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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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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 3:4~14)

    
설교내용       

수능을 친 다음 날이면 수능성적 때문에 자살했다는 보도를 요즈음 심심하지 않게 봅니다. 아직 꿈을 활짝 펼쳐야 할 나이에 수능 시험 한번 실패했다고 새파랗게 젊은 아이들이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가 이해도 되지 않지만 우리사회가 많이 병들었고 어른들이 잘못이 많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치관을 잘못 심어 준 결과요 목적을 제대로 가지고 살도록 만들지 못한 잘못이지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러기에 소중한 목숨을 아무렇게나 내 동댕이치는 거지요. 

몇 년 전에는 한 학생이 우수한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 지 얼마 후 책상 서랍에서 그 학생의 유서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자살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만 합격한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말씀에는 목표에 대하여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에 같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옥에 같혀 있는 바울이 나는 푯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목표가 있습니다. 빌 3장 12-14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 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한 잡지사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위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오늘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겁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보람이 있습니까?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힘이 나고 소망이 생깁니까? 그러면 잘 사는 것입니다. 잘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주님을 푯대로 삼았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주님입니다. 다른 것이 그의 푯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 이 말은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하던 말입니다. 하나는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골인 지점을 향해서 전력질주 할 때 쓰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냥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푯대로 정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눈 팔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전력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게 살았습니다. 또 바울은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힘을 다해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가면서 감옥에 같혀 가면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면서 추위에 덜덜 덜면서 배고파 기진할 정도가 되면서도 중단하지를 않았습니다. 

바울뿐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고기 잡으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그의 목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일을 위해 평생 전력질주 했습니다. 

모세는 애급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도망 나와 그의 인생의 모든 목표를 잃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 인생은 양치기로 끝나고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원하다면 양치기가 백번 더 편합니다. 양만 잘치면 뭐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질 사람도 없습니다. 그를 비난할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 원망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힘든 일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 놓았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전력 질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목표를 향하여 전력질주만 할 수 있다면 성공합니다. 

오래전 TV 프로에서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를 카메라가 따라 갔습니다. 유치원에서 집까지 천천히 걸어도 5분이면 될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나오더니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태평세월입니다. 여기 저기 둘러보고 가게에 들러서 신기한 듯이 이것, 저것에 한눈을 팝니다. 시장 통에 접어들어서 약장수의 원숭이 쇼를 한참이나 구경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자기 또래 아이들 노는 것을 또 넋을 잃고 지켜봅니다. 무려 5분 거리를 1시간이 넘게 걸려서 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는 삶이 그렇습니다. 이것저것에 한 눈 팝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한눈을 팝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세상사는 동안에 잠시 필요하기는 하나 거기에 자기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런 것들은 우리생명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13절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달려가노라 뒤에 것은 무엇이고 앞에 것은 무엇인가요? 뒤에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목표이고 앞에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의 목표입니다. 

바울의 뒤에 것은 신뢰할 만 했습니다. 4절 이하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순수한 히브리인의 가정에 태어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낳은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고 그래서 그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사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던 것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 바울이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한 이유는 바리새인이 율법에 정통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나 바리새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율법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학문적으로도 대단해서 그때 당시 최고의 학부로 인정되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신뢰 할 만합니다. 자랑 할 만합니다. 그런데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해로 여긴다. 는 말까지 합니다. 더욱 나아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앞에 것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했습니다. 잃어버릴 것은 속히 잃어 버려야 합니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67세 되던 어느 겨울날 실험실이 불에 탔습니다. 실험실에 있던 모든 자료들과 실험 기구들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에디슨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함께 불구경을 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장면을 태연히 바라보는 에디슨에게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실망되지 않으세요?" "어차피 끌 수 없는 불인데 실험실을 잃었다고 해서 웃음마저 잃어서야 되겠니?" 얼마나 의젓한 자세입니까? 잃어버린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을 잃었습니까? 건강을 잃어 버렸습니까? 예수님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종을 맞이해서 병원에 누워 있을 때 1968년 12월 빌리그레함 목사님께서 월터리드 병원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방문했습니다. 병문안을 갔더니 대통령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알려주었습니다. “누구도 천국 갈 자격은 없습니다. 누구도 자기 공로로는 갈수 없습니다. 당신도 못 가고 나도 내 힘으로는 못 갑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있는 말씀대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앞에 천국 갈 때 대통령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고맙네, 이제 나는 준비되었다네.” 하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그안에 구원이 잇습니다.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의 은총을 알아야 합니다.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이 땅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가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예수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예수 공로 의지하여, 그래서 모든 것이 부족해도 주님을 의지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설명이 구원입니다. 부활입니다. 상급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부활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습니다.

호텔이나 높은 빌딩에 가면 반드시 비상구표시가 있습니다. 이 등은 전기가 오든지 안 오든지, 밤이나 낮이나 스물 네 시간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위기를 당했을 때 가는 길, 통로는 저쪽으로 가라고 방향을 표시해 줍니다. 위기가 올 때 그길로 가면 사는 길이 나옵니다.

온 인류가 사는 길은 어디입니까? 온 세계가 구원을 받는 비상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길이 없습니다. 미국에 가도 비상구는 그리스도입니다. 영국에 가도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의 비상구입니다. 살길은 예수님을 붙잡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분에게로 달려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님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오늘도 그분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래서 잡으려고 달려간다 했어요. 바울 같은 분도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 한다 그랬어요. 그러면 우리는 더 달려 야지요.

사도바울은 사실 이 세상에 기독교 크리스천으로는 최고의 신앙의 사람입니다. 바울같이 경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바울같이 의로울 수 있습니까? 바울은 율법에 요만큼도 틀린 일이 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같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같이 희생하고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같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늘도 본문에서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이제는 내가 다 이루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오늘도 이런 사모하는 심정으로 따라가는 그 모습이 바울의 힘입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진귀한 보석 한 개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보석을 시장으로 가져가 값을 물어보아라. 그러나 어떤 값에도 팔지는 말아라." 제자는 맨 먼저 과일 가게로 가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보석에 대한 댓가로 무엇을 주겠습니까?" "오렌지 두 알을 주리라." 다음으로 감자 파는 상인한테 갔습니다. "그 보석을 내게 준다면 감자 네 근을 주겠소." 이번에는 대장간으로 갔는데 대장장이는 한 때 보석상을 한 경력이 있어서 그 보석을 5백 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몇 군데를 더 거친 뒤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상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이 보석상 주인은 그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보석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이 보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답니다." 

보는 눈이 보배입니다. 알아듣는 귀가 보배입니다.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바울은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가장 고상한 것이 가장 자랑할 것이 예수그리스도임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귀한 것으로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에게 잡혀 산다.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어떤 곳에서 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갔을 때에 점잖은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는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의 끝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잘 들었습니다. 한가지만 물읍시다. 목사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나의 미래를 누군가가 꼭 붙들고 계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과거를 붙들고 있듯이 현재를 붙들었듯이 그 분이 앞으로 남은 미래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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