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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용서, 성도의 사랑 (몬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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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서, 성도의 사랑 (몬 1:10~18)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몬 1:10-18). 

I. 본문의 배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쓴 편지 중 일부입니다. 그레서 이 빌레몬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분류됩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사도 바울의 동역자, 빌레몬은 노예를 거느릴 수 있을 정도의 재산가였습니다. 아마도 사도로부터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에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몬 1:2)라고 말했습니다.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군사 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이 편지가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과연 성경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레몬을 수신자로 하면서도 그의 집에 모이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회람형식으로 읽혀진 편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빌레몬서에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생각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실제 사건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신약의 보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도 했습니다. 

오늘 이 빌레몬에게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까지 편지를 보낸 이유는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와 관련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감옥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바울 가까이에서 그를 섬기는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 나은 아들, 동역자, 한 걸음 나가서 우리의 형제라고 일컬었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네시모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오네시모가 한때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II. 쓸모없었던 인간 

그의 정체는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가 바울을 만난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그의 죄를 고백 받는 가운데 아마도 그가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바울이 어느 집에서 도망쳤냐고 물었을 때 빌레몬의 집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약 팔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 그리스 시대에는 노예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라도 노예를 함부로 학대하거나 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와 함께 노예는 더럽고 힘든 일을 위한 노동력의 제공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노예의 도망이었습니다. 도망친 노예는 생계 수단이 막막해지자 범죄를 저질렀고 이 범죄는 사회의 불안요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친 노예는 아주 엄격히 다루어졌으며, 스티그마 제도에 따라 몸에 노예라는 표로 문신을 새기는 풍습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오네시모는 얌전히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빌레몬의 집에 피해를 주고 도망 나온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가 입힌 손해를 대신 갚기로 편지했던 것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오네시모는 “쓸모있는”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매우 평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이름과는 정반대의 형편에 있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 손해를 입혔고, 물질적인 피해를 주어, 도망친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사회에도, 노예 주인에게도,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저는 나의 심복이라”고 까지 말하며 그토록 아꼈던 것일까요?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요인은 무엇입니까? 


III. 변화된 오네시모 

A. 하나님의 용서 

첫째는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옥중에서 사도와 오네시모가 죄수로 만났다면 사도 바울은 고작 다 늙은 죄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젊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이 자기보다 더 쓸모없는 죄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큰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으로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사도 바울에게 들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자유로운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쓸모없는 인간 말종과 같은 존재, 아무런 희망이 없는 비천한 노예라는 자아상을 가지고 빌레몬을 비난했고, 그도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며 도망쳐 나온 불의한 죄수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그를 변화 변화시켰습니다. 빌레몬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같은 죄인도 용서하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신 후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자기를 운명과 같았던 노예의 처지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육신이 속박 받으면 영혼도 속박 받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여전히 신분은 노예였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신학적으로는 좋은 사람은 좋은 신자입니다. 곧 한 사림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로소 세상이 말하는 건전한 자아상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제력을 갖춘-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억눌리고 구겨졌던 우리의 인간다운 참된 본성을 펼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휴머니즘이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참으로 사람다워지는 비결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성취되는지 알게 되면 기독교야 말로 참된 휴머니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과 아름다움을 깎아 버리고 부수어 버리셔서 우리를 당신에게 맞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편견 사회적 억압으로 구겨져있던 것을 오히려 펼치셔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참인간으로서 활짝 꽃피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을 꿈꾸면 참된 휴머니즘이 아니라 비인간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면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휴머니즘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네시모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영혼과 마음을 바꾸시고 얽매였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그 붉은 죄에서 용서 받게 해 주셨던 과정을 통해 예전에는 쓸모없었던 사람에서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창자와 같이 소중한 심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B. 성도의 사랑 

둘째는 성도의 사랑을 통해 오네시모는 쓸모없는 사람에서 소중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만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가리켜 영적 출생이라고 보았기에 그는 “내가 갇힌 중에 나은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과 같이 신앙이 자라기까지 혼자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만나주셔서 우리가 그 모든 얽매였던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를 지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악한 죄를 짓고, 모든 사람에게 실망스러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나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경험했던 성도들이 우리의 허물을 끊임없이 용서해 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영육 간의 자원을 자신을 희생함으로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성도의 사랑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거미줄 같은 신앙이라도 붙들고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약 복음을 통해 오네시모를 만나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아끼는 사람 없이 비명횡사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로 오네시모는 변화되었고 사도 바울의 지극한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망가진 자아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거룩한 복음 사역에 사도바울의 심복이라 일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우리도 오네시모와 같이 주님의 집에 손해를 입히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는 정반대로 살면서 내 이웃에게는 찌르는 가시였고, 가족에게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이름 없는 성도들의 기도와 돌봄 때문에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IV. 결론 : 몹쓸 사람 -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 

우리는 이제 주변에서 실패한 오네시모와 같아 정말 하나님의 용서와 성도의 사랑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오네시모와 같은 그들을 주님을 위해 매우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는 교회의 섬김에 티끌만큼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숨질 때까지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편 강도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 끝머리에 아버지께 드린 중보의 기도가 예수님의 섬김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버려 나무에 못 박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쓸모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망가져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고쳐주신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또 다른 망가진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곳입니다. 주님 앞에 온전치 못한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도 한때는 그런 이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용서와 이름 모를 성도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을 주님의 교회에 남아있게 했음을 기억하고 베푸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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