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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을 버린 백성 (삼상 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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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버린 백성 (삼상 8:1~21) 
 
 
본문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왔던 7장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지자 맏아들 요엘과 차남 아비야를 사사로 삼았습니다(1-3). 그런데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했습니다(3). 사무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분명하게 금하는 일을 행합니다(출 23:8; 레 19:15; 신 16:19). 불량자였던 엘리의 두 아들들을 연상시키지요. 사무엘도 엘리처럼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사랑하여 신앙 교육을 게을리 했을까요(2:29)? 본문은 사무엘의 태도를 지적하기보다 그 아들들이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경건하다고 해서 자식이 반드시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와서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4-5). 사무엘의 늙었음과 자식들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아브라함 때부터 예견되었었고(창 17:6; 49:10), 모세도 말했었던(신 17:14-20; 28:36) 왕정을 요구한 것은 장로들이 생각하기에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사사 정치가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할지라도 지난 역사를 보면 이미 오랫동안 실효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을 적절하게 제시한 셈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6).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근본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르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와 그분만을 섬기도록 회개를 촉구했었지요. 사무엘은 그 일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가르치고 반복해서 백성들을 교육했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바로 잡고 그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왔겠지요. 그런데 장로들은 문제의 핵심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낡은 제도 때문이라 판단했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7절을 보면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청을 받고 버림받는 심정이 되었던 듯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다스리는 동안 블레셋을 막고 평화를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돕기 위해 열심히 말씀을 가르쳤겠지요. 그런데 그 교육이 하나도 먹혀들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 할 장로들이 황당한 분석과 대안을 내놓았으니 힘 빠지고 맥 풀리는 일이지요.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장로들의 요청 속에서 사무엘은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왕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 왕정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왕정을 구한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실 수 없었던 것은 왕정을 요구의 이면에 숨겨진 반신국적인 욕망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이 이제는 싫증났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삶의 안전을 보장받는 신정정치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신앙이 없어도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원했습니다.

장로들의 요청이 어리석은 까닭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유지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 회개치 않을지라도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왕정을 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마음가짐이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지요. 전심으로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을지라도 삶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 제도를 꿈꾼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강대국을 사용하여 그들을 죄를 징계하시려 할 때에 그 손길을 막아 줄 인간 왕을 요청한 셈입니다. 이런 마음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영적으로 무지한 문제고, 의도했다면 대단히 사악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장로들의 태도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늘 있어왔던 고질적인 문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8). 하나님께서는 왕을 구하는 장로들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맥락에 있음을 지적하셨지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왕정이라는 제도가 실제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물질에 의존하며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는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민족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언제나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국이 강성했을지라도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들에 비교하면 그 규모가 초라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강대국으로부터 그들의 삶을 보호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싸워 오셨고 보호하셨음을 기억하지 않았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그들의 죄로 인해 이방인들의 압제를 받아왔는데, 그 모든 일이 마치 제도가 부실하여 생긴 일처럼 왜곡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대할 때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그때까지가 아니라 참으로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백성들 중에 있지 않는지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버린 신앙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을 버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보이는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물질이 나와 내 자녀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본문의 장로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도록 힘쓰며 죄를 회개하는 삶이 지겹고 그런 것이 없이 평안한 삶을 누리길 원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이 내 삶에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9)고 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열방의 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11-17). 반복되는 이미지는 착취하는 전제 군주의 모습입니다. 왕은 자기를 위하여 백성들의 “아들들을 취하”며(11), “딸들을 취하”고(13),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고(14),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고(15),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를 취하”고(16),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17). 신명기 17장에서 모세를 통해 계시하셨던 왕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신 17:14-20).

신명기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자기를 위하여 과도하게 취하지 않는 왕이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계획 속에 두셨던 왕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당신님의 백성을 잘 섬기는 자였지요. 하지만 본문에서는 열방 왕의 모습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나라 외부에 있는 열방의 왕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여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라 안에 있는 열방의 왕 같은 왕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여 종이 될 것입니다. 일종의 심판적 허용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18)는 말씀이 엄중하게 경고됩니다.

하지만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19-20)고 했습니다. 그들은 왕을 요청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열방과 같이”(5)되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20) 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일쯤은 괜찮다고 응답했지요. 열방과 같이 되어 살 수만 있다면 왕의 착취쯤은 기꺼이 각오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려서라도 ‘그들 자신을 위하여’ 얻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없었지요.

이로써 장로들의 속내는 분명해졌습니다. 겉으로는 사무엘과의 사이가 삐걱거린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생겼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의 실정을 언급한 것은 그 사건은 자기 속내를 숨기면서 왕을 구할 수 있는 적절한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정을 허용 기미가 보이자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별되는 삶, 그분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선언인데도 포기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여호와의 싸움’ 대신 “우리의 싸움”(20)을 싸울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 그분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 거룩한 사명을 받은 존재라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은혜였던 것이 이제는 하루속히 벗어버리고 싶은 고통스런 짐이 된 셈이지요. 하나님의 통치가 부담스럽다는 태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꿈꾸고 있으니 반신국적인 사단의 역사가 그 속에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고 미래의 평안한 삶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가 오늘날까지 우리 속에도 있지 않은 지 깊이 반성해볼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소원 속에도 열방과 같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는지요. 그분께서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로 제공해주신 보다 나아진 삶의 형편 속에서 오히려 더욱더 ‘열방과 같이’되고자 갈망 한다면 참으로 깊이 회개할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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