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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사랑 (눅 15: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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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눅 15:16~28)


사순절 넷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 안에 회복하고 싶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상식적, 우리 생각, 우리 힘, 우리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까지도, 그 나라까지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를 보면 예수님 계신 곳은, 언제 어디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主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못 마땅한 사람들이 意外로 많았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특히, 소위 남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던 바리새파 사람들(분리주의자들)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함께 임하던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건건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 1-2을 보면 그 이유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稅吏와 罪人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 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렸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배척했을까요? 이유는, 그릇된 유대종교의 신앙 때문입니다. 잘못된 유대종교의 전통 때문입니다. 

유대종교 신앙과 전통으로 보자면, 유대인이 異邦人과 상종하는 것은 違法(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범죄)입니다. 우리가 혹 유대인을 식사자리에 초대하고 싶어도, 초대할 수 없습니다. 異邦人인 우리가 유대인들과 함께 한 밥상에서 식탁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진수성찬이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異邦人이 만든 음식은, 그 어떤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부정하다는 종교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그런 예를 찾아보는 것,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首弟子입니다. 오천 명씩, 유대인들을 主님께로 인도하던 예루살렘교회 지도자 아닙니까? 그런 베드로지만, 베드로도 넘기 힘든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장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는 자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조차도, 우리시대 文化의 障壁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 하여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世俗文化의 盲目的인 消費者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마땅히, 世俗文化의 精神이 무엇인지? 세속문화 속에 녹아 있는 世俗的인 價値가 무엇인지? 銳利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지혜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 1). 순응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순응하지 않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사역)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일어난 충돌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자면 간접적인 사건입니다(구경꾼). 그러나 오순절 후, 하루는 제 9시에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보인 幻像은, 베드로 자신과, 유대종교의 전통과 신앙과 직접적으로 충돌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사건이, 오순절 후 福音이 최초로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분기점이 된 사건입니다(행 10, 11-13).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합니다(유대인들이 먹지 못하는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主여 그럴 수 없나이다. 俗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합니다(행 10,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幻像과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은, 베드로 입장에서 두 가지가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1) 유대인은 이방인과 상종할 수 없는 데,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환상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황제직할부대 백부장 異邦人 고넬료에게 복음 전하라는 사건과 관련된 환상 아닙니까? 그때까지도, 사도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異邦人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유대종교법상으로 違法이었기 때문에 그 유대종교의 법을 쉽게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 공생애 때 이미,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은 수 없는 異邦人 전도를 하셨습니다(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인 군대백부장 칭찬 등).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일이었지, 베드로 자신과는 무관한 일 아니었습니까?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쉽게 거부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유대인의 法, 유대인의 傳統의 壁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 어찌, 베드로만을 욕할 일입니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2) 유대인의 음식법(코셔) 때문입니다. 베드로 역시, 그때까지도 유대인의 음식법에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하시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 15-23). 베드로가 본 환상은, 결국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말씀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적용이 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 말씀을 잘 알지 못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님 당시, 異邦人 취급받던 稅吏와 罪人들입니다(신분사회; 최하위층-異邦人, 稅吏, 娼妓들). 그러면, 여기 나오는 맏아들은 누굽니까? 남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우리는, 어떤 아버지에게 있었던 두 아들의 관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그 두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아버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에게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분깃)을 떼어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 어서 돌아가십시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종교법상, 상속은 아버지 사망 시에 장남은 2/3, 차남은 1/3 상속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존 시에, 상속을 요구하면 둘째 아들의 경우, 2/9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부도덕한 일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2/9의 재산을 챙겨서 아버지 집을 떠나, 먼 타국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삽니다.

유의할 것은, 여기 ‘아버지의 財産’할 때, 財産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우시아스’(ouvsi,aj)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이 요구한 그 재산이, 얼마나 소중하며 본질적인 것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쉽게 요구했던 겁니다.
결국, 그렇게 중요한 재산 2/9를 챙겨서 이방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해버립니다. 그저 단순하게 재산을 낭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에 합당하지 않게 본질과 같은 재산을 허비했다는 말입니다[허랑방탕한, ‘아소토스’→‘a’(부정어)+‘sw,twj’(구원에 합당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때마침,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끼니조차 연명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합니다. 돼지라도 쳐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됩니다(이방인이 되었다, 다시 태어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게 되었다는 뜻). 둘째 아들이 당한 시련은, (1)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2) 그가 허랑방탕하게 산, 그 나라에 찾아온 천재지변과 같은 극심한 기근 때문입니다. 雪上加霜입니다…. 

