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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회 없는 삶을 살자 (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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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삶을 살자 (요 19:23~30)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가 사랑했고, 존경했던, 신용태 선교사님을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처에 보내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지내다가 이처럼 헤어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슬픔이고 아픔이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표현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성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주의 품에 안긴 우리 신용태 선교사님은 이런 표현을 쓰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 지켜보았지만, 건강할 때나 투병 생활 가운데서도 자세하나 흩트리지 않으시며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삶을 불태웠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적으로도 자녀들 앞에 아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아버지요, 남편이었고, 교회에서는 언제나 신앙의 본을 보이며 늘 충성하던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비록 이 땅에서는 질병에 굴복 당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질병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기쁨과 넘치는 찬양이 있는 영원한 본향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여러분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의 계곡은 여러분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6시간 이상 매달린 채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한 마디 비명도 없이 계시다가 마지막에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를 그는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한 선포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예닐곱 시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비명 한마디 안 지르셨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처럼 죽음에 죽음을 거듭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돌아 버리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장시간 동안 몸이 부스러져 내리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까무러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닙니까?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안으로 흡수하면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 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평생에 정말 잊을 수가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해마다 교회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갑니다만, 한번은 강영순 선교사님이 있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우리 청년들이 선교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강선교사님은 다리를 저는 소아마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골 청소년 탁구 대표팀을 지도하는 코치로 계셨습니다. 우리 일행이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날에 너무 아쉬웠든지 양한마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저와 우리 청년들이 그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 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 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우리 청년들은 처음에는 양고기를 어느 누구하나 입에다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 둘씩 그 양고기를 먹기 시작을 했습니다만, 그날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달린 자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의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의 시세로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이며,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그리고 군중들을 보십시오. 그 당시 대제사장이나 빌라도가 약간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최소한의 공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의 생명을 끊어 놓는 사형을 선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악자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만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롬8:31-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였다 할지라도, 막상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잠잠히 내어놓지 않으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포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우리를 책임져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 C.S.루이스(Lewis)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다. 단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위대한 깨달음입니까? 해가 중요함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물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음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절대적인 것은 주님으로 인해서만 이 세상을, 나의 상황을, 나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가 존경하던 믿음의 동역자 신선교사님의 이야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염려 했지만, 그는 해골 같은 이 땅위에 십자가에서 터진 그 생명의 보혈로 온 땅이 적셔지기를 원했고, 건강할 때는 화산재로 뒤범벅된 필리핀의 피나투보의 원주민 사역을 위해, 그리고 병이 들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이 땅에 소외되고 병든 인생들과 함께하다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떠날 때 당신의 시신을 옮길 수 있는 돈 한 푼이 없는 빈털털이 인생으로 아내에게 빚만 물려주는 못난 모습으로 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죽음을 실패의 죽음이라 하겠습니까? 그는 가진 게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거룩한 나그네의 후회 없는 삶을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면서 꿈을 꾸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 나라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들어갑니다. 바로 내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이 땅에는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신자와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세상 가치를 뛰어넘는 기적의 삶을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나타나는 삶, 즉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도구로 삽니다.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며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사’로 살면서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데 진력합니다. 그에 비해 종교인은 세상의 관점 그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합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이 세상 사고방식을 갖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행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2절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또한 구원 받은 사람의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합니다. 이 말은 결국 세상의 나는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스스로는 죽고, 대신 그 안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진짜로 예수님을 만났는가”라는 것입니다. 자! 여기 “엄청나게 비싼 벤츠차가 있다고 칩시다. 수많은 옵션을 단 차입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벤츠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아무리 타이틀(목사, 선교사, 장로 등)이 좋아도, 고난도의 믿음 방정식을 알고 열심히 기도해도 기름, 즉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다면 조금 거칠고 무식해도 괜찮습니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는 그 분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제 우리 모두 남은 인생을 소중하게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국 런던 줴라드 크로스란 곳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십 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그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고통과 고난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의 유익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기회에 우리 모두 주님처럼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 위에 바로 서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정말 우리 역시 한 생을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있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서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영광을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찬송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주신 그 사랑을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주신 그 사랑을 알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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