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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 받을 성도가 되자 (마 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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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받을 성도가 되자 (마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나라는 지난 2월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의 선전과 함께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 메달 2개로 종합 성적 세계 제 5위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동 메달 하나만 따도 그 선수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는데, 그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은 이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와 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얼굴 하나 잘 생겨가지고, 목소리 하나 좋아가지고 엄청난 돈과 인기를 함께 거머쥐는 연예인들보다는, 피눈물 나는 연습과 각고의 노력 끝에 획득하게 되는 스포츠 선수들의 영광이 더 정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스포츠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따는 메달은, 세계적으로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받게 되는 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상을 받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주의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수많은 천사들과 천 천만 성도들 앞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스포츠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받게 되는 메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가치의 영속성 역시 영원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하늘의 상 받는 자들이 되도록 힘써야 할 필요가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가르치신 제자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받게 될 복과 상급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복음 사역자들이 언제나 핍박과 박해만 겪게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영접과 환대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할 사역자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40절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접하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누군가를 ‘손님으로 받아들이다’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무엇을 인정하거나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를 영접하는 자’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복음 전도자로서 자신의 집에 맞아들이고, 그들이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숙식 등 온갖 필요를 제공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좀 더 나아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영접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며, 그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살기로 다짐하는 태도와 행위까지를 가리킵니다. 결국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영접하는 자’란, 복음 전도자를 영접하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자는, 그들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린 자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로서, 보냄 받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시는 제자들의 위상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전권 대사의 위치에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사신은 그 나라의 권세와 왕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사신을 모욕하는 일을 고대에서는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겼습니다. 다윗도 왕으로 등극하자 사신을 택하여 암몬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교만한 암몬 족속의 왕과 신하들이 다윗의 사신을 박대하고, 나아가 수염을 뽑고 엉덩이가 드러날 정도로 그 옷을 찢어 돌려보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다윗은 진노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는 주님께서 세우사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내신 주님의 사신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5:20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했고, 엡 4:11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목사나 교사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또는 목사로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내심을 받은 목회자들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만한 질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세워 자신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교제하셨듯이, 지금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그 뜻을 밝히시고 인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주의 종들을 대할 때, 그를 보내신 주님을 대하듯 하시기 바랍니다. 

