랐을 때 부활하게 될 경우 그럼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곤란한 내용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주신 말씀에서 보듯이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한들 몸에 병이라도 있어서 자리에 누워 있다고 한들 그래도 사람의 욕심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죽음은 지금 당장으로 볼 때는 내가 함께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의 단절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그것은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죽은 자들이 다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점에서는 다 같아도 결과는 각각 다른데 살아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영생의 부활로 하늘나라가 그들의 안식처가 되지만 예수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 죄를 따라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볼 때 저가 잔다고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깨어 일어나는 것은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잠이 들었던 사람이 다시 깨어 일어나는 것처럼 죽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부활은 다시 살아난다고 할 때 이는 곧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지 않고서야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가 그럼 언제입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 즉 재림의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곱 남편을 모셨던 그 여인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뭐 일곱 남편이 아니었더라도 이 수혼제를 따랐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의 때에는 이런 곤란함이 있을 터인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 곤란함은 나중입니다. 곤란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물론 죽음을 전제로 하지만 이는 또한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과연 그 사람이 심판의 대상이냐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이 땅에 있을 때 마쳐야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결코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까? 이미 그 준비가 다 되어있는 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이요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분들이 혹 계시다면 이 시간 예수님을 내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은 두 가지 점에서 오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도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육체까지도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결코 영혼만의 부활이 아닌 완벽한 육체를 지닌 부활입니다. 하지만 부활한 생명체는 천사와 같아서 영적이며 영광스럽고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지도 못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것을 선하게 하는 신비로운 부활만 제공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부활이란 없다고 해서 전혀 믿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믿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부활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해도 부활은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생명의 부활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질문을 하고 있지만 모두를 떨게 하는 심판의 부활로 들어갈 자들이 보다 많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자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입장에서 누구의 아내냐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걸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생명의 부활로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좋다 너희가 다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때는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 가고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 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때와의 차이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그 속에서 참 삶의 의미를 느끼고 자손의 번성을 꾀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큰 기쁨이 항상 존재하고 온 인격체들이 한 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것과 자손을 퍼뜨리는 일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맞지만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며 큰 기쁨과 감사함으로 항상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평안이 넘쳐나는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또한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대등한 입장으로 하나님 앞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도 함께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결코 과거에 죽어 사라진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아브라함과 이삭도 야곱도 다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아닌 다시 살아있는 자라는 것은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들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단절을 생각하지만 그들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자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은 뒤로 하더라도 한 가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알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우리가 머무는 곳일 뿐입니다. 이곳이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애써서 모으고 그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결과적으로는 내 것이 아닙니다. 잠시는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보면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늘나라에 쌓은 것은 예외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썩어질 재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살아남으로서 비로소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지금 이 땅에서 훈련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광 그리고 상급과 면류관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코 헛된 삶이 아닙니다. 보다 보람되고 복된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삶이요 더 이상 나 위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가 아닌 나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좋고 나쁘냐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더 좋게 여기시는가, 무엇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이 될 것인가를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실패도 하고 그로 인해서 속상해 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는 것이요 내려놓음을 통해서 보다 크고 좋은 것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들 그렇게 슬퍼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섭섭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너는 그럼 내가 얼마를 더 살았으면 좋겠느냐?” 
“지금까지 사신 것만큼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욕심이다.” 
프란체스코가 다른 제자 보고 또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살았으면 좋겠느냐?” 
“일 년만 더 사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자 “너는” 하고 또 다른 제자에게도 물었습니다. 
“하루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마지막으로 수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냐.” 
“한 시간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한 시간에 뭘 하려고?” 
“선생님과 함께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한 번 더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만났다면 얼마를 더 요구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무엇에 쓸 것입니까? 내 생이 더 연장될 때에 연장된 그 시간은 나에게도 유익하고 남에게도 유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연장된 그 시간이 오히려 욕이 되어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더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살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부득불 더 살아야 할 줄로 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 가서 지내는 것이 소원이다. 이 괴로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앞으로 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고 내가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하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이 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입니다. 나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바로 온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 가족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모든 족속에게 땅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 모두를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법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실 때 마지막으로 당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때 주님이 챙기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제일 먼저 챙기실 것이 바로 너는 몇 명의 제자를 삼았더냐? 너는 이를 위해서 진정 땅 끝까지 갔더냐 하는 것일 겁니다. 이 땅 끝은 물론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땅 끝도 될 수 있지만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비움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 앞에 주님의 사랑 앞에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산 자로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퍼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 주일,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의 부활로 나가는 것을 결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러 가노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내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 주님의 살아가신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까? 무엇이 참 사랑의 실천입니까? 무엇이 진정 살아있는 삶입니까? 오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 앞에 진정 산 자로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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