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4) (고후 13:5)

  • 잡초 잡초
  • 350
  • 0

첨부 1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4) (고후 13:5)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1. 오늘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으로 네 번째, 그 마지막 말씀입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확증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과 생활이 있는가?’를 자문(自問)해 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8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은 ‘믿음 안에서’라는 뜻이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믿음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3을 보겠습니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을 위해서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 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원망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범사에’, 즉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생활로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야만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궁에서 생활하며 왕궁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왕궁에서 나오는 모든 음식은 우상숭배 제물로 바쳐진 후 제공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왕궁 음식을 거절하고 우상숭배에 사용되지 않은 채식만을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왕궁 최고의 식단을 취한 소년들보다 그 지혜와 총명이 10배나 뛰어났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인정받아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후 국명(國名)과 왕이 두 번씩이나 바뀌어 메대의 다리오 왕에 이르기까지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영적 능력으로 모든 관료들 중에 월등한 존재로 부각되었습니다. 두 왕국의 흥망성쇠의 부침 속에서도 총리 직분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믿음을 지키고 거룩한 생활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단6:10) 이러한 사실이 다른 고관들의 시기와 질투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다른 관료들이 다니엘을 끌어 내리기 위해 그의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치명적인 결점을 찾으려 표적 수사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최후 수단으로 우상 숭배를 금하는 다니엘의 신앙을 이용해서 다니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들은 평소 다니엘의 투철한 신앙,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배하는 신앙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 외에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소위 ‘황제 숭배 예식’이라는 ‘악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는 것을 겨냥한 ‘악법’이었습니다. 

고관들이 이러한 악법을 제정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그 법을 고치지 못하도록 왕이 직접 친필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법 제정을 기분좋게 여겨 서명하여 곧 그 ‘악법’이 발효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총리로서 이 법 제정을 알고 그 법령에 불복할 경우 자신의 직분은 물론 목숨까지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악법’때문에 매일 드리는 기도와 감사 생활을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否認)하고 자신의 신앙을 더럽히는 것이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단6:10)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 세 번씩 감사 기도했다는 것은 비록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나라 민족이 멸망당했지만 조국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비록 자신과 더불어 수많은 동족들이 포로생활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라 민족을 회복시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매일 감사드린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이 악법에 따라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상한 곳 하나 없이 살아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다니엘의 무죄가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다니엘의 무죄가 증명되고 그 악법은 다니엘을 참소했던 자들이 꾸며낸 정치적 반역 음모였음이 드러나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법에 따라 사자 굴속에 던져져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범사에’, 즉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감사하는’ 신앙생활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벧전 1:16)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골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2. 다음으로,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의 삶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 후서 2:14-15을 보겠습니다.

(고후2:14-16)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凱旋)할 때 길가에 향을 피워 냄새를 내게 한 것을 비유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인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5:51-5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도 바울이 예수 믿음으로 가지게 된 비밀, 믿지 않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 믿는 성도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때, 죽은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썩지 않는 부활체, 영원한 생명체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 호세아 13:14에서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는 성도가 되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거부(巨富)라도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 호령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죽음 앞에는 무력한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그 어느 누구라도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며 사망 권세를 정복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최고의 지식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며 그 사망의 세력을 극복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승리는 오직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냄새” 곧, “생명의 냄새”가 나는 것이고, 그러한 부활을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사망의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믿음 밖에 있는가에 따라 생명과 사망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유무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냄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개념 하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라’라고 하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토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꿀벌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고 다른 자들을 위해서는 독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토라’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생명의 약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부활 신앙으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때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고전15:51-57) 

부활 신앙으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 곧 “생명의 냄새”, “그리스도의 냄새”를 내게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생명의 냄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확증하기 위해서는 부활 신앙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냄새”가 나타나는 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전도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the aroma)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을 온전히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번제라고 하는데 이 번제를 다 태워 드릴 때 나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출29:18)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으로 행할 때에 그 삶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믿음 안에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셔서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사이비 이단(似而非 異端) 세력에 미혹되는 모습에 안타깝고 괴로운 심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에서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stigma)인데 이는 소나 양에게 낙인(불도장)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노예(종)에게 이 낙인(the mark)을 찍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낙인은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도록 되었습니다. 한 번 낙인이 찍힌 가축이나 종은 평생 주인의 소유가 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처분되고 종은 평생토록 오직 주인의 뜻에 따라 절대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스티그마타’(stigma), ‘낙인’, ‘흔적’은 분명한 소유관계와 주종관계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의미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에 주인이시고 자신은 그 분의 종임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역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으로 고백하며, 자신을 소유하신 주님의 뜻은 자신을 사망의 어둠에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나’ 사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사울’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 믿는 믿음으로 ‘낙인’이 찍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나를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숱한 핍박과 박해의 상처들을 고난의 흔적,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흔적들은 실제 육체적으로 당한 흔적들과 마음에 받은 상처들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23-28과 로마서 9:1-3을 보겠습니다.

(고후11:23-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롬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의 몸에 새겨진 고난의 흔적들은 예수 복음 전도로 인한 것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예수님 때문에 생긴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다가 겪은 십자가 고통의 흔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니 정신적 아픔, 육체적 고통, 물질적 손해가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실망과 좌절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나의 영혼에 나의 육체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 예수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예수의 사람이고 예수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핍박과 고난의 흔적’은 아니더라도 예수의 일을 하다가 마음 상하고, 눈물 흘리고, 손해보고, 슬프고 아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을 지닌 증거이고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사람을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예수님은 알아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 그의 억울하고 분함을, 그의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러므로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은 결코 고통과 고난의 표징이 아니라 의의 면류관이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육체의 고통도 크셨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유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상에 이르기까지 받으신 멸시와 천대, 희롱과 조소였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마음과 정신적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족들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온갖 멸시 천대 조롱을 다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셨던 것처럼 바울 사도 역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몸과 마음, 정신에 수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가 입은 몸의 상처들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입은 상처의 흔적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마음에 입은 상처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타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자녀를 해산하는 고통도 크지만 그들을 기르는 고통은 더욱 큰 것과 같이 교회를 세우는 고통도 크지만 교인들을 돌보아 기르는 고통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흔적>이 생길 정도까지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받아야만 비로소 교회 일이 무엇인지,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깨닫고 교회 나가네 들어가네 하지 않고, 교회 성장과 성숙에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디로 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자신은 주님의 것으로 살았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고자 하신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아픔과 고통, 희생을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가시와 창에 찔리심으로 입은 상처가 우리의 병든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자신과 가정, 교회와 나라 민족의 병든 것이 고침을 받고자 한다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예수와 복음, 그리고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 없이 부활이 없는 것처럼 예수의 흔적이 없이는 다시 태어나는 새 생명의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도마처럼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 보는 것으로 그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직접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 예수의 흔적을 지니는 신앙생활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