41절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먼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잘 공경하고 섬긴자들이, 그 선지자들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경외한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기도 덕분에 하나님의 진노 대신 태의 열매를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환대했던 가정들은, 극심한 기근 중에서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물질의 축복을 받았고, 잉태 하지 못하던 여인이 아들을 낳게 되는 복을 받기도 하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다시 살림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푼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은 모든 관원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음에도 예레미야 덕분에 그 포로 신세를 면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자들을 환대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받습니까? 먼저는 평안의 축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종들이 늘 주의 평안이 그들을 환대한 가정에 임하기를 기도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평안한 것이 그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다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잘 알게 되어 신앙 성장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주의 종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믿는 자의 영혼과 삶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세력은 도주하고, 영혼이 잘되고 그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을 얻게 됩니다. 그 다음은 온 집안 식구가 영생 구원을 얻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유럽에 처음 선교하러 갔을 때, 그를 환대한 루디아 가정은 모두 다 구원의 세례를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옥문이 열리는 기적 속에서 두려워 떨며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바울의 말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음식을 차려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을 힘껏 도와주었던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42절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작은 자’란 문자적 의미 그대로 나이 어린 아이를 가리키거나, 상징적인 의미로 사회에서 소외받는 연약한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가장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무덥고 메마른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먼 길을 걸어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 방금 우물에서 길어낸 시원한 물을 대접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교회 안의 가장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상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상은 반드시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상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성경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창 15: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였고, 사 40:10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라고 하였으며, 시 19:11절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고 하였고, 잠 11:18절에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하였으며, 잠 13: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마 5:11-12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했으며, 고전 3:8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하였고, 골 3: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했으며, 계 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는데, 여기 면류관은 물론 상을 말합니다. 또한 계 22: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상 주심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 역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히 11: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으며, 고전 9: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했습니다. 자, 이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한 확신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상에 대하여 강하게 부인하고 다르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상’ 또는 ‘상급’ 개념은 다가오는 하나님나라 라는 복음에 통합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면 그 자체가 상이고 상급이지, 또 무슨 별다른 상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신자들의 경쟁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에 대하여 주장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리켜 ‘상급론자’라고 하면서, 수준이 저급한 사람으로 매도를 합니다. 한 마디로 상 받기 위한 신앙생활은 고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매우 그럴듯한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저들이 하늘나라의 상을 부인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가면 모두가 공평해야지, 각기 상이 다르다고 하면 하늘나라도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 부목사들 중에도 이러한 주장에 현혹된 사람이 있어서 크게 질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저들의 천박한 인본주의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하나님보다 더 고상한척 하는 망령된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예수님은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안식교 같은 이단에서는 지옥이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옥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형벌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악인들의 영혼은 죽는 순간 존재 자체가 영원히 멸절되어버린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사람의 피를 흘리고 죽인 자들을 반드시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오늘 하나님보다 사랑이 더 많은 척 하는 위선자들은 사형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수십 명씩 죽인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흉악범들의 사형을 아직도 집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흉악범들의 인권이나 목숨만 중요하고, 무참하게 살해당한 무고한 사람들이나 그 가족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해버려도 좋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형폐지론자들의 선두에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랑이 더 많은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을 부인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보다 더 고상하고, 하나님보다 더 자기들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매우 잘못된 인본주의자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선 상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등상이나 개근상은 모든 학생들에게 다 주지 않고 소수의 해당 학생들에게만 줍니다. 또한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에게 메달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서 특출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곧 메달의 성격임은 삼척동자라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의 상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받을 상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심판에는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과 생명에 관한 심판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는 정죄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정죄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1)그리스도인들은 상급 심판을 받습니다. 

고후 5: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 받은 자들의 행위에 따라 상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작은 일까지도 되돌려 받는 자리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의 경주와 같고, 가장 엄격하고 공정한 심판관이 그 경주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성적을 조사하고, 거기에 상당하는 상급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심판대 앞에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는 벌이 없습니다. 상을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2)성도는 하늘의 상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나 사도 바울의 일생은 거룩한 야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상을 사모할수록 충성하는 성도가 됩니다. 하늘나라의 상을 사모할수록 우리의 삶은 성결하여집니다. 우리의 인격은 고귀하여집니다. 

3)하늘나라 상은 각기 행한 대로 받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현실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신자들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상 받는 것은 고사하고 구원받을 수조차 없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직 중생하지 못하고 진실한 회개와 믿음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결국에 가서는  결실치 못하고 말 소위 신학에서 말하는 일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은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면서 헌신하며 봉사한 일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좀 우스운 예기 같지만, 우리가 천국에 가보면 알몸에 팬티만 하나 걸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한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강도일 것입니다. 임종 전에 그가 입은 옷 그대로일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전에 예수님을 위해 한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라는 한마디로 낙원에 초대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구원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급까지 받을 신자들이 있습니다. 상은 잘한 일을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표적을 말합니다. 그래서 상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은 상 받는 일을 부러워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상을 얻도록 신앙의 달음질을 잘하라고 권면하였으며, 우리는 상 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삶이 어떠한 것일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는 것입께서 오시는 날 우리는 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이 땅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않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유명해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한 번도 환호를 받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환호를 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경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상으로써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면류관은 솔잎이나, 월계수의 가지와 잎으로 만든 월계관으로서, 곧 시들고 마르고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장차 성도들이 받을 하늘나라의 면류관은, 영원히 마르지 않고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여러분은 선지자나 의인들 곧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을 받기를 바라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 전도자들에게 주시는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을 꼭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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