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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떡과 함께 복음을 (막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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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함께 복음을 (막 8:1~10)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게 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생명의 떡이 되심을 교훈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떡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가난한 자를 돌보며, 먹을 것을 주는 단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떡만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제일 뿐이다. 구제하는 곳은 교회 아니고도 많이 있다. 구제가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은 복음과 함께 떡을, 떡과 함께 복음을 주셨다.

1.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2)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4천명의 군중(마15:38=여자와 어린이 외에)들은 모두 삼일동안(2)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뒤로 미루고, 배고프며, 덥고 추운 환경의 어려움을 견디어 내면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말씀 듣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2) 여기「불쌍히」라는 말은「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동정심」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 대한 보통 이상의 동정심이다.

예수님은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을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주님은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힘쓰고, 애쓰며,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문제에 개입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그들의 염려와 고통과 문제를 주님 자신의 염려와 고통으로 삼으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뜨거운 동정심을 가지신 가슴이 따뜻하신 분이시다.

똑같은 유리이지만 유리 그대로 있으면 밖이 훤하게 보인다. 그러나 유리에 수은이 칠해지면 밖은 안보이고, 나만 보이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영적인 수은이 칠해져 있어 남은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이 길에서 기진할까? 염려하셨다.(3) “기진”은 “탈진”이라는 뜻이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고, 주의 말씀을 갈망하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경건한 삶을 살고자 애쓸 때, 주님은 여러분의 배고픔도, 아픔도, 슬픔도 모두 아시고 여러분을 불쌍히 여겨 주신다.
주님이 불쌍히만 여겨 주신다면 문제는 끝난다. 


2.제자들의 불신앙(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대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걱정되어 그냥 굶겨 보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신 말씀이었다. 주님은 4천명의 무리를 먹이실 자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암시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불신앙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들의 대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이런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배부를 만큼 먹을 떡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말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자들은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이적들을 친히 보았는가? 
그러나 여기에 와서 그들은 마치 전에 한 번도 그러한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인간은 이처럼 어려움을 당할 때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큰 구원을 잊어버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다.
제자들은 특히 오병이어 이적에 대한 산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몸소 행하여 떡을 나누어주었던 장본인들임에 비추어볼 때, 그들의 대답은 매우 불 신앙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으며, 가난하고 궁핍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 자신과 엄청난 무리들만 보았을 뿐, 전지 전능하셔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자기들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제만 커 보였고, 주님은 작게 보였다. 이것이 제자들의 고질적인 불신앙이었다. 모든 긴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잊어버렸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의 소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삶의 고비 고비들이 있었지만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간섭하셔서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만, 현재의 위기 앞에서는 마치 과거에 한 번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처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며, 좌절하고 있지 않는가?


3. 바치는 것으로 일하시는 주님

제자들의 불신앙적인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다시「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떡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작은 생선 두 마리가 더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와 축복을 하신 후 제자들을 시켜 나누어 주셨다. 여자와 어린이 외에 4천명이었으니 모두 합한다면 만 명 가까운 무리들이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일곱 광주리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떡과 생선이 없어도 결심만 하신다면 그들을 얼마든지 배불리 먹이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일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그것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셨다.

가치 없는 것, 하찮은 것, 시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도 주님의 손에 드려지기만 하면, 기적의 자원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꼭 많은 것, 큰 것만 가지고 일하지 않으신다.

내가 주님께 드려지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주님의 손에 있기만 하면, 주님에게 온전히 헌신되어지기만 하면 새 역사는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싫어하고, 드려지는 것 자체도 원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욕망에 굶주려 있을 뿐이다.

“창조”라는 말의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바라」이다. 이 말은 무에서 유의 창조이다. 두 번째는「아사이다. 이 말은 기존재료를 가지고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창조이다. ⌜바라」를 영어 성경에서는 creat로 번역했고,「아사」는 make로 번역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은 6일 동안의 천지만물사건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제2의 창조「아사」의 창조를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드리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축복이나 이적은 기대할 수 없다. 먼저 내게 있는 것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라. 드리면 더 많아진다.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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