그런 둘째 아들이,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는 스스로 회개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비유에서 보아 알 수 있지만, 이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집 나갈 때부터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자, 아들이 아버지를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알아보고는 거리도 먼데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뛰쳐나가 아들을 맞이합니다. 급하게 데려다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힙니다(스톨렌, 끝이 바닥까지 끌리는 옷, 왕들이나 제사장, 높은 지위 사람들이 입는 옷).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여러 중에 한 마리가 아닌, 그 송아지; 정관사 ton이 있음)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의 사랑에 異意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집에 머물면서 성실하게 일하며 지내던, 아버지의 맏아들이 그 사람입니다. 맏아들이, 여느 날 같이 하루 종일 밭일 나갔다가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 가까이 오자, 예정에도 없던 일, 사전 정보도 없던 일이, 자기 집에서 벌어진 게 아닙니까? 

한 종을 불러다가, 자초지종을 꼬치꼬치 따져 묻습니다(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함).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합니다. 그 소리에, 怒를 발합니다(‘오르기스데’ wvrgi,sqh,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분노하는 것).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哀乞합니다. 그러나 염소 새끼 타령만 합니다. 그 때, 아버지가 말씀합니다(32).

“얘, 너는 恒常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끝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생에 대한 생각도 바꾸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이런 상황 속에서 끝나버립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 비유를 모르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제자도의 말씀 끝 결론, 누가복음 14, 35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者는 들을지어다”는 강력한 권고말씀입니다. 곧,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강력한 弟子道를 수용할 의사가 분명하게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다 이 말씀을 듣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한 것은, 지난 주간 日本 나가사키 현 ‘사세보’ 市에서 2010 CBS 韓日聯合宣敎大會, 세미나, 나가사키 현에 있는 순교지 탐방이 있었습니다(일본기독교물줄기, 고향, 순교지). 
아시는 대로, 2010년은 한일합방(이 말은, 일본이 우리나라 국권침탈을 美化하여 부르는 말, 일제강점)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번 선교대회는 이런 역사적인 아픔이 있는 때에, 가진 대회입니다. 이 일에, 우리한국교회가 먼저 앞장섰습니다. 일본 全 敎團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선교대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일양국교회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더 놀라운 것은, 일본개신교 150년 역사 동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함께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첫 걸음에 불과하지만 이번에 대회에, 일본교회 각 교단 지도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포용하면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일본교회 지도자들 스스로가 놀라고 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환영사를 하신 일본의 요코타 타케유키 목사님이, 일본 교계 각 교단 목사님들이 오신 것은, 全 日本敎會가 참여한 것이라는 의미부여를 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일이 한국교회를 통해서, 일본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속된 말로, 기라성 같은 일본교계목사님들 자기발로, 공항 영접도 없이). 

한국교회만 해도, 사회적인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치인이나 정부가 교회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1억 2천 800만 인구 중 基督敎人 數가 56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교회가 8,000개 있다고 하지만(대다수의 교회가 10명, 20명, 30명 내외), 1년에 세례 받는 사람이 8,000명쯤 되는데, 한 교회에 1명꼴로 세례 받습니다. 아주 미약한 교회입니다. 이번 대회가 열린 나가사키 현 사세보 市, 市長이 직접 나와서, 환영사를 했습니다. 

그런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일본을 용서하고, 일본선교와 일본복음화를 위해서 일본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큰 축복이요, 큰 은혜아닙니까? 이 사순절 기간에, 내가 품지 못한 둘째 아들 같은 사람이 혹 있는지요? 우리 모두, 아버지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베푼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맏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죄인을 한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바리새인의 마음 서기관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맏아들의 마음, 영적인 교만, 죄인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그로 인해 불평하는 마음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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